제278화
* * *
청의 부모님은 한국에 들어오신 김에 좀 더 머무를 계획이라고 하셨다. 호텔도 숙소와 가까운 곳이라 청이 굉장히 기뻐했다.
콘서트 3일 차.
마지막 콘서트를 앞둔 멤버들은 이틀간의 피로가 누적되어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항상 예외는 있는 법.
율무와 청만큼은 팔팔했다.
“햄스터 일어나!”
“어어? 키티 접근 금지~”
방문을 열고 나오던 율무가 잽싸게 청의 앞을 가로막았다.
백야와 지한의 방 앞이었다.
“네가 몬데!”
“당백이한테 허락받았거든? 앞으로 내가 걔 보디가드야.”
“인정 못 해!”
첫째 날 콘서트에서 청이 벌인 만행을 알게 된 율무는, 그날 이후 백야보다 청을 더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인데, 이 나쁜….”
“What? 나는 그런 거 몰라.”
청은 시치미를 떼며 고개를 홱 돌렸다.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선수를 빼앗긴 율무만 억울했다.
“비켜!”
어린놈은 막무가내이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동생이라고 청이 밀어내자 율무는 힘없이 밀려나 주었다.
방문이 열리자 비어 있는 지한의 침대와 이불에 돌돌 말려 있는 백야의 뒷모습이 보였다.
순간 서로를 돌아본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백야의 침대로 달려갔다.
몇 발자국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서로를 밀치고 발을 거는 등의 온갖 반칙이 난무했다.
“Hey! 동생 막 밀어도 돼?”
“라이벌한테 위아래가 어디 있어.”
간발의 차로 먼저 도착한 율무가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암묵적인 룰에 따라 백야를 깨우는 건 율무의 차지가 됐다.
“당백아 일어나~”
커다란 손이 이불 더미를 살살 흔들었다.
“끄응….”
아침잠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깨우면 곧잘 일어나는 편이었는데, 오늘따라 미동이 없었다.
대신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불길함을 감지한 청과 율무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제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이더니 결국 사달이 나는구나.
“백야야.”
율무가 이불을 들추자, 식은땀에 머리카락이 젖은 백야가 끙끙 앓고 있었다.
이마를 짚어 보니 불덩이였다.
“안 되겠다. 청아, 남경이 형한테 전화해.”
청은 대답할 겨를도 없이 핸드폰을 가지러 방으로 달려갔다.
그사이 백야의 목 뒤로 팔을 깊게 넣은 율무가 등을 받치며 일으켜 세웠다.
“백야야, 정신 차려 봐. 너 병원 가야 할 것 같은데.”
“아니야, 안 가도 돼….”
“몸이 불덩이야, 지금.”
“콘서트….”
“안 돼. 이 상태로 무슨 콘서트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횡설수설하던 백야는 콘서트를 하지 못한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 돼. 나 꼭 해야 해.”
<천재 아이돌(5)> 퀘스트를 성공하려면 3일 동안의 콘서트를 모두 마쳐야만 했다.
에러창이 사라져야 스트레스를 낮출 수 있을 텐데, 이놈의 에러창은 어제 이후 사라질 생각을 않고 있었다.
‘잠깐이면 되는데….’
마지막으로 본 게 75%쯤 됐던가.
스트레스 지수 75%에 <병약미>까지 더해진 컨디션으로 버티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수액이라도 맞아 볼까….’
원인은 알지만 당장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차선책에 눈길이 갔다.
그때 화장실 문이 열리며 지한이 나타났다.
“뭐야? 왜 말도 없이 들어와.”
물수건을 든 그는 백야의 상태를 먼저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식은땀에 젖은 줄 알았던 머리카락은 알고 보니 지한이 덜 짠 수건 때문이었다.
“얘 아픈 거 알고 있었어?”
“응.”
“왜 말 안 했어? 열이 많이 나는데. 남경이 형한테 말해서 병원 데려갈 거야.”
단호함이 느껴지는 대답에 지한이 백야를 바라봤다. 가도 괜찮겠냐는 물음이 담긴 시선이었다.
물론 지한도 병원을 가자며 백야를 한차례 설득했었다.
하지만 소용없다며 완강히 거절하는 바람에 더는 권유하지 못하고 물수건이나 해 주던 참이었다.
