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0화
* * *
멘트가 끝나 갈 때쯤, 재현과 유경은 스태프를 따라 아티스트 대기실로 향했다.
어쩌다 보니 단아와 함께 움직이게 된 두 사람은 서로의 팔을 때리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미친. 존X 예뻐.”
“티 내지 말라고 개새끼야.”
유경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콧바람을 뿜어 댔다. 그 모습이 쪽팔렸던 재현은 뒤통수를 때리며 경고했다.
“아, 씹!”
재현의 시비에 작게 욕을 읊조리던 유경은 단아의 놀란 얼굴과 마주치자 굳어 버렸다.
“죄, 죄송합니다.”
허리를 숙이며 사과하자 멋쩍은 미소가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던 재현은 이내 귓속말했다.
“등신.”
발끈한 유경이 반격하려 했으나, 스태프의 안내가 이어지면서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멤버들 곧 내려올 거예요.”
당연히 단아는 두 사람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단아 님은 왜 꽃다발이 두 개일까? 하나는 백야 거라 쳐도 하나가 남잖아.”
“넌 지금 그게 궁금하냐? 백야 코피 나는 거 못 봤어?”
“그건 그래. 걔 수능 공부할 때도 코피 한 번 흘려 본 적 없는 놈이었는데. 설마….”
“설마 뭐.”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병에 걸렸다든가, 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유경의 뒤통수가 또 한 번 얼얼해졌다.
“야, 이…!”
“어디서 재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야, 그냥 찢어지자. 짜증 나서 너랑 못 다니겠다.”
“걱정하는 거잖아, 나도!”
다시금 투닥거리는데 멀리서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톤이 저희가 아는 사람 같았다.
“이거 백야 목소리 아니야?”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끅끅거리며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백야가 보였다.
마지막 곡을 부르던 백야는 결국 노래를 부르다 말고 울음을 터뜨렸다.
제일 먼저 발견한 율무가 달려가 안아 주자, 백야가 얼굴을 파묻으며 품에 안겼다.
결국 마지막 날까지 과즙을 흘린 백야는 퉁퉁 부은 눈으로 내려왔다.
“우으….”
“왜 또. 왜.”
나란히 걸으며 백야의 등을 토닥이던 민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차분히 달래 주는 손길은 따뜻했다.
“한백야!”
“너 이 자식…! 어디 아픈 거 아니지? 무슨 춤추다 코피를 흘리냐, 어이없게.”
한달음에 달려온 유경과 재현이 백야를 더듬으며 안색을 살폈다. 그 순간 한 번 더 과즙이 폭발했다.
뿌애앵!
“야아…. 왜 울고 그래에….”
“모, 흐윽, 몰라아…. 자꾸 눈물이 나, 끄으.”
콘서트는 무사히 끝났고, 조명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퀘스트를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 때문에 자꾸만 눈물이 났다.
어찌나 애처롭게 우는지 유경이 따라서 눈물을 터뜨리자 재현도 눈시울을 붉혔다.
흐어엉!
으아앙!
뿌애앵!
서로를 부둥켜안은 세 사람이 통곡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제일 황당한 사람은 바로 멤버들이었다.
“와…….”
민성이 조금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끼리끼리는 사이언스라더니.
꼭 친구들도 백야 같다는 감상을 한 멤버들은 덕진에게 백야를 맡기며 각자의 지인에게 돌아갔다.
“히끅. 이, 일단 사진 찍자.”
훌쩍-
너무 울어서 빨개진 눈가를 문지르며 백야가 덕진을 바라봤다.
“혀엉… 제, 흑, 제 핸드폰.”
“여기 있어요. 사진 찍어 드릴까요?”
백야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백야 님… 그런데 지금 너무 슬퍼 보이는데….”
코를 먹으며 훌쩍이던 백야가 덕진의 말에 활짝 웃었다. 1초 만에 돌변하는 얼굴을 본 친구들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새끼…. 연예인 다 됐구나?”
“그, 흑, 그런 거 아니야. 사진 찍어야 하니까…. 너희도 빨리 웃어.”
“야, 근데 그거 아냐? 울다가 웃으면 똥꾸멍에 털 남.”
유경이 막간을 이용해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백야가 또다시 울먹이며 눈시울을 붉혔다.
“우으으….”
