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1화
재욱과 백야 모두 굳어 버렸다.
재욱이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리자 백야가 구석으로 달려가 휴지를 가져왔다.
[백야 : 여기 휴지! 미, 미….]
[재욱 : 병 주고 약 주냐?]
[백야 : 미, 미친놈아 네가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재욱 : 내가 뭐! 난 여기 적혀 있는 거 그대로 읽은 것밖에 없는데!]
짜증 어린 목소리로 받아치던 재욱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재욱 : 잠깐. 너 설마….]
손에 들린 편지와 백야를 번갈아 보던 재욱은 이내 경악했다.
[재욱 : 미쳤어?!]
[백야 : 안 미쳤어!]
빨개진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던 백야는 휴지를 재욱에게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백야 : 꺼져 버령!]
그대로 독서실을 뛰쳐나간 백야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핸드폰도 지갑도 다 독서실에 두고 나와서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터덜터덜 걷는데, 그때 노란 포스트잇 하나가 날아와 백야의 등에 안착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야는 시무룩한 얼굴로 집까지 도착했다.
멀리서 백야의 모습이 보이자, 집 앞에 서 있던 재욱이 달려와 화를 냈다.
[재욱 : 너 바보야? 짜증 좀 냈다고 그렇게 가 버리면 내 마음이 어떻겠냐.]
[백야 : 미안.]
[재욱 : 알아 인마. 자, 여기 네 핸드폰이랑 가방. 그냥 책상에 있던 거 다 담아 왔다.]
재욱이 앞으로 메고 있던 가방을 벗어 건네주었다.
[백야 : 고마워.]
[재욱 : 너 때문에 세수도 못 하고 바로 나왔어. 아 씨, 얼굴 끈적끈적해.]
이 앞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에 백야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재욱 : 가방 줬으니까 간다.]
입술을 달싹이며 눈치를 보던 백야는 재욱이 돌아서자 팔을 뻗었다. 교복을 잡은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재욱 : 왜.]
[백야 : 라, 라면 먹고 갈래?]
[재욱 : 뭐?]
[백야 : 부모님은 여행 가셨고 누나들도 오늘 늦게 들어온대. 잡채는 없지만….]
백야가 미안한 마음에 횡설수설하자 재욱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백야 : 씻고 가.]
그래 봤자 재욱의 집은 옆 단지라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다.
[재욱 : 은근 찌질하단 말이야. 여자애들이 이 모습을 봐야 하는데.]
백야가 눈을 흘기자 재욱이 실실 웃으며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재욱 : 귀엽다고. 집에 짜장라면도 있냐?]
[백야 : 응.]
백야는 그렇게 재욱과 함께 돌아왔다.
[백야 : 잠깐만 기다려. 교복만 갈아입고 바로 만들어 줄게.]
그런데 가방을 벗자마자 노란색 포스트잇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백야 : 뭐지?]
백야가 갸우뚱거리며 쪽지를 주워 들었다.
[밤길 조심해라]
무려 빨간색 펜으로 적은 글자였다. 제법 섬뜩한 내용에 백야는 소름이 돋았다.
설마….
백야가 의심의 눈초리로 재욱을 바라보자 그가 격하게 부정했다.
[재욱 : 나 아니거든? 봐, 내 글씨도 아니잖아.]
확실히 재욱의 필체라기엔 너무 정갈했다.
그럼 이런 쪽지를 저에게 붙일 사람이 대체 누구지?
설가네 애기는 심각해졌다.
[재욱 : 너 무슨 짓 하고 돌아다니길래 이런 협박을 받냐.]
[백야 : 모르겠어.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재욱 : 혹시… 이거 고백 안 받아 줬다고 복수 뭐 이런 거 하려는 거 아니야?]
백야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백야 : 나, 나 어떡해?]
하교 후에는 항상 학원과 독서실을 들렀다가 밤늦게 귀가하는 백야였다.
겁에 질린 백야는 그날 라면을 한 젓가락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PM 11:30]
12시라는 통금 시간이 있는 딸기 공주는 귀가 준비를 위해 독서실 책상을 정리하고 일어났다.
