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2화
잠시 후 바구니에 감자를 한가득 담은 세 사람이 숙소로 복귀했다.
“고생했어.”
“이리 와서 식혜 한 그릇씩 마셔요.”
상욱이 살얼음이 동동 떠 있는 식혜를 내왔다.
아산에 처음 올라온 날, 시장에서 산 양은 밥상 위로 밥그릇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얘들아 이리로 와. 거기는 선풍기 바람이 안 가.”
기현이 선풍기를 틀며 게스트들을 챙겨 주었다.
열감에 얼굴이 달아오른 백야는 손등으로 볼을 꾹꾹 누르며 평상으로 향했다.
“괜찮아?”
“힘들면 조금 누워.”
백야의 체력이 약한 건 소속사 식구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민성은 같은 그룹의 멤버였고, 대환은 백야를 업고 응급실까지 달려간 적이 있지 않던가.
두 사람은 가장 목이 좋은 자리를 백야에게 양보해 주었다.
“에고고.”
힘이 들긴 했는지 얌전히 가운데 앉은 백야는 식혜를 원샷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에 온 지 두 시간이 지나서야 숙소를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다.
“백야야.”
“응?”
착-
캐리어에서 지퍼백을 꺼내 온 민성은 백야의 이마 위로 파랗고 네모난 스티커를 붙여 주었다.
반동에 잠시 고개가 뒤로 기우뚱거렸지만 금방 중심을 잡으며 원래대로 돌아왔다.
“붙이고 있어.”
살결에 닿자마자 이마가 시원해지는 게 쿨 패치였다.
흡사 육아 현장을 보는 듯한 모습에 기현과 상욱, 대환이 두 사람을 신기한 얼굴로 바라봤다.
“민성이가 제일 형이지? 리더?”
“네.”
“어쩐지~ 동생을 잘 챙기네.”
기현의 칭찬에 민성이 아니라며 부끄러워했다.
“백야가 더위를 많이 타서요. 지금이 중요한 시기라.”
이제 막 컴백 활동을 시작했는데 백야가 아프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백야 잘 먹네. 맛있어? 더 줄까?”
개복치의 먹방을 지켜보던 상욱은 식혜가 담긴 병을 가져와 한 잔 더 부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맛있어요.”
“많으니까 다 먹고 가요. 그런데 실물이 더 귀엽게 생겼네.”
상욱은 좀처럼 백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귀여워서 미안해>의 또 다른 피해자가 탄생한 것이다.
요 며칠 지켜본 결과, 새로운 스킬은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영향을 많이 받고 부작용도 심하게 나타나는 듯했다.
당연히 최대 피해자는 룸메이트인 지한이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스타카토 웃음을 흘리던 백야는 조용히 식혜 그릇에 코를 박았다.
‘이 망할 스킬을 하루빨리 바꿔야 하는데.’
백야가 속으로 구시렁거리는 동안 기현이 상욱에게 말을 걸었다.
“형 딸도 아이돌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무슨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오는 친구였던 것 같은데.”
“아~ 그건 한 달 전. 지금은 또 바뀌었어. 백야가 좋대.”
“그래?”
“좋아하던 애가 순위에 못 들어서 데뷔를 못 했대.”
상욱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딸의 메신저 프로필을 보여 주었다.
볼 하트를 한 백야의 사진 옆으로 ‘마지막 사랑’이라는 상태 명이 눈에 띄었다.
“취향이 한결같네.”
저번에 좋아하던 친구도 귀여운 외모이지 않았냐고 묻자, 상욱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원래 우리 같이 이목구비가 진한 애들이 하얗고 순하게 생긴 얼굴을 좋아하거든.”
상욱은 딸이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더니 낯짝 가림이 더 심해졌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백야가 몇 살이지?”
“저요?”
“왜. 사위라도 삼게?”
“아유~ 큰일 날 소리를. 백야가 아까워서 안 돼.”
가볍게 농담한 상욱은 백야를 보며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백야가 동생인가 싶어서.”
“누구보다요?”
“저기 백야.”
상욱이 수돗가에 물 받아 둔 바가지 안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는 강아지 백야를 가리켰다.
“쟤가 작아도 나이가 꽤 많거든.”
“몇 살인데요?”
“한 3달 됐나?”
“…….”
개복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과연 S급 스킬.
위력이 대단했다.
“저는 21년 살았는데….”
“강아지 나이는 또 다르니까. 강아지가 3달이면 다 큰 거 아니야?”
그 말에 민성이 키득거리며 끼어들었다.
“백야는 아직 애긴데.”
민성이 강아지를 가리키며 ‘쟤가 너보다 더 형’이라고 하자 백야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치를 주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귀엽다는 듯 지켜보던 대환은 적당한 타이밍에 백야를 구해 주었다.
“그런데 오전에 읍내 나간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 맞다. 같이 갈래?”
드디어 상욱의 관심에서 벗어난 백야는 재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화장실을 핑계로 감자를 숨기러 가기 위함이었다.
“콜록, 콜록. 읍내요?”
흥미로운 주제에 민성이 되물었다.
“응. 장 보러. 근데 얘 아까부터 계속 기침하네. 감기야?”
“그런가 봐요. 감사합니다.”
