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인데 패시브가 개복치-309화 (309/340)

제309화

* * *

시간을 조금 거슬러 1위 후보 인터뷰 전으로 돌아가 보자.

이마에 ‘삐짐’이 적혀 있는 백야는 대기실에서 필승과 연락이 한창이었다.

[개발자님 : 말씀하셨던 퀘스트 말인데요. 뭐로 변경해 드릴까요?]

퀘스트 명은 수정이 불가능하다고 하니, 어느 정도 제목에 맞는 행동을 취해야 했다.

‘<난 널 유혹하는 거란다>가 뭐냐고….’

내용을 수정한다고 해도 무대 위에서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것엔 변함이 없었다.

고민하던 백야는 그냥 간단히 할 수 있는 윙크를 떠올렸다.

[나 : 윙크하기로 바꿔 주세요!]

[개발자님 : 네. 그럼 그렇게 바꿔 둘게요.]

급한 불을 끈 백야는 지한을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지만, 그는 유연과 함께 자리를 비운 지 오래였다.

“청. 지한이는?”

“유연이랑 나갔어.”

“그래?”

현재 개복치가 지한에게 공유해 준 사실은 단편적이었다.

노출 퀘스트가 떴으며, 퀘스트에 실패하면 페널티 때문에 몸이 아플 수도 있다.

‘잘 해결됐다고 말해 줘야 하는데.’

그래도 오늘의 1위 공약은 따로 정해 둔 것이 있으니 천천히 말해 줘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고양이는 재빠르고 날쌘 동물이었다. 리허설 때만 해도 건전한 공약을 말하던 그는 생방송에서 사고를 치고 말았다.

“옷고름을 풀겠습니다.”

미쳤니?

지한을 보는 민성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카메라에 빨간 불이 꺼짐과 동시에 지한의 팔을 붙잡은 민성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 없는 욕을 하고 있었다.

“왜?”

“제정신이니?”

“응. 이따 봐.”

말속에 숨은 뜻이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지,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지한은 ‘자신은 건강하다’며 유유히 인터뷰 대기실을 벗어났다.

민성은 진행 때문에 저 시한폭탄 같은 녀석의 뒤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그러나 민성이 아니더라도 지한을 닦달할 이들은 세 명이나 더 있었다.

평소보다 빨리 대기실로 돌아온 백야는 문을 닫자마자 원망 어린 얼굴로 지한을 바라봤다.

“왜 그랬어? 왜?”

윙크만 하면 됐는데!

고양이가 사고를 거하게 치는 바람에 백야는 이제 옷고름도 풀어야 했다.

이게 바로 망한 조별 과제인가.

“왜?”

자신을 바라보는 저 알 수 없는 눈깔, 아니 순수한 눈을 보라.

그래도 자신을 돕겠다고 저지른 일일 텐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큼은 그를 탓할 수 없었다.

씨잉….

백야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전투력 MAX에서 0이 돼버린 개복치의 모습에 남경이 이마를 짚으며 등장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그래도 ‘벗겠다’고 말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마터면 방송 심의에 걸려서 활동 시작과 동시에 마지막 무대가 될 뻔했다.

그래. 이제 와서 따진다 한들 이미 엎질러진 물인 걸 어쩌겠나.

“그래. 하고 싶은 거 해야지. 팬들은 좋아하겠다.”

대신 당장 의상 안에 티셔츠를 입으라는 불호령과 함께 스타일리스트 팀이 분주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공중파에서 노출은 안 된다는 말에 지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남경의 말을 따르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한백야.”

어수선해진 틈을 타 다가온 고양이는 개복치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넌 그냥 입지 마. 어깨 노출 정도는 웬만한 걸그룹은 다 하니까,”

“이이…!”

그러나 더는 참지 못한 개복치는 폭발하고 말았다.

오래간만에 앞니를 드러낸 백야가 지한에게 달려들며 그의 팔뚝을 찰싹찰싹 내리쳤다.

내가!

너 때문에!

못 살아!

* * *

- 1위 공약으로 무대에서 옷고름 푸는 미친 그룹 (동영상)

- 미친놈들아ㅜㅜㅜ 아니 어떻게 공중파에서 1위 공약으로 옷 벗을 생각을 해?ㅠㅠㅠ 개좋아 진짜

- 윙크하면서 옷고름 푸는 천재 갓기를 봐 주세요 (백야 짤.gif)

└ 분명 다 가렸는데 야하다?

└ 안에 흰 티 살짝 보이는 게 킬포

- 반팔 티 입힌 놈 나와

- 한유연 또 나 꼬시네ㅠ 개폭스 유죄남 저런 얼굴로 옷고름 막 풀어도 됨???

- 데이즈 1위 공약 이게 말이 되는?? 내가 변태인 건지 애들이 변태인 건지...

- 나율무 초콜릿 기대했는데ㅜㅜㅜㅜㅜ 공중파라 야속하다

- 실트에 ‘옷고름 풀’이라길래 무슨 풀이지? 하고 눌렀다가 입덕했습니다 (백야 옷고름 윙크 짤.gif)

마약왕은 위대했다.

스킬을 바꾸고 출연한 첫 스케줄에서 수많은 중독자를 탄생시키며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연습실로 돌아와 무대 반응을 찾아보는 백야의 눈에 한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 한백야 인간 마약. 중독성 쩔어서 하루라도 안 보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

뜨끔.

댓글을 보는 마약왕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 마, 마약이라니…!’

무고한 시민을 이렇게 모함해도 되는 거야?

찔리는 게 많은 개복치는 이러다 경찰에게 잡혀가는 건 아닐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니야. 내가 잡혀가긴 왜 잡혀가.’

