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3화
[무슨 일이시죠?]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음….]
다른 세계에서는 망돌이었다더니. 백야 덕분에 최정상 자리에 올라간 녀석들답게 백야에게 목을 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건가?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생각은 했지만 예상보다 빨랐다.
그러나 MBTI J 99%의 사나이.
오늘을 위해 준비해 둔 워드 파일을 연 필승은 문서를 1부 인쇄했다.
[네. 내려갈게요. 안 보이는 곳에 계세요. 백야 씨 알면 걱정할 테니까.]
뭐, 구석에 찌그러져 있으라고?
필승이 하는 말을 꼬아 들은 유연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었다.
“뭐래? 내려온대?”
“응. 은밀하게 만나재.”
“…어?”
은밀하게?
율무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 그, 그 사람 진짜 질이 나쁘네!”
백야한테도 옷을 벗으면 원하는 걸 내어 주겠다고 종용하더니!
음란 마귀에 씌어 버린 율무가 말을 더듬으며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율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늘, 이 변태 벌레를 자신의 복숭아로부터 떼어 내겠다고 결심했다.
해충 박멸!
“형. 온다.”
“야, 눈에 힘줘.”
있는 힘껏 정색한 율무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필승을 노려봤다.
유연도 율무 못지않게 서늘한 얼굴로 바라보자, 태연히 걸어오던 필승이 멈칫하며 다가오길 망설였다.
‘좋았어. 기선 제압은 확실히 된 것 같은데.’
‘왜 두 명이지? 한 장밖에 없는데.’
필승과 유연은 각자 좋을 대로 생각했다.
“자주 뵙네요. 혼자 오신 줄 알았는데.”
“저도 용건이 있어서요.”
율무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세요. 그런데 웬만하면 안경은 계속 쓰고 계시면 좋겠는데.”
이목을 끌고 싶지 않다던 필승은 두 사람을 자신이 아는 곳으로 이끌었다.
사람이라곤 노년의 사장님 한 분밖에 없는 허름한 다방.
율무는 자신들을 좁고 으슥한 골목으로 데려가길래 여차하면 싸울 생각까지 했었지만,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가 사람도 없고 좋아요. 가끔 일하러 오거든요.”
필승은 두 사람 앞으로 메뉴판을 내밀며 음료를 추천해 줬다.
“여기는 쌍화차가 맛있는데.”
“됐고요. 백야,”
“아. 잠깐만.”
율무의 말을 끊은 필승은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서약서
본인 스스로 원해 내린 결정이며, 이후 발생하는 모든 사고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이 지겠습니다.]
“일단 여기 서명부터.”
유연과 율무가 이게 뭐냐는 얼굴로 필승을 바라봤다.
“그쪽이 죽어도 나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동의서요.”
불쾌한 내용에 유연과 율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게 왜 필요한데요? 써도 그쪽이 써야 할 것 같은데.”
율무가 적대감을 드러내자 필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까무잡잡한 애는 체격도 다부진 게 맞으면 아플 것 같았다.
“백야 씨에 대해서 물어보러 온 거 아니에요? 그거 대답해 드린다고요.”
말투가 아니꼬웠지만 나름 협조적인 태도에 두 사람도 조금은 진정했다. 하지만 서약서는 여전히 기분이 나빴다.
“저희 장난하는 거 아닌데요.”
“저도 장난하는 거 아닌데.”
필승은 친히 펜 뚜껑을 뽑아 주며 말을 이었다.
“한지한 씨 기억 잃은 적 있죠? 쓰러진 적도 있고.”
필승이 ID 관계자들 중에서도 소수만 아는 비밀을 알고 있자 두 사람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걔가 그런 것도 말해요?”
“비밀이 없는 사이라.”
둘 사이가 생각보다 깊은 것 같자 율무는 조심스러워졌다.
그러나 친구가 잘못된 길로 빠지는 걸 원치 않았던 그는 이번 딱 한 번만 오지랖을 부리기로 했다.
“됐고요, 우연히 통화하는 걸 들었습니다. 듣기 민망한 요구를 하시던데.”
