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7화
* * *
컴백하는 주의 스케줄은 그야말로 살인적이었다.
목요일 새벽부터 일요일 음악방송이 끝나기 전까진 방송국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민성, 유연, 백야는 음악방송 MC 스케줄까지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멤버들보다 두 배로 바쁠 예정이었다.
[DAY 1]
“I'm back!”
케이블 방송국을 찾은 청이 대기실 문을 열며 호기롭게 외쳤다.
이제는 어엿한 선배 가수가 된 데이즈는 무난하게 대기실을 배정받았다.
“청아, 옷 갈아입고 와.”
커플링 곡인 <연서>의 무대 의상으로 갈아입은 백야가 청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너 체력 좀 아껴.”
“I'm Okay! But 햄스터는 아껴.”
데이즈는 백야 한정으로 내로남불이 심한 편이었다.
“너 진짜 후회한다.”
“No! 난 피곤함을 느끼지 않지!”
“아닐 거 같은데….”
청은 백야에게 간식 가방을 안겨 주곤 의상을 갈아입으러 떠났다.
숙소를 나서기 전, 뭘 그렇게 챙기나 했는데 각종 비타민과 과자, 백야가 즐겨 먹는 말린 과일들이었다.
이때 메이크업을 받고 온 율무가 옆자리에 앉으며 반건조 복숭아를 집어 들었다.
“당백이 이런 거 먹어도 돼?”
왜냐고 물어볼 뻔했으나 백야는 가까스로 참아 냈다.
“응. 나는 피도 눈물도 없어서 다 먹어.”
“까비~ 안 걸려드네.”
친구를 먹어도 되는 거냐며 장난을 치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백야는 쉽게 걸려들지 않았다.
아쉽지만 빠르게 포기한 율무는 봉지를 뜯어 한 조각을 백야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뇸.
마트 시식 코너에서 식사 훈련을 한 보람이 있는지, 백야는 의심 없이 간식을 받아먹었다.
“옳지~ 너 잘 먹어야 이렇게 안 되는 거야. 네 친구들을 봐. 영양소가 부족해서 이렇게 삐쩍 말라 버렸잖아.”
“응. 너도 입조심해. 친구들처럼 가루가 돼 버릴 수 있으니까.”
“오~ 센데?”
이제는 협박이 담긴 반격까지 하다니.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겠다며 율무가 뿌듯해했다.
그때 두 사람의 곁으로 남경이 다가왔다.
“너희는 준비 다 했어?”
“네엥~”
“그럼 너희 먼저 찍어.”
그는 핸드폰을 내밀며 엔카운트 다운 공식 계정에 올릴 셀카가 필요하다고 했다.
“같이 찍을래?”
“응.”
백야가 유일하게 율무에게 순종적으로 구는 순간이었다.
춤, 노래, 연기 실력까지 모두 갖춘 그였지만 셀카 기술만큼은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붙어.”
율무의 옆으로 찰싹 붙은 백야는 머리 위로 곰돌이 귀를 만들며 팬들이 좋아할 만한 포즈를 취했다.
찰칵-
단 한 번의 셔터로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 낸 율무는 어깨를 으쓱이며 의기양양해했다.
“봤지?”
“뭐…. 좀 찍네.”
“이번에는 다른 포즈 하자. <연서> 의상이니까 하트 할까?”
율무가 반쪽짜리 하트를 만들자 백야가 남은 반쪽을 채워 주었다.
다 찍고 나서야 포즈가 매우 소름 끼친단 사실을 깨달았지만, 율무는 괜찮다며 다음 멤버에게 핸드폰을 넘겨주었다.
“데이즈 녹화 들어갈게요.”
잠시 후 첫 번째 사녹을 마친 데이즈는 대기실로 돌아와 두 번째 녹화를 준비했다.
무대 의상부터 메이크업까지 모두 다시 준비하고 나자 어느덧 오전 6시가 되었다.
