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8화
“글쎄. 맞아도 되는 거라고만 하던데.”
지한도 자세히 모르는 것 같았다.
‘대체 퀘스트에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맞아도 되는 것’에 대한 정체를 알기 전까진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을 것 같았다.
필승에게 전화를 해 볼까 고민하는데, 마침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율무 다 찍었나 본데.”
“그럼 내 차례야. 가야겠다.”
백야가 대기실 문을 향해 쪼르르 달려가자 지한이 뒤를 따랐다.
“같이 가.”
“넌 다 찍은 거 아니야?”
“구경하게. 찍고 바로 가?”
“응. 단아 누나가 민성이 형이랑 둘이서만 찍는 거면 안 찍는다 그래서. 나도 같이 찍기로 했어.”
“이건 누구랑 찍는 건데?”
“청이. 청이가 나랑 같이하고 싶대.”
두 사람의 대화가 점점 멀어졌다.
이내 목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됐을 때쯤, 소파가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텅 빈 대기실.
시트와 같은 색상의 담요가 바닥으로 흘러내리며 납작 엎드려 있던 유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딱 걸렸어.”
[DAY 4]
마지막 날이 되자 제정신인 멤버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메이크업을 받으며 헤드뱅잉을 하는 건 기본이었고, 밥을 먹으면서도 틈만 나면 잠들기 일쑤였다.
“어어…! 율무 님 그거 물 아니에요!”
율무가 화병을 입에 가져가자 덕진이 팔을 붙잡았다.
“하핫! 실수, 실수~”
율무마저 아슬아슬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생태 피라미드의 최하위 군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백야의 창백한 얼굴을 관찰하던 남경이 덕진에게 물었다.
“얘 숨 쉬는 거 맞겠지?”
“네. 제가 아까 확인해 봤어요.”
“그런데 얼핏 보면 조금 문제 있어 보이지 않냐? 우리야 매일 보는 모습이라지만….”
곧 있으면 후배들이 인사하겠다고 몰려올 텐데 오해를 사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데이즈도 이제 겨우 2년을 넘겼을 뿐인데 벌써 후배 가수의 인사를 받는 위치가 되었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음……. 그럼 뭐라도 적어 놓을까요?”
똑똑-
잠시 후, 남경의 예상대로 신인 그룹이 데이즈의 대기실을 찾았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드리러 왔싸아아악!”
“아니에요! 살아 있어요!”
덕진이 황급히 손을 저으며 후배들을 진정시켰다.
유일하게 깨어 있던 율무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을 반겨 주었다.
“잠시만 기다려 줄래요? 애들이 자고 있어서. 키티야, 일어나~ 유연이도~”
“우웅….”
잠에 취한 병아리는 일어나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반려동물을 찾는 듯했다.
그러나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몽롱한 얼굴은 소파 위의 시체를 발견하곤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Shit!”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배에 붙은 커다란 종이가 그의 체면을 살려 주었다.
[살아 있음! 숨 쉬는 중!]
“죽은 줄 알….”
가슴을 짚으며 안도하던 청은 후배 그룹의 한 멤버와 눈을 마주치곤 멋쩍은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 선배님.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그냥 깨우지 않으셔도….”
“No! 그거는 예의가 아니에요! 햄스터 빨리 일어나.”
청이 백야의 어깨를 흔들자 유약한 몸이 꼬물거리며 웅크렸다.
“으응….”
“오! 봤어요? 방금 진짜 햄스터 같았는데.”
청이 깨알 자랑을 하며 다시 백야를 재촉했다.
“햄스터. 제사, 아니 인사하고 다시 자.”
제사요…?
후배들의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그러나 눈앞의 병약 미소년은 당장 제사를 받아도 어색하지 않을 비주얼을 자랑하고 있었다.
‘저분이 그 유명한 백야. 과연…!’
피부가 하얗다 못해 창백했다.
눈길만 스쳐도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이 저렇게 창백해도 되는 건가.
잠에서 깬 백야는 저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후배와 눈이 마주쳤다.
“괘, 괜찮으신…?”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
어째서인지 스트레스 지수를 0으로 낮췄음에도 안색이 나아지질 않았다.
그야… 컨디션이 좋을수록 패시브의 효과가 극대화되는 법인데, 백야가 가진 게 하필 <병약미(S)>라 역효과가 나는 것뿐이었다.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도 잘 부탁드립니다~”
후배 그룹과 훈훈한 인사를 주고받은 데이즈는 생방송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다시 분주해졌다.
무대 의상으로 갈아입은 뒤 라이브 무대까지 마치고 내려오자 금방 1위 발표 순간이 다가왔다.
오늘의 MC는 유연.
인기 뮤직의 MC 뒤로 데이즈가 서 있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네, 그럼 이번 주 1위는 누구일지 지금 바로 확인해 볼까요?”
점수가 빠르게 올라갔다.
생방송 모니터를 보며 청과 손장난을 치는데, 마침 백야의 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이벤트 : 조명 주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네 글자에 순간 온몸이 굳어 버렸다.
“백야?”
갑자기 멈춘 손장난에 청이 허리를 굽히며 백야의 안색을 살폈다.
그 순간.
파앙!
“축하드립니다~!”
MC의 밝은 목소리와 함께 꽃가루가 터졌다.
“아악! 햄스터!”
그러나 기계 오류인지 꽃가루는 백야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폭포처럼.
와르르.
“푸핫!”
“푸하하하!”
꽃가루 대참사에 율무와 민성은 배를 잡으며 웃어댔고, 지한은 놀란 얼굴로 머리에 쌓인 종이 조각을 털어 주었다.
“햄스터 뱉어! 먹는 거 아니야!”
“나도 알아!”
