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2화
“뽑기권을 받은 것 같았는데, 없어졌어.”
백야는 알림 내역을 뒤져 보기로 했다. 그러다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업데이트 오류부터 오류 보상까지 모든 내역이 존재하지만, 딱 하나. 조명 이벤트 완료 내역만 사라져 있었다.
설마.
백야는 필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런데 한 가지 아셔야 할 게 있어요. 서버를 업데이트 전으로 돌리면 퀘스트도 리셋 될 수 있어요.’
그리고 깨달았다.
조명 이벤트가 리셋 됐음을.
“아악!”
백야가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당황한 지한이 백야를 말리며 왜 그러느냐 물었지만, 개복치는 아쉬움에 몸부림칠 뿐이었다.
“왜 그래? 뭐가 잘못됐어?”
뭐가 문제냐며 물어봐도 백야는 머리카락만 쥐어뜯었다.
‘발작인가?’
지한이 돌아온 날, 두 사람은 방 안 화장실에서 한참 동안 비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한은 자신이 꿈속에서 본 것들을 말해 주었고, 백야는 며칠 동안의 지한이 다른 세계의 지한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부 기억나는 건 아니었기에 지한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단편적이었다.
특히 마지막에 중요한 사람의 얼굴을 본 것 같은데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지한의 이야기가 끝나자, 백야 역시 자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 주었다.
주로 시스템, 퀘스트와 관련된 것들이었는데, 개중 특히 강조한 것은 자신의 건강이었다.
제가 코피를 쏟거나 갑자기 쓰러진다면 그건 무조건 시스템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딱히 피를 흘리진 않지만, 평소와는 다른 행동에 지한은 백야가 발작을 일으킨 거라고 결론지었다.
“한백야, 진정해.”
결론을 내리자마자 어린아이를 제압하듯 백야의 양손을 붙들었다.
그 순간 비상계단 문이 열리며 청과 멤버들이 나타났다.
“…둘이 뭐 해?”
“동작 그만. 둘 다 떨어져.”
민성이 일단 둘을 떼어놓고 보려 했으나, 마치 악당에게 붙잡힌 것 같은 자세에 집사의 비명이 먼저 울렸다.
“아아악! 햄스터 찌그러진다!”
청이 지한에게 달려들며 홱 밀치자, 지한은 종잇장처럼 날아가 율무의 품에 안착했다.
“어멋.”
* * *
- 야화 선공개랑 뮤비 티저 갭 차이 뭐야??? 얘네 잘못 공개한 거 아니야?
└ ㄹㅇ 다른 곡 아님?
- 와 미쳤다;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 데이즈 야화 섬네일 장발 미남 누구야? (장발 지한 캡처.jpg)
- 야화 미쳤다...........
- 뮤비가 아니라 영화를 찍어놨는데?
- 뮤비랑 콘서트 선공개가 같은 곡이라고??? 어떻게 그게 가능함?
- 작사/작곡 : 대환 > ㅁㅊ 씹간지
- 대환 다른 팀한텐 곡 안 주기로 유명하지 않음? 웬일이래
└ 복숭아 처돌이라 백야 때문에 줬다는 게 학계 정설
└ 애초에 백야 주려고 쓴 곡일지도
- 에임 대환 유앱 켜면 10번 중에 8번은 백야 이야기해서 팬들 사이에서 백친놈 된 지 오래ㅋㅋㅋㅋ
- 동양 힙합? 오히려 좋아
- ID에서 데이즈 계속 청량만 시키니까 대환이 지 보고 싶은 거 곡 써서 넘겼을 가능성 99.9%
- 대버지 감사합니다ㅜㅜ
- 백야한테 얼굴 가리개 씌우신 분 어디 계시죠? 절 받으세요 (가리개 벗는 백야 움짤.gif)
└ 이거 완전 미녀 자객
- 도대체 얼마나 띵곡인 건지 가늠도 안 되니까 빨리 공개해
<야화>의 뮤직비디오 티저가 공개되자마자 SNS가 떠들썩했다.
콘서트에서 선공개한 무대는 2절 변주 부분의 하이라이트 구간.
뮤직비디오 티저에서 공개된 MR은 전혀 다른 멜로디로, 상반된 분위기의 묵직한 비트였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개의 곡은 놀랍게도 하나의 곡이었다.
티저만으로도 이렇게 의견이 갈리는데, 아마 풀 버전을 듣고 나면 SNS와 커뮤니티는 더 뜨겁게 달아오를 것 같았다.
“당백아~ 나잉이가 티저 보고 너 미녀 자객 같대.”
오늘 자정, 뮤직비디오 티저가 공개됐다.
컴백을 앞두고 은행 광고 지면 촬영을 위해 모인 멤버들은 잠시 쉬는 시간을 갖는 중이었다.
“민성. 자객이 모냐?”
“밤에 몰래 남의 집에 들어가서 사람 죽이는 도둑.”
“Oh my god!”
동심을 파괴하는 설명에 청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경악했다.
청의 이마에 ‘나잉이 나빠!’라고 적혀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두면 둘 사이에 큰 오해가 생길 것 같았던 유연은 팬들을 위해 설명충을 자처했다.
“쟤가 진짜 자객이라는 말이 아니라, 사극 같은데 보면….”
그러나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린 청은 웃고 있었다.
“그거 엄청 좋은 거잖아!”
청이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본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됐다. 네 마음대로 해라.”
한편 티저 영상이 마음에 드는지 몇 번이나 돌려 보던 지한은 가만히 백야를 바라봤다. 원래도 괜찮은 외모였는데, 최근 들어 부쩍 물이 오른 게 보였다.
“왜?”