오늘도 재욱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백야 : 나쁜 놈. 같이 좀 와 주면 어디가 덧나냐?]
맨날 피시방 타령만 할 거면 등록은 왜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의 빈자리를 보며 한심해하던 백야는 짐 가방을 챙겨 은밀히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수상하지만 귀여운 바바리 맨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왔다.
중년 여성의 것이 분명한 고풍스러운 무늬의 스카프, 아버지의 것이 분명한 투박한 선글라스, 작년에 샀지만 사이즈 미스로 소매가 조금 긴 바바리코트.
초여름이나 다름없는 날씨였지만 신변을 보호할 수만 있다면 이 정도 더위는 감수할 수 있었다.
샥, 샥-
기둥 뒤에 숨어 주위를 둘러보던 백야가 날렵한 동작으로 건물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일주일을 반복했다.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와 같이 등교한 백야는 여유롭게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반장이 종이를 팔랑거리며 들어왔다.
[재욱 : 그거 뭐야?]
[반장 : 아, 이거? 선생님이 붙이라던데. 요즘 학교 근처에 이상한 사람 돌아다닌다고.]
백야는 관심 없는 듯 시큰둥한 얼굴로 수학 문제를 풀 뿐이었다.
[하교 시 주의 사항 안내
(백야 뒷모습 사진)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선글라스를 낀 남성이 자주 목격됩니다. 하교 시 주의 바랍니다.]
친구들이 바바리 맨에 대해 떠들어 대든 말든, 이어폰을 꽂은 백야는 수학 문제에 집중했다.
그리고 저녁.
짐 가방을 든 백야는 오늘도 조용히 화장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변장을 하고 나오는데 누군가 백야를 향해 소리쳤다.
[독서실 주인 : 저 사람이에요!]
[경찰 : 경찰입니다. 잠시 서로 가 주셔야겠습니다.]
[백야 : 느에?!]
경찰이 백야의 양쪽으로 붙으며 팔을 포박했다.
자신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며 소리쳤지만 서에 가서 이야기하라는 말만 반복될 뿐이었다.
잠시 후 경찰서.
[백야 : (훌쩍) 히잉….]
[한별 : 죄송합니다. 동생이 겁이 많아서.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주의 시킬게요.]
[경찰 : 아닙니다. 들어가세요. 너도 그런 일이 있었으면 어른들께 바로 알렸어야지.]
경찰은 귀엽다는 듯 백야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백야의 포스트잇은 CCTV를 통해 확인했다.
재욱의 얼굴에 우유를 뿜고 도망친 다음, 편의점 앞을 지나갈 때 바람에 날아온 것이었다.
[한별 : 애기 다 울었어? 맛있는 거 사 줄까?]
[백야 : …응.]
쓰레기봉투에 담긴 바바리코트가 보이며 영상은 끝이 났다.
“따흑.”
귀여움 치사량에 뱁쌔는 입을 틀어막으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작가가 백야를 염두에 두고 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찰떡인 배역에 그저 감탄만 나왔다.
댓글 반응도 좋았다.
- 이건 그냥 백야잖아ㅋㅋㅋㅋㅋㅋ 애기 연기 왜케 잘해???
- 나비처럼 날아와서 어깨에 붙네ㅋㅋㅋㅋ 하필 밤길 조심해라ㅋㅋㅋ 스토킹 오해할 만하잖아요ㅠ
- 울 애기 첨 발견하고 얼마나 무서웠을까 개웃겨ㅋㅋㅋ
- 이미 글씨체부터가ㅋㅋㅋ 누가 봐도 초딩이 쓴 거잖아요ㅋㅋㅋㅋㅋㅋ
- 가족사 그냥 백야 일상 브이로그 수준인데ㅋㅋㅋㅋ 본체도 못지않게 웃수저라고요
- 햄스터 생활연기 달인이었음ㅜㅜ
- 작가가 나잉이네... 그렇지 않고서야 백야 캐해가 이렇게 완벽할 수 없다
<가족 같은 사이>는 나날이 시청률을 갱신하며 다시 한번 김 PD 신드롬을 일으켰다.
