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8화
* * *
그 결과, 유연과 율무는 백야에게 단단히 찍혀 버리고 말았다.
유연과 대화를 나누기로 했던 것은 물론, 율무에게 사과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안 믿는 거 알았으니까. 난 지한이만 있어도 충분해.’
최고의 수혜자는 지한이었다.
토라진 백야가 지한의 옆에 딱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으니까.
“한백야. 아직 화해 안 했어?”
“응. 나 진짜 화났어.”
사전 녹화를 마치고 내려온 개복치는 그래도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했다. 팬들이 보는 앞에서는 삐진 티를 내지 않으려고 최대한 애썼다.
그러나 백야 맘들은 최애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평소 같았으면 청이만큼은 아니겠지만 엄청 치댔을 율무가 백야와 거리 두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연도 백야의 눈치를 살피며 먼저 다가가는 법이 없었다.
- 흰야 너연 싸운 듯
└ 장난치면 장난이 심하다고 난리~ 장난 안 치면 싸웠다고 난리~ 애들도 ㅈㄴ 피곤할 듯
- 사녹 후기ㅋㅋㅋㅋ 오늘은 햄친놈 아니라 햄딱지였다던데? 율무가 장난칠 틈도 없었다고
- 너연이가 백야 계속 힐끔거리기만 하고 안 다가감
└ 새벽이라 애들도 힘들겠지... 애들 좀 냅둬라
- 제발 1위ㅜㅜ 애들 지난주에 1위 못 했다고 까는 글 보이던데, 원래 컴백 주는 1위 후보 못 들어요
- 데이즈 이번 주 음방 나오면 1위 무조건 하겠던데? 음반 음원에서 그냥 넘사
사실 유연은 몇 번이나 백야에게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앙칼진 얼굴로 노려보기만 할 뿐, 금방 고개를 돌려 버리니 대화가 되지 않았다.
민성도 MC 리허설을 가고 없어서 중재해 줄 사람도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도 잡아야겠다 생각한 그는 백야 대신 지한을 공략하기로 했다.
개복치의 오른팔로 급부상한 그라면 이 답답한 상황을 해결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형. 잠깐만 이야기 좀.”
지한을 비상계단으로 데리고 나온 유연은 한숨을 쉬며 애꿎은 난간을 건드렸다.
“고민 있어?”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에 지한이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백야에게 이미 사건의 전말을 들어 모든 걸 알고 있는 그는 일단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형, 있잖아….”
“응.”
“아 씨. 아니, 진짜 오버 같긴 한데….”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헝클이려던 유연은 손끝에 닿은 왁스 감촉에 얼른 손을 내렸다. 하마터면 실장님께 크게 혼이 날 뻔했다.
“아니, 있잖아….”
“있잖아만 다섯 번 말했어.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지한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표정이 한결같아서 기분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입술을 달싹이던 유연은 이내 결심한 듯 필승의 이름을 내뱉었다.
“김필승이라고 알아?”
“응. 알아.”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유연이 움찔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 어떻게 아는데?”
“백야 일 때문에 알게 됐어.”
지한은 유연이 고민을 쉽게 털어놓을 수 있도록 일부러 백야의 이름을 언급했다.
지한도 조력자는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유연을 끌어들이고 싶었다.
“너야말로 어디까지 알아?”
“어디까지 아냐니?”
“나율무도 알아? 괜찮아. 나도 처음엔 그런 반응이었으니까.”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지한은 상당히 여유로워 보였다.
“그렇게 볼 거 없어. 미쳤다 생각해도 할 수 없고.”
“형 독심술도 해?”
유연의 당황한 모습에 지한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해야 유연이 믿어 줄까 고민하던 그는 자신이 꿈에서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쓰러졌을 때 꿈을 꿨어. 눈을 뜨니까 연습실인 거야.”
그곳에서도 저희는 데이즈였는데 백야만 없었다고 했다. 고작 한 명 빠졌을 뿐인데 저희의 위상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타이틀곡도 지금과 달랐고, 인기는 물론, 인지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에 유연이 굳은 얼굴로 답했다.