시선을 느낀 백야가 옆을 돌아보자, 지한이 시니컬한 투로 답했다.
“그냥. 예뻐서.”
그 순간 대기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멤버들의 머리와 옷을 만져 주던 스타일리스트들도, 남경과 이야기를 나누던 촬영 관계자도, 오렌지 주스를 마시던 덕진까지.
지한을 아는 모두가 경악에 찬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공기의 흐름이 달라진 걸 혼자만 느끼지 못했는지, 지한은 여전히 백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왜, 왜 그래, 지한아. 하하….”
당황한 백야가 지한의 뺨을 가볍게 밀며 얼굴을 돌려 버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찬바람이 쌩쌩 불었는데, 한 번 아프고 나더니 이제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처럼 백야를 싸고돌기 시작했다.
“그냥. 신기해서.”
“신기할 게 뭐가 있어….”
백야가 당황하며 지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사인이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눈치가 없었다.
“아니야. 확실히 귀여워졌어. 효과가 좋은 것 같아.”
지한의 충격 발언에 백야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같이 스킬 뽑기를 하는 게 아니었어.’
어젯밤, 두 사람은 지난번에 못다 한 뽑기를 진행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을 꼭 잠그고 비밀리에 진행된 거사는 꽤 성공적이었다.
“애들 다 자?”
“응.”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화장실로 가자.”
긴 꿈에서 깨어난 뒤, 지한은 백야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기억은 없지만, 자신이 잠깐 제정신이 아니었던 동안 백야에게 쌓은 업보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너는 우리 팀이 아니다’라는 망언부터 시작해, 과장을 조금 더 보태 투명 인간 취급을 했다니.
민성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청이 저만 보면 게슴츠레한 눈으로 쏘아보는 게 이해가 됐다.
“미안해.”
“뭐가?”
“상처 준 거.”
“괜찮아. 진심 아니었잖아. 그리고 나 네가 무슨 말 했는지 하나도 기억 안 나.”
그러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제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 백야가 서럽게 울었던 모습이 마음 쓰였다.
“그래도.”
“진짜 괜찮다니까. 나는 네가 내 비밀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응. 죽는 한이 있어도 안 잊어버릴게.”
“아니, 그렇게까진 안 해 줘도….”
“아니야.”
지한은 뚜껑이 닫힌 변기 위로 백야를 앉히곤 자신은 바닥에 앉았다.
“그래서 뭘 도와주면 돼?”
“뽑기!”
이제부터 스킬 뽑기를 할 건데, 네가 봤을 때 제일 좋아 보이는 걸 골라 달라는 요청이었다.
“열심히 해 볼게.”
지한은 또 다른 자신이 쌓아 놓은 업보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조력자의 든든한 응원 속에서 백야는 <스킬 (S)>뽑기권 2장을 한꺼번에 사용했다.
뚜둥!
첫 번째 스킬은 확신의 외모 스킬이었다.
<귀여워서 미안해(S)>
: 잘생긴 것보다 귀여운 게 최고! 귀여움 한도 초과로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 있다.
현재 백야가 장착 중인 스킬은 <얼굴 천재(A)>.
천재 아이돌이라면 S급 외모가 필요하긴 했지만,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 있다니 너무 극단적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했어? 뭐 나왔어?”
지한과 눈이 마주치자, 백야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두 번째 스킬을 확인하자마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얼굴이 화끈거렸기 때문이다.
<꼬츠 미남(S)>
: 꼬츠 미남.
‘이것도 외모 관련인 건가? 그렇지. 거기도 외모라면 외모…. 아악! 미쳤어, 미쳤어!’
챱, 챱!
백야가 자신의 뺨을 두드리며 정신을 바로잡았다.
이게 다 청이 때문이었다.
“뭔데? 나도 같이 고민해 줄게.”
게다가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다며 눈빛을 보내오는 고양이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백야는 손바닥을 얼굴에 파묻은 채 작게 웅얼거렸다.
“기여어서 미으느.”
“어?”
귀여워서 미안하다고?
잠시 당황한 것 같던 지한은 눈알을 몇 번 굴리더니, 이내 백야의 귀여움을 순순히 인정해 주었다.
“응. 너 귀여워.”
그리곤 얼른 알려 달라며 다시금 백야를 재촉했다.
“아니이!”
“응?”
“‘귀여워서 미안해’가 스킬 이름이라고.”
“아…….”
그래도 스킬 명이 구리다던 거 치곤 나름 양호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구나. 또 다른 건?”
“다, 다른 거?”
“응. 두 개라고 했잖아.”
이렇게나 집요한 놈이었다니!
백야는 지한에게 같이 골라 달라고 한 걸 후회했다. 그래서 별것 아니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그건 그냥 이상한 거 같아. 신경 안 써도 돼.”
“아니야. 그래도 비교해 보고 너한테 더 도움이 될 만한 걸 골라야지.”
백야는 이걸 꽃미남이라고 속여서 말해야 할지, 보이는 그대로 읽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꼬츠 미남(S)>
: 꼬츠 미남.
힐끔 본 것만으로도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많이 이상한 거야?”
입술을 달싹이며 몇 번이나 망설이던 백야는 이내 결심한 듯 눈을 감으며 소리쳤다.
“꼬츠 미남!”
“꼬ㅊ….”
단어를 인지한 순간, 지한의 얼굴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고양이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처, 첫 번째 거로 해. 그게 좋겠다. 그럼 그… 나는 먼저 자러 갈게.”
당장 화장실을 벗어나려던 지한은 밖으로 나가기 직전, 잠시 머뭇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꼭 귀여워서 미안한 거로….”
“알겠다고!”
민망함은 늘 백야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