밤을 꼬박 새운 멤버들은 야식인지 아침인지 모를 식사를 시작했다.
“피자! 피자!”
피자 앞으로 달려가 두 조각을 겹쳐 드는 청과 달리, 유연은 반숙란을 집어 들었다.
“한 조각이라도 먹지.”
“됐어. 소화 안 될 것 같아.”
민성이 작은 조각을 권했으나 유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이 무거우면 무대를 할 때 동작이 더뎌지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고 한다.
그렇게 <야화>의 사전 녹화까지 마치자 오전 11시가 되었다.
생방송까지 남은 시간은 5시간 남짓. 그러나 쉬는 시간 따윈 사치였다.
다른 그룹들이 녹화를 따고 리허설을 하는 동안, 데이즈는 옆 방송국에서 보이는 라디오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랩 파트는 주로 지한 씨랑 청 씨가 하는 거로 알고 있는데, 이번 앨범에서는 보컬 멤버들도 다 같이 랩에 도전했다고 들었습니다. 대표로 한 분께서 조금만 들려 주실 수 있을까요?”
DJ의 요청에 멤버들의 시선이 동시에 민성을 향했다.
“왜 저를 보시는…. 제가 하는 거예요?”
“당근 하지!”
예상치 못한 질문이나 곤란한 상황이 닥칠 때면 멤버들은 항상 민성을 바라보곤 했다.
“ID 랩통령~”
율무가 엄지 척을 하며 팀킬인지 칭찬인지 모를 응원을 해 주었다.
라이브 방송에서는 본인이 랩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며 한껏 자랑하더니, 막상 판을 깔아 주자 민성은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네~ 그럼 마지막으로 데이즈의 <야화> 들으면서 마치겠습니다. 올해도 멋진 활동 부탁드리고요, 응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디오 스케줄을 마친 데이즈는 다시 방송국으로 돌아와 생방송에 참여했다.
1위 발표를 마치고 내려오자 곧장 다음 스케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요일 음악방송인 뮤직 스테이는 여의도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김밥 먹어.”
지한이 검은 봉지 안에서 은박에 싸인 저녁을 꺼내 주었다.
“난 튜나!”
“다 참치야.”
배가 많이 고팠는지 허겁지겁 김밥을 해치운 청은 잠시 후 고개를 꾸벅이며 졸기 시작했다.
“편하게 자.”
민성이 목 베개를 끼워 주며 고개를 뒤로 젖혀 주었다.
일요일 스케줄이 끝나기 전까진 따로 휴식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이동 시간이나 대기 시간을 이용해 쪽잠을 자 둬야 했다.
[DAY 2]
오전 6시.
두 번째 <야화> 의상으로 갈아입은 데이즈는 다시 팬들을 마주했다.
“지한이 형 장발 멋있지 않아요? 저도 길러 볼까요?”
제일 먼저 무대 위로 올라온 유연이 나잉이들을 희망 고문하고 있었다.
“백도가 저 머리 긴 거 잘 어울린다 그랬거든요. 근데 걔는 그냥 제 얼굴을 좋아하는 거 같기도 해요.”
그때 무대 위로 올라오던 백야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왜 저래?’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서 있자 유연이 보조개를 지으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맞잖아. 네가 우리 팀에서 내가 제일 잘생겼다며.”
“다 잘 생겼어.”
“다? 내가 1등이라 그랬잖아.”
“몰라.”
백야가 모른 척하며 자리를 피하자 유연이 졸졸 뒤를 따라왔다.
“하루만 얼굴 바꿔 보고 싶은 멤버 고를 때 나 뽑았잖아.”
“기억 안 나.”
“그럼 지금 뽑아. 1등 누구야?”
“무슨 1등?”
“얼굴. 네 취향인 사람.”
답정너야, 뭐야.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귀찮게 해 주겠다는 심보가 눈에 가득했다.
잠시 고민하던 백야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팬 석을 돌아보며 배시시 웃었다.
“1등?”
“어.”
