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5화
* * *
늦은 점심을 해결한 백야는 간식으로 먹을 화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도마 위로 수박을 올린 뒤 신이 난 얼굴로 대환을 돌아봤다.
“형! 나 이거 손으로 쪼개는 방법 배웠는데.”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대환이 쓸데없는 짓이라며 백야를 말렸다.
그러나 멤버들의 사랑 속에서 오냐오냐 자란 개복치는 하고 싶은 건 무조건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편이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해 볼게. 응?”
또한 자신의 얼굴을 어떻게 써야 효과적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검지를 편 손을 모아 쥐며 은근히 조르자 대환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딱 한 번만이야.”
허락이 떨어지자 백야가 손날을 세워 수박의 중앙을 가늠했다.
“후…. 간다?”
잠시 후 세로로 세운 손날이 빠르게 하강했다.
“얍!”
통-
그러나 수박을 쪼개기엔 역부족이었다.
“아잇! 아깝다.”
백야가 발을 구르며 아쉬워했다.
물론 대환이 보기엔 전혀 아깝지 않았다.
재빨리 칼을 집어 든 대환은 백야가 한 번 더 시도해 보겠다며 고집을 부리기 전에 수박을 두 동강 내 버렸다.
“안 돼! 내 수박….”
“너 하는 거 기다리다간 내일 먹겠다.”
역시나 한 번 더 도전할 심산이었는지 백야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왜 그래?”
그때 수돗가에서 설거지를 돕던 민성이 다가왔다.
“형이 내 수박 잘랐어….”
“애초에 한 번만 하기로 했었잖아. 반 통만 쓸 거지? 나머진 네가 해.”
대환이 칼 대신 숟가락을 쥐여 주며 평상 위로 백야를 앉혔다.
“봐봐. 너 농땡이 부리는 사이에 민성이는 설거지 다 했잖아.”
“지금 하려고 했어….”
입을 삐죽이던 백야는 편한 자세를 잡으며 수박을 끌어안았다.
푹-
숟가락으로 듬뿍 퍼낸 과육은 커다란 볼 안에 차곡히 채웠다.
“딸기 우유!”
“여기.”
“얼음!”
“여기.”
숙소에서 몇 번 만들어 먹은 적 있던 터라, 백야가 손을 내밀면 민성이 재료를 착착 건네주었다.
민성의 서포트로 금방 완성된 수박화채.
식후 디저트 겸 간식까지 해결한 다섯 사람은 잠시 휴식 시간을 갖기로 했다.
“뭐 했다고 이렇게 힘드냐.”
“아침부터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너희도 좀 쉬어.”
기현과 상욱이 그늘진 마루에 기대어 앉았다. 형들의 배려로 평상을 차지한 ID 3인방은 높은 하늘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니까 기분이 조금 이상해요.”
민성은 서울에 있을 멤버들을 떠올리며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왜?”
“청이도 오고 싶어 했거든요. 연습실 가기 싫어했는데.”
청의 말을 전하던 민성은 ‘내가 언제 연습실에 가기 싫어했냐’며 왁왁거릴 청의 모습을 생각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백야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형은 이제 방송 나가면 큰일 났다’며 따라 웃었다.
“그래? 그럼 데려오지 그랬어.”
선풍기 바람이 동생들에게 갈 수 있도록 각도를 조절한 대환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다음에 한 번 더 초대해 주세요.”
“우리야 좋지.”
데뷔 전에는 연습생들 사이에서 무한 경쟁.
데뷔 후에는 쟁쟁한 아이돌 그룹 사이에서 쉼 없이 달려왔으니…. 민성에겐 이 순간이 멤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을 만큼 좋았던 모양이다.
제작진에게 청이를 꼭 초대해 달라고 약속을 받아 낸 민성은 얼마 못 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매앰-
맴-
매미의 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하나둘씩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고요가 내려앉은 <촌캉스> 숙소.
선풍기 바람이 닿을 때마다 처마 끝에 달아 놓은 풍경이 청아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잠시 후, 마당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더해졌다. 멤버들보다 먼저 낮잠을 청했던 작은 백야가 잠에서 깬 것이다.
수돗가에서 목을 축인 강아지는 평상으로 다가와 밖으로 삐져나온 큰 백야의 발을 앞발로 밀쳤다.
뾱-
솜방망이에 맞은 백야는 발등을 비비며 몸을 뒤척였다.
폴짝, 뾱-
그렇게 세 대쯤 맞았을 때, 뭔가가 자신을 건드린다고 느낀 백야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비비며 발아래를 내려다보자 검은콩 세 개와 눈이 마주쳤다.
뀨?
‘강아지…?’
새끼손가락보다도 짧은 꼬리가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렸다.
‘나 때린 게 쟤인가?’
잠에서 막 깨어난 백야는 나른함에 멍한 얼굴로 목덜미만 긁적였다.
“끼잉. 낑.”
그러다 자신을 안아 달라는 듯 발치를 맴도는 솜뭉치를 안아 들었다.
“배고파?”
백야는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작은 백야가 다리를 파닥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내려 줘?”
바닥에 내려 주자 하찮은 혓바닥이 백야의 발목을 할짝거렸다.
반바지를 입고 있던 탓에 그의 미끈한 각선미가 돋보였다.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발등을 꾹 밟고 간 강아지는 마당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뽈뽈뽈.