“그냥 꿈일 뿐이잖아.”
유연이 정색하자 지한이 그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꿈이 아니라고 하면?”
“…….”
“여기랑 똑같은 세계가 존재하고 그곳의 나를 너는 이미 만났다고 하면.”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씩이나 미친 건지. 아님 진짜 지한의 말이 사실인 건지 유연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평행 우주설을 지금 내가 믿어야 하는 건가?
“시X. 한백야 유니버스야 뭐야….”
유연이 작게 중얼거렸다.
“믿기 힘든 거 알아. 나도 그랬어. 그런데 나율무는? 걔도 같이 들었다며.”
“그 형한테는 말도 꺼내지 마. 개발자 앞에서 미친놈이라고 길길이 날뛰는 거 겨우 말렸으니까.”
생각만 해도 두통이 이는지 유연은 이마를 짚으며 혼란스러워했다.
“근데 잠깐만. 다른 세계의 형이랑 내가 만난 적이 있다고? 언제?”
“정확히 말하면 너만 본 건 아니고…. 다 봤다던데.”
“다? 우리 다 봤다고? 그 사람을? 언ㅈ,”
지한을 재촉하던 유연은 불현듯 떠오른 게 있었다.
“설마 기억상실증 걸렸을 때?”
“응.”
“미친. 진짜 미쳤네. 둘 다 미쳤어. 아님 내가 미친 거야?”
믿고 싶지 않은 건지, 믿기지 않는 건지. 유연은 주저앉으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하, 씨…. 진짜 미친 소린 거 아는데, 근데 왜 다 말이 되는 것 같냐고. 제발 내가 미친 게 아니라고 해 줘.”
“안 미쳤어.”
지한이 원하는 답을 들려주자 유연이 고개를 홱 올려 그와 눈을 마주했다.
“장난해? 누구 염장 질러?”
“해 달라며.”
“아오! 내가 저 형이랑 무슨 말을 해.”
“내가 왜.”
자신이 남의 속을 긁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까지 완벽했다.
계단에 걸터앉아 한참을 고민하던 유연은 생각을 끝낸 듯 고개를 들었다.
“일단은 반만 믿을게. 나머지 반은 증명해 봐.”
도대체 백야가 뭘 해야 하는 건지, 지한은 뭘 돕고 있는 건지 믿을 수 있게 해 달라는 요구였다.
“그거면 충분해. 오늘 당장도 가능하거든.”
“왜. 또 무슨 조명 퀘스튼가 뭔가 그거 해야 하는 거야?”
“응. 일단 지금은 벗어야 해.”
“뭐, 뭘 해?”
“벗어야 된다고.”
조또의 단호한 눈빛에 유연은 그만 소름이 돋았다.
엄마 살려 줘….
이 형 눈이 돌았어.
* * *
나라는 뮤직 스테이 본 방송을 챙겨보고 있었다. 컴백과 동시에 1위 후보에 오른 데이즈의 인터뷰를 보기 위함이었다.
신인 가수의 무대가 끝나자 두 MC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소진 : 민성 씨, 큰일 났어요. 지금 데이즈랑 데이즈가 싸우고 있대요.]
[민성 : 네? 저희가요?]
[소진 : 오늘의 1위 후보가 바로 데이즈의 <야화> 대 데이즈의 <연서>거든요.]
MC들의 뒤엔 2대 3 구도로 마주 보고 선 멤버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민성 : 내 이놈의 시키들을! 안 되겠어요. 지금 당장 불러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봐야겠어요.]
[소진 : 데이즈, 나와 주세요~]
민성과 소진이 옆으로 멀어지자 한 걸음 앞으로 나온 멤버들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단체 : For your days! 안녕하세요~ 데이즈입니다.]
멤버들과 함께 인사한 민성은 다시 진행을 이어 갔다.
[민성 : 제가 잠깐 자리를 비운 동안 멤버들끼리 싸웠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게 사실이에요?]
민성이 근엄한 척 허리에 손을 짚었다.
