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3화
* * *
백야가 향할 곳은 뻔했다.
필승이 있을 겜박스.
택시에서 내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백야를 불러 세웠다.
“한백야!”
뒤따라 온 택시에서 내린 유연이 달려오고 있었다.
“넌 왜 왔어?!”
“너 같으면 안 따라오겠냐?”
유연은 급하게 나오는 와중에도 모자를 챙겨 와 백야의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얼굴 팔릴 일 있어? 이번에도 사진 찍히면 우리 남경이 형한테 진짜 죽어.”
“넌 돌아가.”
“싫어. 너랑 같이 갈 거야.”
유연은 완강했다.
백야는 당장 필승을 만나야겠다는 생각뿐이라 그가 따라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여긴 왜 왔는데. 설마 그 가짜 사촌 만나러?”
가짜라는 말에 백야가 흠칫거렸다.
“…알고 있었어?”
“그럼 진짜 믿을 거라 생각했냐? 애초에 생긴 게 다르잖아.”
한숨을 쉰 유연은 백야를 잠시 노려봤다.
그따위 성의 없는 변명을 해 놓고 저희가 믿을 거라 생각했다는 게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근데 갑자기 그 사람은 왜. 혹시 지한이 형이랑 관련 있어?”
콘서트 마지막 날, 대기실에서 지한과 몰래 나누던 대화를 들은 유연이었다.
대충 둘러대긴 했지만, 그때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는지 백야가 넌지시 물었다.
“혹시 나랑 지한이가 대기실에서 하던 대화 기억해?”
“무슨 대화.”
“네가 청이 놀라게 해 준다고 담요 뒤집어쓰고 숨어 있었잖아.”
“그랬나? 와… 나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 하나도 기억 안 나. 이게 필름 끊긴 건가?”
두 잔 마셨으면서….
민성과 마찬가지로 유연도 게임과 관련된 부분만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개발자님도 날 기억 못 하는 건….’
덜컥 겁이 난 백야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야, 괜찮아? 너 지금 안색이 너무 안 좋아. 그냥 돌아가자. 가서 전화로 해.”
“아니야, 괜찮아. 얼굴 보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래.”
유연은 마음 같아선 백야를 들쳐 업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요 조그마한 놈은 고집이 대단했다.
지금 억지로 데려간다면 몰래 빠져나와 또 이곳으로 올 거라는 걸 잘 알았다.
“그래. 가자, 가.”
혼자 돌아다니게 두는 것보단 같이 다니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주머니를 더듬던 백야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 게 아닌가.
“없어….”
“뭐가.”
“핸드폰을 안 가지고 나왔어….”
얘 뭐지?
침대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뛰쳐나왔으면서 그런 게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난 네가 신발 신고 나온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대체 택시비는 어떻게 냈냐?”
“그냥 태워 주셨어.”
백야는 가끔 보면 이상하게 운이 좋았다.
‘온 우주가 돕는 한백야, 뭐 그런 건가.’
유연이 심각한 얼굴로 백야를 바라봤다.
“됐다. 내 거 써. 회사에 전화해서 연결해 달라고 하면 해 주겠지. 그런데 그 사람 이름이랑 부서는 아냐?”
“알아.”
백야가 유연의 옆에 달라붙으며 그가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름이 뭐라고?”
“김필승.”
유연은 겸사겸사 사기꾼의 신상을 확보했다.
그러던 그때.
두 사람의 뒤로 어두운 그림자가 짙어졌다.
비척거리며 다가온 인영은 흡사 좀비 같은 몰골을 하고 있어,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 겜박스 고객 센터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상담사와 전화 연결이 됐을 때였다.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백야의 어깨를 짚었다.
“끄악!”
“아 씨, 깜짝이야.”
백야의 비명에 덩달아 놀란 유연이 핸드폰을 놓치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필승이 좀비처럼 서 있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제가 잘못 본 줄 알았어요.”
필승이 유연의 핸드폰을 주워 돌려주었다.
“오늘도 회사에서 뭐 찍으시나?”
찍겠냐고요.
필승의 다 죽어 가는 비주얼에 놀란 유연은 꺼림칙해 하며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아니요. 얘가 그쪽을 만나야 한다고 해서 온 거예요.”
“저요?”
“개발자님. 개발자님은 저 기억하시죠? 그렇죠?”
백야는 굉장히 초조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직감한 필승은 일단 자리를 옮기자며 두 사람을 이끌었다.
워낙 눈에 띄는 외모들이신지라 벌써부터 저희 쪽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제 차로 가요. 그렇지 않아도 퇴근하는 중이었거든요.”
지금 저 상태로 운전을 한다고?
유연은 저 차를 정말 타도 되는 건가, 심히 걱정됐다.
* * *
“무슨 일인데요?”
세 사람은 인적이 드문 공원으로 이동했다.
홀로 차에서 내린 유연은 공원의 운동 기구를 타며 차 안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무슨 대단한 비밀 이야기길래.’
입꼬리를 삐죽이며 질투하던 유연은 핸드폰을 꺼내 청에게 연락을 남겼다.
[유연 : 야, 백도 나랑 같이 있으니까 찾지 마]
아니나 다를까 금방 전화가 걸려왔다.
“왜.”
- 어디야? 나도 가!
“넌 그냥 거기 있어. 지한이 형 아직도 이상해?”
- 지한 Crazy! 미쳤어.