태블릿 전원을 끈 백야는 끔찍한 물건을 보듯 PC를 저 멀리 밀어 버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율무 앞으로 미끄러질 건 뭐란 말인가.

스윽-

부드럽게 도착한 태블릿 PC에 율무가 고개를 들자 지한과 눈이 마주쳤다.

“뭐야?”

지한은 대답 대신 턱짓으로 백야를 가리켰다.

저쪽 신사분께서 보내셨습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두근.

설마… 이것은 화해의 사인?

율무가 기대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자 백야는 조금 난감해졌다.

‘잘못 보낸 건데….’

그러나 잔뜩 기대하고 있는 저 커다란 눈망울을 보라. 백야는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결국 대화를 하기로 한 마약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불러냈다.

“이야기 좀 하자고.”

“으응….”

최대한 불쌍한 척 어깨를 늘어뜨린 덩치가 백야의 뒤를 따라나섰다.

이내 비어 있는 보컬 연습실로 들어간 두 사람은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았다.

“나율무. 너 내 전화 자주 엿들었어?”

“아니야. 맹세코 진짜 그날이 처음이었어.”

왕이 죄를 묻자 죄인은 그대로 자신의 잘못을 실토했다.

“그날은 네가 말도 막 더듬고, 너무 수상하게 화장실로 도망가니까….”

“그래서 억울해?”

“아니?! 그런 건 절대 아니야. 내가 잘못했지. 미안.”

율무는 허벅지 사이로 손을 끼운 채 발을 이리저리 꼬았다 풀기를 반복했다. 죄인은 자신의 주제를 알았기에 감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얘길 들었어?”

“그냥…. 네가 말만 하면 다 들어주는 거냐고 기뻐하더니 갑자기 벗는 거 말고 다른 건 안 되냐고 하니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도 했고….”

백야의 얼굴이 빨개지며 순간 연습실이 덥게 느껴졌다.

“미친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미쳤었나 봐.”

백야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진심으로 황당해했다.

“그래서 개발자님 찾아간 거야?”

“응….”

“가서 미친놈이라고 욕하고?”

“그건 그 사람이…!”

율무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억울한 점이 있었다.

감정적으로 받아치려는 순간, 예민한 개복치와 눈을 마주치곤 차분해졌다.

“아니이… 그 사람이 여기가 게임 속이니 뭐니, 이상한 소리를 하잖아. 우리는 원래 망할 그룹이었다면서 악담을 퍼붓질 않나.”

억울함에 찡찡거리던 목소리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네가…. 네가 나중에는 사라질 거라고….”

투둑-

그 순간 율무의 회색 트레이닝팬츠 위로 투명한 방울이 떨어졌다. 허벅지 위로 진회색 동그라미가 서서히 퍼졌다.

“너 울어?!”

공식 석상을 제외하고 율무가 눈물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당황한 백야가 율무의 얼굴을 잡아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눈망울은 빨갛게 충혈된 데다 그 안엔 눈물이 그렁그렁 차 있었다.

“왜, 왜 울어….”

“나 울어?”

율무가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자 금세 또 방울이 맺혔다.

“아…….”

율무는 자신의 손가락을 보며 잠시 멍해졌다.

“속상했나 봐. 네가 나 말고 그 사람 편들어서.”

“그런 거 아니야. 나는 너희가 나한테 말도 없이 찾아갔다고 하니까…. 걱정돼서 그랬어.”

필승이 율무와 유연에게 그렇게까지 깊은 이야기를 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미안. 개발자님이 장난이 치는 걸 좋아하셔서 놀리려고 그랬나 봐. 내가 사과하라고 할게. 그런 분이 아닌데 왜….”

“아니야. 괜찮아.”

그쪽에서 사과를 한다면 저 또한 쌍욕을 퍼붓고 온 걸 사과 해야 하는데, 그건 싫었다.

“나도 잘한 건 없으니까. 무턱대고 찾아가서 무례하게 군 건 사실이고.”

“으응….”

“그래도 하나만 대답해 줘.”

율무가 자신의 어깨를 토닥이는 손을 잡아 내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떠날 거 아니지? 그치?”

백야는 사라질 거라며 확신에 찬 미소를 짓던 필승의 얼굴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백야는 잠시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무슨 말이 그래….”

“약속해. 팀 탈퇴 같은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그 사람이 그랬단 말이야. 네가 우리 떠날 거라고.”

그런 말까지 했단 말이야?

필승을 무한 신뢰하고 있던 백야의 마음에 살짝 금이 갔다.

“거짓말이지? 그렇지? 그 사람 진짜 나쁘다. 그런 말 해서 우리 사이 갈라놓으려고 그러는 거잖아.”

율무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대답을 갈구했다. 눈동자는 겁에 질린 듯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백야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냥 알겠다고만 하면 될 텐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게….”

백야가 망설이자 커다란 눈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의자에서 내려온 율무는 무릎을 꿇으며 백야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응? 사실 아니잖아. 우리 버릴 거 아니잖아. 왜? 뭐가 문젠데? 내가 장난치는 게 별로야? 그럼 앞으로 안 할게.”

“율무야, 일단 진정하고 이것 좀 놔 봐. 응?”

“나는 너랑 못 헤어져. 내가 더 잘할게, 백야야. 제발….”

당황한 백야가 율무의 손을 떼어 내며 어정쩡한 포즈로 일어섰다.

그 순간 연습실 문이 열리며 낯선 무리가 등장했다. 8시 타임에 보컬 룸 예약을 걸어 둔 걸그룹 데뷔조 후보 연습생들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백야와 눈이 마주친 연습생들은 동시에 생각했다.

‘헐, 야. 더 큰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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