“무슨?”
필승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백야를 도와줬으면 도와줬지, ‘민망한’이라고 칭할 만한 요구를 한 적은 절대 없었다.
반면 그가 시치미를 떼는 것으로 오해한 율무는 그의 죄목을 대놓고 밝히기로 했다.
“애한테 벗은 몸 보여 달라고 시켰잖아요, 그쪽이!”
“푸웁.”
“푸흡!”
그 순간 유연과 필승이 머금고 있던 음료를 뿜어냈다.
코끝에서 퍼지는 구수한 한약 냄새에 기분이 불쾌해졌다.
그러나 이는 필승도 마찬가지였다.
“미쳤어요!?”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로 두 사람을 놀리던 필승이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 * *
그 시각 아무것도 모르는 개복치는 민성, 기현과 함께 읍내로 향하는 중이었다.
매주 화요일은 옆 동네 광장에서 커다란 장이 열리는 날이라고 했다.
“아까 창고에서 뭐 했어?”
“화장실인 줄 알고 잘못 들어갔다니까….”
“너 거짓말 진짜 못 하는 거 알지?”
“도착했어요? 우와~ 나 시장 처음 와 봐.”
민성의 질문을 회피한 백야가 냅다 차 문을 열었다. 문을 열기 무섭게 고소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수상한데.”
“안 수상해. 그런데 엄청 좋은 냄새 난다, 그치.”
먼저 차에서 내린 백야가 들뜬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작게 혀를 찬 민성은 추궁을 멈추기로 한 듯, 군말 없이 뒤를 따라 내렸다.
“뻥튀기 냄새 같은데.”
“뻥튀기?”
그 순간 시장 초입에서 ‘뻥이요!’라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큰 소리가 울렸다.
뻥!
깜짝 놀란 개복치가 제자리에서 통 튀어 오르자 기현과 민성이 웃으며 백야를 놀려 댔다.
“잘 놀라는구나? 민성이는 안 놀라네.”
“저는 많이 봤거든요. 할머니 따라서 많이 다녀 봤어요.”
먹음직스러운 먹거리는 물론, 신발과 의류, 각종 채소와 식재료를 살 수 있는 염치읍 최고의 핫플레이스였다.
“일단 우리가 사야 할 게 빵이랑 다진 소고기, 두부, 치즈. 대환이가 햄버거 만들어 준다더라.”
기현이 메모지를 읽으며 사야 할 목록을 알려 주었다.
“여기 고기는 안 팔 것 같은데.”
천막이 즐비한 시장 입구를 바라보며 백야가 중얼거렸다.
“바로 옆에 마트도 있어. 여기에 없는 건 거기 가서 사면 돼. 들어가 보자.”
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과일 천막이 보였다.
[복숭아 만 원]
“어? 너 만 원이래.”
민성이 복숭아 바구니를 가리키자 백야가 쪼르르 달려가 상자 옆으로 쪼그려 앉았다.
“사 갈래?”
꽃받침을 한 백야가 민성을 올려다보자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깜찍한 모습에 따라 웃던 기현이 백야를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사장님. 저건 얼마예요?”
“아이고~ 깜찍해라. 복숭아 딴딴한 건 만 원, 물렁물렁한 건 오천 원. 여기는 예쁘게 생겼으니까 이만 오천 원 하면 되겠네.”
우리 가게에서 제일 비싼 가격표라며 사장님이 종이 판넬을 내밀었다.
“가, 감사합니다.”
얼떨결에 받아버린 백야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할짝댔다.
“푸하하! 넌 오천 원 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물복이잖아.”
민성이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어 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기현은 수박 한 통을 구매하며 돈 봉투를 꺼냈다.
오늘 아침에 대환과 민성, 백야가 감자를 캐고 정산받은 금액이었다.
“귀엽게도 생겼네~ 복숭아 놀이는 끝났어요?”
“네에…. 죄송합니다.”
사장님이 저의 드립을 받아 주실 줄은 몰랐는지,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진 백야가 민성의 뒤로 숨었다.