소식을 들은 남경이 달려와 지한을 병원에 데려가네 마네, 씨름이 한창이라고 했다.
- 계속 데이즈가 다섯 명이라고 하길래 내가 앨범도 보여 주고 뮤직비디오도 보여 주니까 충격받았어.
“그 형 진짜 미친 건가?”
- I don’t know. 그리고 자꾸 우리 망도리래. 망도리가 모냐.
“망도리? 그게 뭔데.”
- 몰라. 지한 무서워. 진짜 미친 거면 어떡해? 우리 컴백도 못 하나?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아무튼 백도는 내가 데리고 들어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 으응….
어쩐지 시무룩한 목소리에 전화를 끊으려던 유연이 멈칫했다.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숙소 분위기 안 좋으면 부모님 계신 데 가 있든가.”
- No. 그냥 나 거기 가면 안 돼? 햄스터 누구 만나러 갔는데? 제우스? 큰 햄스터?
유연은 여전히 대화 중인 백야와 필승을 바라봤다.
“있어. 사기꾼. 끊는다.”
- What? 사기꾼!?
유연은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 시각, 차 안.
사기꾼과 단둘이 남은 백야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제 이름은?”
“한백야.”
“직업은요?”
“아이돌. 이건 왜 물어봐요?”
백야는 필승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검증하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죠?”
“제 차 안이죠.”
“아니요. 그거 말고요.”
필승은 백야를 미친놈 보듯 바라봤다.
“백야 씨 이상한 거 알죠?”
“알아요. 그래도 제 눈을 똑바로 봐주세요.”
백야가 필승의 양 뺨을 잡으며 제 눈을 보게 만들었다.
“저랑 제일 처음 만난 곳은?”
“찜질방.”
“그때 했던 이야기 기억하세요?”
사전 질문은 이것을 물어보기 위한 빌드 업에 불과했다.
필승이 눈살을 찌푸리자 백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거요?”
다행히 필승은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감격에 겨운 백야가 눈시울을 붉히자 필승은 당황했다.
바깥에서 차 안만 주시하고 있던 유연도 기구에서 내려오다 멈칫하며 걸음을 세웠다.
“다행이다.”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을 훔친 백야는 조금 안도했다.
그리고 아침에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었다.
지한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비밀을 공유했던 멤버들은 게임과 관련된 이야기만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백야 씨를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고요?”
“네. 저랑 관련 없는 일이라기엔 다른 멤버들도 그렇고, 마음대로 업데이트가 됐다 그래서요.”
업데이트를 하고 나면 항상 안 좋은 일이 따르곤 했다.
“그리고 제가 지한이한테 이야기를 제일 많이 했거든요.”
하루아침에 기억 상실에 걸릴 이유도 없을뿐더러, 분명 오류 개선 업데이트와 관련 있는 게 분명했다.
지한과 민성에게 들켰을 때 에러창이 처음 떴으니까.
“그리고 처음 보는 알림도 있어요.”
게임과 관련된 이야기를 언급할 때마다 뜨는 경고성 문구가 생각났다.
“운영 정책을 위반하는 대화 시도라고 했어요. 적발되면 제재될 수 있다고.”
“금지어 설정 같네요. 웬만하면 멤버분들 앞에서는 언급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런 건 대부분 페널티가 있거든요.”
“네. 그럴게요.”
이미 두 번이나 카운트돼 아슬아슬한 수치였지만 조심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저를 찾아온 건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는 거죠?”
“그런 것도 있고…. 혹시 개발자님도 절 잊어버렸을까 봐 무서워서 확인하려고….”
필승이 피식 웃으며 백야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잘 왔어요. 그런데 제가 직접적으로 도와드리려면 데이터가 필요해요. 사실 이런 식으로는 큰 도움 못 드려요.”
“어떤 거요?”
똑똑-
그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길어지는 이야기에 기다리다 지친 유연이 다가온 소리였다.
“나도 들으면 안 돼? 지한이 형이랑 관련 있는 이야기 아니야?”
백야가 곤란해하자 필승이 대신 나서 주었다.
“집안 이야기라서 곤란한데요.”
“그쪽 사촌 형 아닌 거 다 아는데요.”
같잖은 연기는 그만두라는 경고였다.
경계하는 반응이 마냥 귀여운지 필승이 실소를 터뜨렸다. 반면 이를 비웃음으로 느낀 유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 죄송. 백야 씨 안 잡아먹으니까 그만 노려보고 타요.”
아직 대화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유연을 태우는 필승에 백야가 눈을 크게 떴다.
유연도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따라온 게 아니던가.
백야가 억울해하며 유연을 바라봤지만 그는 일부러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아니, 아직 안 끝났는데….”
“백야 씨.”
안절부절못하는 백야를 향해 필승은 슬쩍 윙크를 하며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그리곤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백야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대요.”
“숙소에 있잖아.”
“지금 쓰는 거 말고 옛날 핸드폰이요. 거기에 아주 중요한 게 들어 있어서 꼭 찾아야 하는데, 위치 추적 같은 거로 찾을 수 없냐고 물어보던데요?”
생각했던 대화와 동떨어진 주제에 유연이 의심의 눈빛을 보냈다.
“진짜야?”
“으응….”
아마도?
조금 전까진 백야도 몰랐지만, 필승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찾으라는 소리 같았다.
“위치 추적은 힘들지만,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소가 있을 거 아니에요.”
“학교요…?”
“그럼 거기부터 찾아보면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