“한백야. 갈 거야?”
그러나 백야보다도 율무의 대답이 먼저 돌아왔다.
“가야지, 뭘 물어. 옷 가져올게.”
율무의 굳은 얼굴을 본 백야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백야가 제일 처음 페널티를 경험했을 때, 율무가 자신 때문이라며 자책하며 울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 이대로 버티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몰라.’
에러창이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고, 확실히 이 상태로 콘서트를 하다간 무대 중간에 졸도할 것 같았다.
어쩐지 갈수록 민폐 캐릭터가 되고 있는 기분이었다.
* * *
- ○○병원 응급실에서 아이돌 봄. 모자로 가렸는데도 튀더라... 분홍색 머리 예쁘던데 나도 해볼까
볼 캡에 마스크, 후드 티 모자까지 뒤집어쓰고 갔지만 역부족이었다.
SNS에 올라온 목격담은 알음알음 퍼져 나갔고, 분홍색 머리라는 특징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는 백야가 아니냐는 추측이 이어졌다.
- 분홍색이면 다 ㅂㅇ임? 타 그룹에도 핑머 몇 명 있음
- 백야는 119 실려 갔다 왔어도 괜찮다고 할 애라 더 걱정된다고요ㅜㅜ
- 어제 안색 별로던데 결국 응급실 간 건가? 어떡해ㅠㅠ 넘 속상해ㅠㅠㅠ
- 그럼 오늘 막콘은 어떻게 되는 거야?
└ 공지 없는 거 보니까 그대로 진행하려는 거 같은데? 애기 아닌가 봐!
그러나 몇 시간 뒤, 약국 의자에 앉아 있는 백야의 직찍이 올라오며 소문은 사실이 되었다.
꽁꽁 싸맨 모습이었지만 동그란 귀하며 삐죽 삐져나온 분홍색 머리카락, 소매에 데이지 꽃 자수가 새겨진 검은색 후드 티는 데이즈의 단체복이 틀림없었다.
- 병원 목격담 보고 가슴 박박 찢기는 중... 난 아파도 상관없지만 애기는 절대 아프지 마ㅜㅜ
- 병원이라니 제발 별일 아니길...
- 아니 ㅅㅂ 애초에 시트콤에 음방 MC, 광고, 화보만 해도 애 잠은 잘 수 있는 건지 걱정됐는데ㅋㅋㅋㅋ 콘서트도 모자라서 컴백 준비까지 시키고 있었다니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옴ㅋㅋㅋ
└ ID에 아이돌이 얘네밖에 없는 거도 아니고, 아무리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지만 애를 이렇게까지 혹사시키면 어떡하냐고 미친놈들아
- 진짜 데뷔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쉬는 날은 있었나 싶을 정도로 계속 스케줄 있었고, 너무 한 멤버만 굴리는 거 아닌가 걱정됐는데...
└ 오늘 병원 목격담도 그렇고 처음 1위 한 날 방송국 복도에서 코피 흘렸다는 거도 그렇고 너무 속상하고 눈물나ㅠㅠ
백야의 정확한 상태는 모르지만 병원에서 목격됐다는 사실 하나로 팬덤은 초상집 분위기가 됐다.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백야도 난감해했다.
“셀카라도 찍어서 올릴까? 나 괜찮다고?”
이마에 쿨 패치를 붙인 백야가 열감에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수액을 맞던 중 에러창이 잠깐 깜빡였다.
그 틈을 타 스트레스 지수를 50% 이하로 낮추는 데 성공한 백야는 확실히 아침보단 상태가 나아 보였다.
“됐으니까 가만히 있지 그러니?”
물론 민성이 허락하지 않았다.
돌발 이벤트도 완료했겠다, 에러창만 해결하면 모든 게 완벽할 텐데. 업데이트도 아니고 처음 겪는 상황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백야로서도 난감했다.
“치.”
백야는 율무가 놓고 간 강아지 인형을 못살게 굴며 상태창을 노려봤다.
얼마나 기대하던 콘서트였는데. 시스템 때문에 어제는 역량을 반밖에 발휘하지 못해 속상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필승에게 받았던 연락까지.