<연서> 의상을 입은 율무와 청, <야화> 의상을 입은 지한과 유연, 백야가 동시에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백야 : 아니요? 저희 지금 막 화해하려고 했어요. 그치?]
[청 : 당근하지!]
각 팀의 대표인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자 민성의 기세도 누그러졌다.
[민성 : 그럼 <연서> 데이즈의 율무 씨. 오늘 1위 후보에 오르게 된 소감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율무 : 먼저 두 곡 다 1위 후보에 오르게 돼서 감사한 마음이 큰데요. 어떤 곡이 1위가 될지 저도 굉장히 궁금합니다.]
율무가 마이크를 내리자 이번에는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소진 : 그렇지만 1위 트로피는 단 하나뿐인데요. 만약 1위를 하신다면 어떤 공약을 하실지 들어 볼까요?]
이번에는 <연서>의 청이 마이크를 들었다.
[청 : 만약에 <연서>가 1위를 하게 된다면, 연모하는 마음을 담아 빅 절을 하겠습니다!]
[율무 : 큰절.]
[청 : 큰절!]
누가 이기든 1위는 저희라는 사실에 청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어서 <야화>의 지한이 마이크를 들었다.
[지한 : 네. 만약 <야화>가 1위를 하게 된다면 저희는 옷고름을 풀겠습니다.]
분명 리허설 때까지만 해도 입에 꽃을 물기로 했는데 생방송에서 멘트가 바뀌었다. 갑자기 바뀐 1위 공약에 멤버들도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비상계단에서 미리 언질을 받은 유연만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실성한 것 같았다.
[민성 : 네?]
민성도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으나 더한 멘트만 돌아올 뿐이었다.
지한은 자신의 가슴에 예쁘게 묶인 리본을 가리키며 한 번 더 강조했다.
[지한 : 풀겠습니다.]
그 순간 나라가 비명을 지르며 허벅지를 마구 내리쳤다.
“꺄아아악! 미쳤나 봐, 진짜!”
조또의 폭탄 발언에 실시간 SNS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 오늘 지한이가 지한이 함!!
- 한지한 뭔데? 지금 나 꼬신 거 맞지? 그치???
- 놔 봐요! 이 사람이 먼저..!
- 아니 울 집 고양이 유죄 발언 어떡함??? 저래 놓고 지가 뭔 짓 한 줄도 모르겠지. 또 나만 쓰레기지
- 얘들아 매니저님이랑 협의된 거니? 남매가 이걸 허락했어?
- 뭔데 이거ㅋㅋㅋㅋㅋ 애들 반응 리얼인 거 보니까 협의가 1도 안 된 것 같은데?
- 고양이가 사고침ㅋㅋㅋㅋ
- 옷고름을 풀면서 꼬시는 남돌이 있다???
└ 당장 여며...
└ 아니 여미지 마
└ 여며
- 유앱에선 안 할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왜 그래?ㅠㅠ 근데 얘들아 일단 백야는 애기니까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
- 그냥 어부바나 해!! 너희가 벗을 수 있는 곳은 콘서트뿐이야
- 미친 진짜 벗는다고? 팬잘알 천재 고영!!! 아니 폭스인가
그리고 잠시 후. 대망의 1위 발표 순간이 다가왔다.
천사와 악마로 나뉜 나잉이들은 각자의 바람을 담아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나라는 악의 편이었다.
“제발 야화. 제발.”
뜨거운 눈빛에서 그녀의 욕망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껴졌다.
[민성 : 뮤직 스테이 1위 발표만을 남겨 두고 있는데요. 데이즈의 <연서>와 데이즈의 <야화>.]
[소진 : 과연 1위는 어떤 곡이 차지하게 될지, 점수 공개해 주세요.]
각종 점수가 빠르게 올라가며 멤버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소진 : 과연 1위의 주인공은?]
[민성 : 네~ 축하드립니다. 데이즈의 <야화>.]
“와아아악! 됐다! 됐어!”
꽃가루가 터지며 나잉이들의 축제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