그러나 몇 발자국 가지 않고 자리에 멈춰서 뒤를 돌아봤다. 따라오라는 듯 하얀 꼬리가 살랑거리며 개복치를 유인했다.
“어디 가려고.”
슬리퍼를 꿰어 신은 백야가 뒤를 쫓자 앙증맞은 네 발이 다시 움직였다.
뽀짝 뽀짝.
작은 백야가 앞장서서 걷고 큰 백야가 뒤를 따랐다.
마당과 이어진 텃밭으로 간 작은 백야는 민들레 홀씨를 머리로 들이받으며 호기심을 보였다.
“이건 먹는 거 아니야.”
곁에 쪼그려 앉은 백야는 한 송이를 꺾어 강아지를 향해 힘껏 불었다.
후우-
힘없이 날아간 민들레 씨앗이 하얀 털에 붙어 꼴이 엉망이 되었다.
“푸하하하!”
그 모습이 웃긴지 백야가 한 송이를 더 꺾어 힘껏 불었다.
부르르-
몸을 떨며 씨앗을 털어 낸 작은 백야는 토라진 듯 백야를 버려두고 텃밭을 벗어났다.
“삐졌어? 같이 가~”
백야가 바닥을 기는 솜뭉치의 뒤를 따라 마당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곳은 여전히 꿈나라가 한창인 상태. 쪼그마한 강아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산책이나 다녀올까?’
마루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던 백야는 제작진에게 허락을 구했다.
“저 한 바퀴만 돌고 와도 돼요?”
허락이 떨어지자 백야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문을 나서자 갈림길이 나왔다.
오른쪽과 왼쪽을 고민하던 백야는 이내 회관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길을 따라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이번 앨범의 수록곡을 흥얼거리며 걷던 백야는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춰 섰다.
“어? 나 그대만을 위해 피어난~”
이번 타이틀곡이 생각난 백야는 <야화>의 후렴구를 짧게 불렀다. 그러다 금방 부끄러워진 듯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애들한테 보내 줘야겠다.”
사진을 찍을 생각인지 백야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게 없자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엥? 내 핸드폰! …두고 왔나?”
조금 전 강아지와 놀다가 바닥에 떨어뜨렸지만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한 백야는 다시 회관을 향해 걸었다.
가는 길에는 작물이 무성하게 자란 텃밭이 간간이 보였는데, 그때 깻잎 밭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예쁘기도 해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백야가 흠칫거리며 옆을 돌아봤다.
‘깻잎이 말을 했어…?’
개복치의 동공이 흔들리는 순간, 깻잎 사이를 가르며 밭일 모자를 쓴 할머님께서 등장했다.
“왜 강아지가 혼자 돌아다니누?”
강아지?
백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강아지를 찾았다.
‘작은 백야가 따라왔나!?’
놀란 백야가 바닥을 살피며 하얀 솜뭉치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깻잎 밭 사이로 들어간 듯싶었다.
“배, 강아지야~”
차마 자신의 이름을 부를 순 없었던 백야는 낮게 쪼그려 앉아 깻잎 나무의 밑동을 살폈다.
그러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할머니가 백야의 옆에서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왔어?”
“네? 네에…. 할머니, 혹시 강아지 어디서 보셨어요?”
“저기 파란 지붕에 지내지? 삐쩍 곯은 애 하나 있던데 갸보다 더 곯았어, 어째.”
할머니는 혀를 차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집에서 밥을 안 줘? 귀신이 친구 하자고 달려들것네. 어여, 이거 가져가.”
깻잎과 상추를 작은 소쿠리에 옮겨 담은 할머니는 백야의 품에 강제로 안겨 주며 뺨을 어루만졌다.
“허~연 게 옛날에 키우던 흰둥이 새끼 때랑 똑 닮았어, 어째. 누구 주지 말고 혼자 다 먹어. 알겠지?”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강아지….”
“그래. 가.”
일방적인 대화가 끝나자 할머니는 쿨하게 밭으로 복귀하셨다.
백야는 질문에 다 대답을 해 드렸는데 할머니는 하나도 대답해 주지 않아서 조금 억울한 얼굴이었다.
‘찾아야 하는데….’
강아지의 행방을 찾아야 할 의무가 있는 백야는 깻잎 밭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였다.
그러다 할머니의 혼잣말을 듣고 얼굴이 빨개졌다.
“뉘 집 강아지인지 사내자식이 예쁘기도 하네. 손녀 있었음 딱 손녀사위 삼으면 좋겠구먼.”
뒤늦게 강아지가 자신을 뜻하는 단어였음을 깨달은 백야는 도망치듯 깻잎 밭을 벗어났다.
다시금 오솔길을 걷는 백야.
붉게 물들었던 얼굴은 많이 가라앉아 원래의 색을 되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다시 평정심을 잃고 만다.
웨에에엥-
“끄앙! 어풉, 푸.”
이번에 만난 주민은 수가 상당했다.
“아악!”
정면에서 맞이한 날파리 떼에 백야가 팔을 파닥거리며 자리를 벗어나려 애썼다.
그러나 달릴수록 더 많은 날파리를 마주하는 바람에 또 다른 불청객이 등장했다.
[경고!]
[스트레스 지수가 ‘주의’ 단계입니다. 32%]
웨에에엥-
[스트레스 지수가 ‘경계’ 단계입니다. 61%]
개복치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