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1화
* * *
충남 아산시.
촬영 장소에 도착한 백야는 다시 물복숭아 상태로 돌아왔다. 덕진과 민성이 휴게소에서 노력한 결과였다.
“백야 님, 비타민 챙겨 드시는 거 잊지 말고 밥도 꼭꼭 씹어 드셔야 해요. 혹시 몰라서 제가 캐리어 앞에 비상약 챙겨 뒀으니까 필요하면 드시고요.”
“네, 그럴게요. 형도 운전 조심히 하셔야 해요.”
작별 인사를 10분째 나누고 있는 모습에 민성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 여기서 살 거야? 서울 안 갈 거니?”
두 사람은 고작 하루 떨어져 있을 뿐인데 영원히 못 볼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그래도 걱정되잖아요. 제가 내일 일찍 데리러 올게요.”
“네. 내일 봬요, 형.”
최애가 웃으며 건넨 진짜 진짜 마지막 최종 인사에 덕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문 연다?”
“응.”
프로그램 특성상 차에서 내리는 동시에 촬영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차 문이 열리자 소동물 두 마리가 시멘트 바닥 위로 폴짝 뛰어내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허리를 꾸벅이며 폴더 인사를 한 두 사람은 스태프의 차로 갈아타며 마이크를 착용했다.
“배고프진 않으세요? 가자마자 일하셔야 할지도 모르는데.”
마이크를 착용하는 사이 PD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네! 괜찮아요. 민성이 형이 휴게소에서 맛있는 거 사 줬어요.”
“다행이네요. 두 분 다 시골은 처음 와 보시죠?”
백야가 고개를 끄덕이는 반면, 민성은 익숙하다고 대답했다.
“저는 할머니 집이 시골이라 자주 가 봤어요.”
“할머님 댁이 어디신데요?”
“김천이요.”
“김천이요? 저희 지난달에 김천 다녀왔는데.”
“김천 편 봤어요. 그때 샤인 머스캣 주신 할머니가 저희 할머니 친구분이세요.”
“네?!”
PD는 진심으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반가워했다.
“잠깐만. 샤인 머스캣이요? 그럼 어르신이 말씀하신 유명한 토끼 가수가 민성 씨였어요?”
“네. 저예요.”
“저희는 말하는 토끼가 있다고 하셔서 진짜 토끼인 줄 알았거든요.”
그 말에 민성은 제가 어렸을 때 귀가 매우 커서 귀로 날 수도 있을 정도였다고 답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작아졌는데. 하핫.”
“토끼가 민성 씨였구나~ 저희 샤인 머스캣 진짜 많이 먹었거든요. 끼니때마다 가져다주셔서….”
“저희 숙소에도 여름만 되면 쌓아 놓고 먹어요.”
“와~ 대박이다, 진짜. 그럼 시골 분위기가 익숙하시겠어요.”
“그런 편이에요.”
PD가 오늘 활약을 기대해 봐도 되겠냐 하자 민성은 걱정 마시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잠시 후 숙소에 도착한 두 사람.
민성과 백야가 차에서 내리자 마당에 모여 있던 출연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누구야?”
“아이돌 같은데? 나 눈이 침침해.”
“너 나이 들어서 그래. 루테인 먹으라니까?”
50대 대표 남배우로 손꼽히는 기현과 상욱이 담벼락 너머를 주시했다.
“게스트 왔어요?”
그때 늦잠을 잔 막내가 비척거리며 등장했다.
“일어났어?”
“네. 누구예요?”
상욱의 곁으로 다가간 남성은 에임의 대환이었다.
<촌캉스>는 에임이 공백기에 들어간 뒤, 그가 유일하게 출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어…?”
“왜. 왜. 누군데?”
같은 소속사지만 전달받은 게 없었던 대환은 게스트를 발견하곤 조금 놀란 눈치였다.
“혀엉~”
백야도 멀리서 대환을 발견한 듯 방방 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한백야? 야, 뛰지 마.”
백야가 달려오자 대환은 잠이 싹 달아난 듯 굴러오는 복숭아를 받기 위해 슬리퍼 투혼을 펼쳤다.
“혀엉!”
“야. 네가 여기 왜 와?”
<촌캉스>를 찾는 대부분의 연예인이 홍보 목적으로 온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얼떨떨한 나머지 멍청한 질문을 내뱉었다.
“저희 컴백했어요.”
“아, 맞다. 컴백했지?”
“형. 저도 있는데….”
슬그머니 다가온 민성이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자 대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편 데이즈를 처음 본 두 배우는 대환의 반응을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나 얘 이렇게 정신없는 거 처음 봐.”
“나도. 대환이 달리기가 이렇게 빠른 줄 처음 알았잖아.”
게스트가 오기 전까진 막내였던 대환은 형들의 놀림을 당했다.
“제가 아끼는 동생들이라 그래요. 여기는 데이즈 민성이랑 백야예요. 저희 회사 막내.”
이어지는 소개에 민성과 백야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당연히 알지~ 작년에 대상 받았잖아. 나 우리 딸 때문에 생방송으로 봤거든.”
“나도 TV에서 많이 봤어. 이쪽은 시트콤 찍고 계시잖아.”
두 사람은 직접적인 친분은 없었어도 오늘의 게스트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때 <촌캉스>의 마스코트인 강아지 한 마리가 백야의 발치로 다가갔다.
“뭐야? 너무 귀여워…. 어떡해. 너무 예쁘다.”
작은 솜뭉치는 백야의 신발을 베개 삼아 포옥 엎드렸다.