[개발자님 : 관리자가 오류를 인지하고 복구해 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개발자님 : 게임이 설치된 기계나 백야 씨 계정 번호를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옛날 핸드폰을 어디서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계정 번호는 또 뭐야.’
성질이 나는지 솜 주먹이 강아지를 마구 두드렸다.
뾱, 뾱-.
화가 난 백야는 인형 위로 겹쳐 보이는 시스템창을 쥐어패는 중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애꿎은 인형에게 화풀이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강림한 조폭 햄스터에 실장이 안타까워했다.
“백야가 많이 아프긴 한가 봐…. 안 하던 짓을 하네.”
“아악! 안 돼에!”
인형에게 감정이입을 한 율무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마치 자신이 맞는 것처럼 아파하던 그는 한달음에 달려가 백야의 앞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왜, 왜 때리는 거야? 얘도 아파, 당백아….”
율무가 시무룩한 얼굴로 인형의 다리를 슬쩍 잡아당기려던 순간이었다.
[알림!]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일부 오류 정보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정보를 수집한 다음 자동으로 다시 시작합니다. (0% 완료)]
‘살았다!’
오류를 해결할 수 있을 만한 뭔가가 드디어 나타났다.
자동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대목이 불안하긴 했지만, 이제는 팀에도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둘이나 생겼으니 마냥 걱정되지만은 않았다.
인형을 휙 던져 버린 백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한에게 가려 했다.
그러나 너무 집중한 나머지, 바로 옆에 율무가 서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으악!”
율무의 가슴에 얼굴을 박고 튕겨 나간 백야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갑작스러운 터치에 율무가 양손을 포개 가슴을 가리며 수줍어하는 척했다.
“어멋. 갑자기 그렇게 막 안기면….”
“미안. 있는 줄 몰랐어.”
“오히려 좋은데?”
“이 씨. 야! 너 왜 여기에 있어?”
“그야 네가 내 분신을 자꾸 때리니까~ 나한테 뭐 화난 거 있냐고 물어보려고 왔지.”
율무가 손을 뻗어 백야의 이마를 자연스레 짚었다.
“쿨 패치 식은 것 같은데. 갈아 줄까?”
“또? 이거 잘못 샀나?”
5분 전에는 유연이 갈아 주었고, 10분 전에는 청이 갈아 주겠다며 멀쩡한 쿨 패치를 떼어 냈다.
이번에도 여우 같은 멤버들에게 선수를 빼앗긴 율무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됐어. 그냥 둘래.”
그래도 신경 써 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햄스터의 앞발이 율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러나 그럼 뭘 하나.
백야는 그를 지나쳐 지한에게 쪼르르 가 버렸는데.
“지한아, 지한아!”
요즘 들어 부쩍 지한과 붙어 다니는 백야를 보며 율무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지한아, 잠깐만.”
백야가 팔을 잡아당기며 보채자 지한은 순순히 대기실 구석으로 따라가 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지한이 백야의 이마를 짚어 보며 쿨 패치의 온도를 체크했다. 그러다 끄덕이는 고개에 손을 떼어 냈다.
“이번엔 뭔데?”
주위를 살핀 개복치는 살짝 까치발을 들며 지한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오류 복구 중이래. 이거만 해결되면 다시 예전처럼 건강해질 수 있어.”
예전에도 딱히 건강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떨떠름한 시선이 백야를 향했다.
지한은 백야의 말을 믿어 보려 노력하는 중이지, 아직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잘됐네.”
“그치? 그런데 조금 걸리는 게 있어서. 완료되면 자동으로 다시 시작된다는 문구가 수상하단 말이지.”
“왜?”
그동안의 경험으로 봤을 때 의식을 잃고 쓰러질 가능성이 높았다. 업데이트로 이미 두 번이나 데지 않았던가.
“음…. 내가 기절하거나 잠깐 어디 다녀올 수도 있어.”
“어딜 가는데? 멀어? 혹시 사라지고 그러는 건,”
하랑에게 들었던 말이 충격적이긴 한 모양인지, 무의식중에 뱉어버린 지한은 아차 하며 말을 멈췄다.
툭-
그때 담요 더미인 줄 알았던 물체가 무너지며 굳은 얼굴의 유연이 등장했다.
“사라진다니? 너 어디 가?”
[Error 503]
주르륵-
또 코피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