“나는 나잉이.”
<갓끼(S)> 스킬의 발동에 스튜디오가 발칵 뒤집혔다.
“데이즈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멤버들이 무대 위로 올라오자 금방 녹화가 시작됐다.
민성이 MC로 활약 중인 덕에 뮤직 스테이에서도 신경을 많이 써 주었다.
리허설과 두 번의 녹화까지는 금색 자수가 놓인 검은색 무관복을. 세 번째 녹화부터는 흰색 의상으로 갈아입은 뒤, 팬들을 내보낸 후 추가 촬영을 진행했다.
중간의 의상 교체는 변주 부분의 극대화를 위함이었다.
“민성이 형, 가?”
“응. 다녀올게.”
“이따 봐~”
대기실로 돌아온 멤버들은 쓰러지듯 소파에 기대어 몸을 뉘었다.
MC 리허설이 남아 있는 민성만 의상을 갈아입은 뒤 다시 대기실을 떠나야만 했다.
[DAY 3]
끼잉.
소파에 눌어붙은 찹쌀떡 옆으로 지한이 다가가 무릎을 굽혔다.
하찮은 뒷모습의 주인공은 피로에 전 백야였다.
“한백야. 괜찮아?”
3일 차가 되자 멤버들의 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팀에서 최약체를 맡고 있는 백야의 상태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백야의 반대편 자리에는 늘 그렇듯 청이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려동물에게 블랙리스트 1순위가 접근하는 데도 미동도 없는 걸 보면 그도 의식 불명 상태인 듯했다.
“당연하지…. 끄떡없어….”
“아닌 것 같은데.”
토요일 음악방송은 백야가 MC로 활약하는 날이었다.
또 한 번의 사전 녹화와 MC 리허설을 마치고 온 그는 아니라곤 하지만 이미 체력이 방전된 상태였다.
백야의 이마에 손을 올려 보던 그는 주위를 살핀 뒤 작게 귓속말했다.
“김필승 씨가 조명은 신경 쓰지 말라고 전해 달래.”
조명?!
민감한 단어에 백야가 귀를 쫑긋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어 있던 눈동자가 생기로 반짝거렸다.
“너 리허설 하는 동안 연락 왔었어. 네가 전화를 안 받아서 무슨 일 있는 줄 알았대.”
“아니라고 해 주지!”
“응.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
물론 지한이 말하는 것처럼 둘 사이의 대화가 담백하게 오간 것은 아니었다.
유연이 그랬듯 백야를 두고 약간의 기 싸움이 오갔으나, 눈새가 알 방법은 없었다.
“또 무슨 이야기했는데?”
“나머지는 숙소 가서….”
“아니야! 나 어차피 챌린지 찍으려고 온 거야. 단아 누나도 천천히 와도 된다 그랬으니까 지금 말해 줘.”
자신의 틱탁 촬영 순서를 기다리던 백야는 지한의 팔을 잡아당겨 대기실 구석으로 이끌었다.
“빨리, 빨리.”
“별 얘기 없었는데. 그냥 무슨 모임에 끼워 주긴 하겠는데 나는 제일 말단이라 그러던데?”
이 세계의 비밀을 파헤치는 비밀단체의 보스는 백야, 언더 보스는 필승이었다.
그리고 백야의 부탁으로 새롭게 추가된 지한까지.
“그리고 나 때문에 조명 퀘스트가 리셋됐다던데. 미안. 엄청 어려운 퀘스트였다고 들었는데.”
“아니야.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백야가 허공에 손을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더불어 필승은 이제 지한도 시스템의 영향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해 주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까지 전했다간 걱정 많은 개복치가 밤잠을 설칠 게 뻔해 보여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런데 퀘스트를 아예 없앨 수는 없어서 조명 대신 다른 거로 대체했대.”
“다른 거?”
그 말인즉 위에서 뭐가 떨어지긴 한다는 뜻이었다.
흥이 식어 버린 백야는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