“새끼에요? 너무 작은데?”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힌 백야가 조심스레 강아지를 안아 들자 솜뭉치가 귀엽게 짖어 댔다.
앙!
“얘는 이름이 뭐예요?”
“백야.”
강아지의 이름을 물었는데 대환이 자신을 부르자 백야가 고개를 들었다.
“네?”
“백야라고.”
대환이 장난을 친다고 생각한 백야는 얼굴을 찡그리며 기현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의 대답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 둘이 이름이 같네? 생긴 것도 닮은 것 같고. 이름 내가 안 지었다? 대환이가 지었어.”
기현이 대환을 고자질했다.
상욱은 백야가 기분 나빠 하진 않을까 우려하는 얼굴로 이름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나도 처음에는 반대했는데, 얘가 그 이름에만 반응을 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렇게 민성과 투 백야의 1박 2일 <촌캉스>가 시작됐다.
* * *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백야와 민성은 대환과 함께 텃밭으로 향했다.
“민성아, 먹고 싶은 거 없어? 숙소에서는 식단 해야 하잖아.”
“샐러드 빼고 다 좋아요.”
“그럼 햄버거 만들어 줄까? 생감자튀김 만들어 줄게.”
“감자튀김도 만들 줄 아세요?”
“그냥 튀기면 돼. 쉬워.”
엉덩이에 작업 방석을 하나씩 낀 밀짚모자 군단이 오솔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갔다.
어느새 도착한 텃밭.
선두에 선 대환이 동생들에게 주의 사항을 일러 주었다.
“내가 시범 보여 줄 테니까 잘 보고 따라 하면 돼.”
“재밌겠다. 나 이런 거 처음 해 봐. 형은 해 봤어?”
호미를 든 백야가 들뜬 얼굴로 민성을 바라봤다.
“고구마 캐 본 적은 있는데. 비슷하지 않을까?”
“민성이 경력직이야? 그럼 너는 쟤보다 두 배로 캐라.”
“한번 해 볼게요.”
두 사람의 대화가 재밌는지 백야가 까르르 웃어 댔다.
“그런데 방송 보니까 감자로 물물 교환도 하고 그러던데. 오늘도 해요?”
“해야지. 감자만 먹을 수는 없으니까.”
“나는 감자만 먹어도 좋은데?”
저희는 아무거나 줘도 잘 먹는다며 백야가 대환의 부담을 덜어 주려 했다.
“내가 질렸어. 그리고 이게 그냥 감자가 아니라 돈이야. 흠집 나면 돈 못 받으니까 그렇게 알고.”
가끔 동네 주민들이 반찬 같은 걸 가져다주시곤 했지만 사악한 제작진들은 그냥 넘겨주는 법이 없었다.
감자나 노동으로 그에 상응하는 값을 치러야만 물건을 넘겨주었다.
“오늘은 여기 한 줄만 파도 될 것 같은데. 나와 봐.”
이제는 프로 농사꾼으로 거듭난 대환이 감자 줄기를 뽑고 비닐을 걷어 냈다.
“그냥 파면 됐던 거 같은데.”
그사이 자리를 잡은 민성이 호미를 뉘여 살살 흙을 파내자 감자알이 쏟아졌다.
“우와! 감자 엄청 많아!”
“너 좀 하는데?”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어. 잘하네. 백야는 놀아도 되겠다.”
“아니야. 나도 도와야 금방 끝나지.”
토끼의 호미질을 넋 놓고 구경하던 개복치는 반대편 골로 달려갔다.
민성을 따라 작업 방석에 쪼그려 앉은 백야는 비장한 얼굴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이렇게 슉 해 가지고 샥!’
훈련을 마친 개복치가 감자 사냥에 나섰다.
하찮게 휘두른 호미가 흙을 파헤치자 흙이 무너지며 자잘한 돌멩이가 솎아졌다.
“감자튀김~ 감자튀김~”
감자튀김을 흥얼거리며 두 번째 호미질을 선보였다.
콕-
그 순간 호미 끝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무언가에 깊게 박힌 느낌.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듯한 기분에 개복치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백야 잘하고 있어?”
민성의 옆에서 고급 스킬을 전수하던 대환이 큰 소리로 물었다.
깜짝 놀란 백야가 파헤친 흙을 다시 끌어모으며 호미를 통째로 파묻었다.
“으, 응! 잘하고 있어!”
“호미로 감자 안 찍게 조심해서 해. 금방 갈게.”
“으응…!”
대환이 고개를 돌리자 백야는 다시금 흙을 파헤쳐 호미를 건져 냈다.
아니나 다를까… 날붙이에 커다란 감자알이 콕 박혀 있었다.
첫 사냥에서 월척을 건졌지만, 상품에 하자가 생겨 내보일 수 없게 된 상황.
‘숨기자.’
대환의 예민한 성격을 잘 아는 개복치는 이 사실을 은폐하기로 했다.
급한 대로 감자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백야는 대환이 다가오자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좀 캤어?”
“이, 이제 하려고.”
“시범 보여 줄게. 호미 이리 줘 봐.”
“아니야. 그냥 형이 흙 파 주면 내가 골라낼게. 그게 나을 것 같아.”
백야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나게 휘두르던 호미를 순순히 넘겨주었다.
“왜? 하고 싶어 했잖아.”
“아니야. 힘들 것 같아.”
어쩐지 벌써 지쳐 보이는 모습에 대환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다행히 두 사람의 합은 좋았다.
대환이 흙을 퍼내면 목장갑을 낀 솜 주먹이 감자를 쏙쏙 골라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