“야, 이 미친놈아! 왜 애를 다시 울리고 지랄이야!”
“내가 뭐!”
유경은 본의 아니게 친구를 다시 울리고 말았다.
* * *
백일몽으로 순삭 당해 버린 주말. 월요일이 어김없이 돌아왔다.
“인생…….”
출근만 생각하면 기운이 빠졌지만, 저녁을 생각하면 뱁쌔는 힘이 불끈 솟았다.
그렇다.
오늘은 백야가 주연으로 나오는 <가족 같은 사이>의 방영일이었다.
‘이렇게 스케줄이 많으니까 애기가 무대 중에 코피를 쏟지.’
티켓팅 광탈로 온라인으로 데이드림을 함께한 뱁쌔는 마음이 아팠다.
전광판에 백야가 잡히는 순간, 코피가 주르륵. 아니, 주르륵도 아니고 줄줄줄, 아니! 콸콸콸 수준이었다. (실제로는 주르륵이었다.)
‘끕. 119에 실려 가고도 남을 만큼의 출혈이었다고.’
콘서트 둘째 날에 찍힌 프리뷰를 보며 처연해 보인다고 좋아하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내 새끼가 아픈 줄도 모르고….’
무대에서 코피를 한 트럭 쏟아 놓곤 웃으면서 앙코르 무대를 모두 소화했다.
그 프로 의식이 존경스럽긴 했지만 솔직한 마음으론 조금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뱁쌔의 몸과 마음은 따로 놀았다.
[(가족 같은 사이 #14) 밤길 조심해라... 바바리 맨이 된 백야?]
그래도 백야가 시트콤을 찍어 줘서 볼거리가 많은 건 행복한 일이었다.
섬네일은 또 왜 이렇게 귀엽고 난리인지.
교복 차림에 책가방을 멘 백야가 찡그린 얼굴로 포스트잇을 내려다보는 모습이었다.
영상을 재생하자 등교 중인 백야의 모습이 보였다.
신발을 쥐고 계단을 오르려는데, 마침 뒤에서 거대한 체구가 달려와 부딪치듯 어깨동무를 해 왔다.
[재욱 : 애기야!]
[백야 : 으악!]
백야가 휘청거리며 신발을 놓쳤다.
[재욱 : 딸기 공, 줍.]
[백야 : 나 이거 신발 들고 있던 손이야. 입 벌려서 넣어 줘?]
[재욱 : 으느.]
재욱이 고개를 도리질 치며 항복하자 백야도 그를 순순히 놔주었다. 입조심하라는 경고의 눈빛이 이어졌지만 재욱은 웃기만 할 뿐이었다.
[백야 : 까불고 있어.]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 새침하게 손을 턴 백야는 다시 신발을 주워 들었다.
유유히 계단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며 재욱은 ‘조그마한 게 성격 있다며’ 킥킥댔다.
[재욱 : 너희 어머니 잡채 진짜 맛있더라. 다음 파티는 또 언제야? 나 또 가도 돼?]
[백야 : 안 돼.]
[재욱 : 그럼 네가 나올래?]
[백야 : 싫어.]
[재욱 : 이미 나온 김에 오늘 학교 끝나고 피시방 갈까?]
[백야 : 독서실 가야 해.]
백야는 재욱의 제안을 모조리 거절했다.
그사이 사물함에 도착한 백야.
문을 열자 그곳엔 앙증맞은 볼펜 한 자루와 함께 편지가 놓여 있었다.
[백야 : …뭐지?]
누르면 플래시가 나오는 볼펜이었다. 옆에서 실내화를 꺼내 신던 재욱이 관심을 보였다.
[재욱 : 또 고백? 역시 우리 학교 최고 인기남.]
[백야 : 그런 거 아니야.]
재욱의 칭찬이 부끄러웠던 백야는 얼른 사물함을 닫았다. 그러나 빨개진 귀는 숨길 수 없었다.
[재욱 : 같이 가~]
백야는 자신을 귀찮게 하는 재욱을 피해 얼른 교실로 들어왔다.
그러다 이번에는 책상 서랍에서 또 다른 편지를 발견했다.
[재욱 : 또? 1일 2고백은 오랜만 아니냐? 요즘 뜸하더니. 역시~ 5월은 청춘의 계절이지.]