기현이 물을 챙겨 주자 민성이 공손하게 받아 들었다.
“민성이 읍내 가 볼래?”
“네. 저도 가고 싶어요.”
“그럼 그냥 다 같이 가자. 백야도 데려가고.”
그러나 상욱이 기현의 말을 반대하며 나섰다.
“아니야. 그럼 점심은 언제 먹으려고. 애들 배고플 텐데.”
“휴게소에서 뭐 먹고 왔대.”
“대환이는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그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먹어야지.”
상욱은 제가 남아서 점심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 동생들을 데리고 다녀오라며 역할을 바꿔 주었다.
“그럼 그냥 저도 남아서 상욱이 형 도울게요. 민성이랑 백야 좀 챙겨 주세요.”
“그래, 그럼. 바로 가자. 그런데 백야 어디 갔냐?”
기현이 차 키를 챙기며 민성에게 물었다.
<촌캉스> 멤버들이 백야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민성이 허공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안 돼!”
이해하기 힘든 행동에 세 사람이 민성을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안 돼! 백야, 이리 와!”
“너 뭐 하냐?”
대환이 웬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얼굴로 보자, 민성이 머쓱해 하며 대답했다.
“아…. 어디서 사고 치고 있을까 봐요. 눈에 안 보이면 불안해서.”
쿠당탕-
“끄앙!”
그때 창고 쪽에서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작은 백야가 뽈뽈거리며 걸어 나왔다.
뒤이어 주위를 살피며 슬그머니 나오는 큰 백야까지.
커다래진 눈에 잔뜩 긴장한 모습은 누가 봐도 숨기는 게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 * *
그 시각 서울.
유연은 언젠가 메모지에 적어 두었던 필승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이게 그 변태 번호라고?”
“어. 내가 봤을 때 이 사람 백퍼 사기꾼이야.”
백야가 숙소를 비울 날만 기다렸다던 유연은 망설임 없이 번호를 찍었다.
그러나 필승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민성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전화도 무참히 씹히고 있었다.
‘어쭈. 이놈 봐라?’
필승이 제 전화를 피한다고 생각한 유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 일어나. 옷 챙겨.”
“어디 가는데? 우리 연습은?”
“지금 연습이 문제야? 이놈 잡아야 돼. 오늘 아니면 기회 없어.”
민성이 자리를 비운 때를 틈타, 이번에는 다른 녀석들이 사고를 치려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혼자 남겨진 외로운 병아리 한 마리.
덩그러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연습실에 있었는데 지금 거울에 비치는 건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모냐.”
지한은 구양과 화보 스케줄을 촬영하러 갔으니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나머지 둘은?
잠시 카페에 다녀온 사이 청은 미아가 돼 버렸다.
‘모지?’
병아리가 눈썹을 삐죽 세웠다.
가뜩이나 햄스터도 없어서 외로운데, 형이라는 놈들이 자기만 버리고 어디 멋진 곳에 간 게 틀림없었다.
‘남경한테 다 말해!’
개인 연습 시간이라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를 줄 알았나 본데, 가만히 있을 청이 아니었다.
잔뜩 뿔이 난 병아리가 연습실 문을 향해 뽀짝 뽀짝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문고리를 돌리기 직전, 문 앞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금방 돌아옴!
☆비밀로 해 주면 백도 레어 사진 증정☆]
역시.
저만 버리고 튄 게 맞았다.
‘그리고 그 정도는 나도 있거든?’
콧방귀를 뀐 청은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맞은편 벽에 또 다른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율무와 유연은 청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당백이 어머님께 받은 ☆갓 수확한 복숭아 사진☆ 다수 보유]
‘갓 수확한 복숭아?’
백야의 미공개 어린 시절 사진을 갖고 있다고?
율무 주제에 무슨 수로?
청은 짙은 패배감에 움켜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쳇.”
그리곤 뒤돌아서 다시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절대 백야의 미공개 사진이 궁금해서 그런 건 아니고, 이 일이 알려지면 다 같이 혼나야 하니까. 그게 싫어서 이번 한 번만 봐주는 것뿐이었다.
* * *
한편 청을 따돌린 율무는 이동하는 내내 마음이 쓰였다.
“그냥 같이 데리고 나올 걸 그랬나? 지한이도 없어서 혼자 있을 텐데.”
“형. 이런 말은 좀 너무할 수도 있는데 걔는 너무 튀어.”
외모가 화려한 건 물론이고, 행동도 리액션도 요란스러운 데다, 무엇보다 백야의 일이라면 이성을 잃고 달려든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걔가 이 사기꾼의 존재를 알면 어떻게 나오겠어?”
“난리 나겠지.”
“그래서 두고 온 거야.”
완전 범죄를 위해서는 청을 두고 오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사이 필승의 회사에 도착한 유연은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긴 통화음 끝에 드디어 전화가 연결됐다.
“안녕하세요. 저 데이즈 유연인데요, 지금 회사 앞이거든요? 잠시 시간 좀 내주시죠.”
상대는 당황한 듯 대답이 없었다. 역시 무언가 켕기는 게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당사자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유연? 그때 눈알 빠져라 노려보던 꼬맹이?’
가만히 있어도 인기 최고 아이돌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삶이란.
필승의 어깨가 조금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