작품이 유명세를 타자 출연진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레 높아졌는데, 백야가 아이돌 그룹 멤버라는 사실에 놀란 이들도 많았다.
뱁쌔는 그 점이 흐뭇했다.
- 본업 존잘 백설이 (너튜브 링크)
└ 설백야가 원래 아이돌 가수였구나... 연기 너무 잘해서 신인 배우인 줄ㄷㄷㄷ
└ 요즘 아이돌 만능이네
- 백야 가족사 카페에서 애기, 백설이, 공주 (백설 공주/딸기 공주)로 불린다는 말 듣고 귀여워 죽음
- 얼굴도 허~얘서 백설이 잘 어울림ㅋㅋㅋㅋ 얘는 별명도 다 지같이 귀여운 거만 있더라
- 백설이 그룹 노래 다 좋은데?
- 울 공주가 깨물하트 걔였어???
‘미친. 공주라니? 백설이라니!’
뱁쌔는 백야의 새로운 별명이 마음에 들었다.
* * *
그 시각 잠자는 숙소의 백설 공주.
어젯밤 늦게까지 콘서트 뒤풀이를 하느라 새벽에 잠이 든 데이즈였다.
백야는 곧장 병원으로 끌려갈 뻔했으나 바닥에 드러누우며 떼를 쓴 덕분에 함께 고깃집으로 올 수 있었다.
“이런 날 술이 빠질 수 없지~”
율무는 고기가 나오기도 전에 소주를 들고 설쳐댔다.
멤버들에게 한 잔씩 술을 따라주던 그는 백야의 앞에까지 잔을 내려놨다가 지한에게 살해 협박을 받았다.
“죽고 싶어?”
“살려줘. 이건 진짜 실수야.”
아차 싶었던 율무가 황급히 잔을 회수하며 물 잔으로 대체했다.
“쟤네도 네가 책임질 거면 먹여.”
지한이 투닥거리는 유연과 청을 눈짓했다.
“야, 청. 너 뭐 하냐?”
율무가 백야의 잔을 바꿔주는 사이, 몰래 물을 부은 소주잔과 바꿔치기하던 청은 유연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너 그거 물이지. 이게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No! 이거 술이야!”
“뻥치지 마. 내가 너를 모르냐?”
주량 한 모금이라는 기록을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염병. 똑같은 것들끼리…. 둘 다 내놔.”
결국 민성이 막내즈의 술잔을 압수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애들은 사이다나 마셔.”
백야와 유연, 청의 앞에 투명한 유리컵이 놓였다.
“나는 마실 수 있는데!”
술찔이들과 같은 그룹에 묶이고 싶지 않았던 백야가 대뜸 외쳤다.
그러나 ‘아픈 놈이 무슨 술이냐’는 잔소리만 돌아왔다.
“넌 고기나 먹어.”
오히려 몸보신이라는 핑계로 먹스라이팅을 당한 백야는 통통한 배를 두드리며 침대에 누웠다.
백야가 마지막으로 본 상태창의 숫자는 91%.
‘자고 일어나면 다 해결되어 있겠지?’
조명 퀘스트를 무사히 넘겼으니 이제 무서울 게 없었다.
백야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지한아, 잘 자.”
“응. 너도.”
술을 마신 건 저인데 오히려 백야가 들떠 보였다.
백야는 이불을 턱 아래까지 덮어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하루 종일 울고 코피를 쏟으며 골골거리더니 금방 잠이 든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한은 생각했다.
‘미친 것 같진 않은데….’
무조건 믿어 주겠다고 했으나 솔직히 게임 속이라며 퀘스트를 운운하는 말은 믿기 힘들었다.
거기다 필승의 행동도 탐탁지 않았다. 분명 백야의 인기를 이용하려고 곁에 붙어 맞장구나 치는 사기꾼이 틀림없었다.
지한은 저 순진한 친구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됐다.
아마 민성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일 이야기해 보자.’
작게 한숨을 쉰 지한이 고개를 돌리려던 때였다.
스륵-
백야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아래로 꺼지며 부피감이 줄어들었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워있던 백야가 갑자기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