청이 호들갑을 떨며 강제로 입을 벌리려 들자, 백야가 몸부림을 치며 머리를 세게 털었다.
“한백야, 날리잖아. 좀 가만히 있어.”
조명과 비교하면 한없이 가벼운 물체였지만 과연 이게 최선이었을까?
이번 주 1위를 차지한 가수보다도 더 주목을 받게 돼 면목이 없는 데다가 집중된 이목이 너무 부끄러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네, 소감, 푸흡. 소감 부탁드립니다.”
힐끔 뒤를 돌아본 MC들도 백야의 상태를 보곤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겨우 엔딩 멘트를 한 유연은 마이크가 꺼지자 폭소하며 백야를 놀려 댔다.
“네가 1위 했냐? 웃겨 죽겠네.”
해당 모습은 곧장 화제가 돼 SNS를 뜨겁게 달궜다.
- 오늘 자 인기 뮤직 꽃가루 대참사 (동영상)
└ 이거 맞아..? 이게 맞는 거냐고ㅋㅋㅋㅋ 1위 한 분들이 백야한테 박수 쳐주심
└ 백야 인뮤 피디한테 잘못한 거 있대? 이 정도면 테런데ㅋㅋㅋㅋ
└ 본방보다 깜짝 놀람ㅋㅋㅋㅋㅋㅋㅋ
└ 갑자기 사람이 사라짐ㅋㅋㅋ 어떻게 저기서만 폭포처럼 떨어지지? 애기 몰카라 해도 믿겠다
- 입에도 들어갔었어? 가족사 현실판ㅋㅋㅋㅋ (꽃가루 뱉는 백야 움짤.gif)
무대를 내려온 백야는 걷는 걸음마다 꽃가루를 뿌리고 다녀 헨젤과 그레텔이냐는 놀림을 당했다.
“당백이는 빵 조각 대신 꽃가루야?”
“조용히 해라.”
백야가 율무의 옆구리를 찌르며 대기실 앞 복도에 기대어 섰다.
앞섶을 펄럭일 때마다 옷 안에서 꽃가루가 떨어져 민폐가 아닐 수 없었다.
[<이벤트 : 조명> 완료!]
[이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스킬 (R)>이 지급됩니다.]
그러나 퀘스트 완료 알림을 받자마자 꽁한 마음이 사르르 녹아들었다.
‘대박! 나 살았다!’
옆에서 꽃가루로 백야의 귀를 간질거리던 율무는, 자신을 버려두고 지한에게 떼구루루 굴러가 버리는 복숭아에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지한아, 지한아!”
한술 더 떠, 백야가 다가오자 살짝 고개를 기울여 귀를 대 주는 모습에 헛웃음까지 나왔다.
“하! 참 나!”
역시 룸메이트가 답인가.
율무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동안, 백야는 지한에게 퀘스트를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혹시 아까 그거?”
“응! 우리 저녁에 또 뽑기 하자! 일단 숙소 가서 좀 자고.”
“그래.”
길고 길었던 지옥의 컴백 주가 드디어 끝이 났다.
* * *
‘보아라! 내 아이돌의 미모를!’
퇴근길 지하철에서 백야의 4K 얼빡직캠을 보고 있던 뱁쌔는 몇몇 머글들의 시선을 느끼곤 우쭐해졌다.
이미 봤던 것 중에서도 의상이 제일 예뻤던 영상을 골라 두 번째 재생을 하려는데, 마침 뱁쌔의 흥미를 유발하는 영상이 나타났다.
[데이즈 야화(野花) 뮤비 해석, 카드는 모두 공개됐다!]
세계관 처돌이인 그녀는 뮤직비디오가 올라온 후, 밤을 꼬박 새워 각종 해석들을 섭렵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상황.
뱁쌔는 홀린 듯 섬네일을 눌렀다.
[쭈쭈 : 안녕하세요. 쭈쭈입니다. 오늘은 코리아 하이틴에 이어 한국의 미를 제대로 보여 준 데이즈의 <야화> 뮤직비디오 해석을 들고 왔습니다.]
그동안 동양풍 콘셉트를 한 아이돌은 많았지만, 한국의 미를 이렇게까지 파격적으로 해석한 팀은 처음이라고 했다.
[쭈쭈 : 이번 컴백은 음원 공개와 동시에 각종 자체 기록들을 갈아 치우며, 하이틴의 뒤를 이을 역대급 흥행을 기대하게 만드는데요.]
국악이 가미된 음악.
전혀 다른 장르를 믹스해서 만든 독특한 콘셉트.
곡선의 미를 살린 안무에 한복과 흰 천을 활용한 코스튬까지.
뻔할 법한 콘셉트를 이렇게 해석할 줄은 몰랐다며, 역시 ID는 배운 변태들의 집합소라는 칭찬이 이어졌다.
[쭈쭈 : 그럼 뮤비 해석, 지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화면이 바뀌며 뮤직비디오의 도입부가 보였다.
[쭈쭈 : 먼저 뮤직비디오 초반 부분은 꽤 무겁습니다. 음악의 베이스 사운드로 거문고를 사용했거든요.]
[쭈쭈 : 시작부터 거문고를 연주하는 청이 등장합니다. 예로부터 거문고는 양반 가문 출신의 사대부들이 애용하는 악기였죠.]
풍류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악기가 거문고였다며 악기에 대한 설명이 짧게 이어졌다.
[쭈쭈 : 아시겠지만 데이즈는 트럼프 카드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중 먼저 공개된 카드는 하트(♥)인 율무인데요.]
[쭈쭈 : 양반과 귀족의 상징적인 악기를 청이 연주하고 있음을 미루어 볼 때, 청은 스페이드(♠) 카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