“그거는 주고 가야지.”
“앗. 죄송합니다.”
백야가 들고 있던 종이 판넬을 돌려드렸다.
“계속 우리 가게에 있어도 되는데. 장사 잘되겠어.”
“저는 이미 팔렸어요.”
백야가 민성의 팔을 꼭 붙잡자 사장님이 아쉽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예정에 없던 수박을 산 기현은 이렇게 된 거, 돌아가서 화채를 만들어 먹자며 장보기 목록에 과일 캔을 추가했다.
“너희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 돈 많아.”
민성의 신들린 호미질 덕분에 아침에 정산받은 금액이 생각보다 많았다.
“백야야, 저기도 과일 가게 있다. 저기는 취직 안 해?”
“민성이 형이 저 사 줬어요.”
숙소에 돌아가서 이만 오천 원을 받기로 했다며 백야가 뻔뻔하게 받아쳤다.
그렇게 농담을 나누며 목록에 있는 물건을 하나씩 구매한 장보기 팀.
눈에 띄는 외모에 카메라와 스태프를 대동한 채 움직이자 이목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채소 가게에서는 당근을 서비스로 받았고, 두부를 구매하면서는 도토리묵을 서비스로 받았다.
“나 <촌캉스> 찍으면서 서비스 이렇게 많이 받아 본 건 처음이다.”
기현이 은근히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의 대표작은 사극이었는데, 민성에게 다가간 그는 사극의 안 좋은 점이 뭔 줄 아냐며 대뜸 질문했다.
“천만 배우면 뭐하냐고. 사극 제왕이면 뭐해. 분장 지우면 아무도 못 알아보는데.”
그는 이제 막 연기를 시작한 백야에게 사극은 절대 하지 말라며 농담을 건넸다.
“왜요? 저는 선배님 너무 멋있는데. 저도 수염이 잘 어울렸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선배님처럼 카리스마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말에 기현이 아닌 척 부끄러워했다.
“어릴 때부터 사회생활 한 애들은 이렇게 말하는 기술이 좋다니까. 야, 뭐 먹고 싶냐. 다 골라.”
“그럼 전 아이스크림이요!”
“아이스크림? 마트 가자.
어차피 가야 할 마트였지만 백야 덕분에 조금 더 빠르게 장소를 이동하게 됐다.
마트에 도착한 민성은 재빠르게 달려가 카트를 뽑아 왔다.
“탈래?”
민성의 농담에 백야가 올라타는 시늉을 하자 기현이 콧방귀를 뀌었다.
“너네 이러고 노냐?”
“애들 다 모이면 더 유치하게 놀아요.”
민성이 민망해하는 백야를 챙기며 대신 대답했다.
“뭐 하고 노는데?”
“음~ 젠가요.”
“양호하네.”
순간 백야의 눈이 커질 뻔했으나, 자체 심의인지 영어 단어가 생략돼서 다행이었다.
“내가 장 보고 있을 테니까, 너희는 가서 먹고 싶은 거 가져와. 햄버거 빵도 가져오고.”
자연스레 카트를 차지한 기현은 백야와 민성의 분량을 따로 챙겨 주었다.
잠시 후, 생각보다 지체된 장보기에 서둘러 숙소로 복귀한 세 사람.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리자 마당에서 감자를 깎던 대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담벼락 너머를 기웃거렸다.
“혀엉~!”
대환을 발견한 백야가 머리카락을 팔랑거리며 수박을 안고 달려왔다.
“너무 늦게 오는 거 아니야?”
“미안. 신기한 게 너무 많아서 내가 막 돌아다녔어.”
백야는 대신 자신이 맛있는 화채를 만들어 주겠다며 평상 위로 수박을 내려놓았다.
이어서 민성과 기현도 물건이 담긴 박스를 들고 등장했다.
수박 옆으로 내려놓은 박스 안에는 필요한 물건 외에도 사치품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촌캉스>에서 엄마 포지션을 맡고 있는 상욱이 형형한 눈으로 세 사람을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