도대체 자신 어디를 보고 좋다는 건지. 백야는 난감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도 편지는 따로 챙겨 책가방에 넣었다.
그렇게 하나둘씩 가져온 편지는 독서실 책장 한편에 차곡히 쌓이고 있었다.
[백야 : 이걸 버릴 수도 없고….]
자물쇠를 풀어 책장을 열자, 편지를 모아 둔 상자가 문제집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름이 적혀 있는 건 당사자에게 돌려주며 딱 잘라 거절했지만, 어쩐지 그럴수록 백야의 인기는 더 높아져만 갔다.
문제는 이름이 없는 편지들이었는데….
상자를 꺼낸 백야는 편지를 뒤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가방에서 오늘 받은 편지를 꺼내 확인했다.
[백야 : 엥?]
그러나 하나는 빈 종이였고, 다른 하나는 알 수 없는 알파벳들이 적혀 있었다.
당연히 고백 편지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민망함에 책상 위로 엎드린 백야가 다리를 파닥거렸다.
[백야 : 쪽팔려.]
한참을 낑낑대던 백야는 허리를 바로 세우며 암호 같은 두 번째 편지를 해석해 보기로 했다.
전교 1등의 명석한 두뇌가 실력을 발휘할 시간이었다.
[dkssud?
sks 3qks thgmlfkrh go. sk sj whgdkgo. dlrj gotjrgkaus dnfl 1dlfdls rjdi!]
그러나 실패했다.
거꾸로 돌려 보기도 하고, 무슨 규칙이 있는 건가 계산도 해 봤지만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다.
[재욱 : 뭐 하냐.]
그때 재욱이 나타나 백야의 귓가에 속삭였다.
덜컹-
놀란 백야가 튀어 오르며 책상에 무릎을 박았다.
[백야 : 끄응….]
[재욱 : 괜찮냐?]
[백야 : 피, 피시방 갈 거라며.]
[재욱 : 갔는데 혼자 하니까 재미없어.]
백야의 옆자리에 앉은 재욱은 편지에 관심을 보였다.
[재욱 : 근데 그건 뭐냐? 오늘 받은 거?]
[백야 : 으응….]
[재욱 : 받아 줄 것도 아니면서 매번 읽기는 왜 읽냐? 보나 마나 사귀자 그러겠지.]
백야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고백 편지는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재욱 : 뭐야. 고백 아니야?]
백야가 입술을 말아 물자 재욱이 신이 난 얼굴로 종이를 낚아채 갔다.
한 번만 보여 달라고 해도 절대 보여 준 적 없던 백야는 웬일로 순순히 넘겨주었다.
[재욱 : 푸핫! 이게 뭐야?]
[백야 : 내, 내가 뭐 맨날 그런 거만 받는 줄 알아?]
괜히 민망해진 백야는 공부를 하려는 척 펜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비웃음이 들려왔다.
기분이 나빠진 백야는 홱,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봤다.
[백야 : 야. 나가서 떠들어.]
[재욱 : 나와 봐.]
[백야 : 싫어.]
한 번 싫다 한 건, 곧 죽어도 안 하는 걸 아는 재욱은 백야의 문제집을 훔쳐 달아났다.
[백야 : 야…!]
화난 눈썹을 한 백야가 도망가는 재욱을 노려봤다.
잠시 후, 백야가 콧바람을 뿜으며 휴게실에 나타났다.
문을 열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재욱이 보였다. 딸기 우유를 흔들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다.
[재욱 : 자, 애기 거야.]
[백야 : 안 먹어. 나 이제 딸기 싫어해.]
[재욱 : 그래? 그럼 내가 먹고.]
팩을 뜯은 재욱이 망설임 없이 마시자 백야의 눈썹이 아래로 휘며 호두가 만들어졌다.
참 알기 쉬운 얼굴이었다.
[재욱 : 삐지기는. 자, 네 거.]
원 플러스 원이었다며 숨겨 두었던 우유를 꺼내 놓자 백야의 기분이 조금은 풀어졌다.
이번에는 튕기지 않고 받아 든 백야는 작은 손을 꼬물거리며 우유를 한입 하는데.
[재욱 : 나 너 좋아해.]
[백야 : 푸우웁!]
뜬금없는 고백에 머금고 있던 우유가 그대로 뿜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