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인데 패시브가 개복치-311화 (311/340)

제311화

백야가 홱, 고개를 치켜들며 감독을 바라봤다.

‘이건 혹시 러브콜?!’

덕진과 백야는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감독의 다음 대사를 기다렸다.

“아. 컴백한 지 얼마 안 돼서 바쁘시겠구나.”

“아니요?! 연습실에서 놀고 있어요! 지금 당장 올 수 있어요!”

백야의 급발진에 감독과 조연출이 흠칫거렸다.

율무차로 말할 것 같으면, 최근 필승의 필터링 없는 발언에 충격을 받고 심각한 분리 불안 증세를 보이는 중이었다.

원래도 백야에게 유독 치대는 편이었지만, 보컬 룸에서 눈물을 보인 뒤로는 아주 제 뒤를 졸졸 따라다녀서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는데. 이건 기회였다.

오늘도 율무를 떼어 놓고 나오느라 10분은 현관에 서 있지 않았던가!

“그래요? 그럼 이분께 여쭤봐 주실 수 있을까요?”

“네, 뭐….”

백야의 적극적인 모습에 덕진도 얼떨결에 콜을 외치고 말았다.

“율무 바로 올 거예요! 키도 엄청 크고 발성도 좋고 완전 강아지 같은 친구예요. 사실 연기도 엄청 하고 싶어 했어요.”

“그래요?”

감독은 재잘대는 백야를 흐뭇한 미소로 바라봤다. 눈 깜빡할 사이 마약왕에게 중독돼 버린 것이다.

그때, 답지 않게 늑장을 부리던 덕진이 백야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그런데 백야 님, 괜찮을까요? 율무님의 연기는….’

<하이틴> 웹 드라마를 통해 증명된 율무의 발 연기를 백야가 모를 리 없었다.

물론 백야도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율무가 하고 싶어 했으니까 한 번쯤은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조금 무리이지 않을까요?’

‘조용히 해욧! 연습생도 된다잖아요.’

우리 율무가 어때서!

개복치의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에 덕진은 마지못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럼 저는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덕진은 세 사람으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남경과 통화를 나눴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백야는 뒤늦게 걱정이 들었다.

덕진에게는 센 척했지만, 그래도 율무의 연기 실력에 대해 언급은 해 둬야 할 것 같았다.

“저… 그런데요, 감독님.”

“네.”

“율무가 연기는 서툴러요.”

“괜찮아요. 내성적인 캐릭터라 행동 위주일 거고, 대사도 몇 없어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정말요? 와~ 다행이다.”

백야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비록 카메오지만 그에게 훌륭한 데뷔 작품이 되어 줄 것 같았다.

* * *

자정이 되자 너튜브 공식 계정에 영상이 업로드됐다. 청이 약과를 주문하게 만든 문제의 자체 콘텐츠였다.

[아균관 유생들의 나날 上 : 과거시험]

일 잘하기로 소문난 ID가 역대급 콘셉트를 가지고 아무것도 안 했을 리 없었다.

푸른색 한복을 착용한 방패즈가 얼굴에 먹물을 칠한 채 비장하게 붓을 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썸네일에 머글 김 모 군은 영상을 재생했다.

<야화> MR과 함께 경희궁 정전이 비쳤다.

[민성 : 이리 오너라~]

[청 : 네가 와라.]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는 맏내와 막내가 보였다.

[민성 : 니? 어디 하늘 같은 형님에게.]

[청 : Sorry. It's a mistake.]

[민성 : 어허! 어찌 시험을 앞두고 외국어를 쓴단 말인가!]

[청 : 무슨 말을 못 하겠네.]

깐깐한 유생의 꼰대질에 청이 입술을 삐죽였다.

이어서 등장하는 두 번째 무리.

[율무 : 당 도령~ 오랜만일세. 몸은 좀 괜찮은가?]

[백야 : 응. 그보다 자네는 오늘 몇 번으로 찍을 건가?]

[율무 : 음~ 나는 3번?]

[백야 : 그럼 난 4번 할래.]

과거 시험을 앞둔 유생들답게 두 사람은 조금 긴장한 모습으로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한 유연과 지한이 뛰어 들어왔다.

[유연 : 아~ 말이 너무 막히는데?]

[지한 : 걸어왔잖아.]

[유연 : 이 답답한 선비가 또 다큐로 받아들이네.]

유연이 발끈하자 지한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과거 시험장이라는 천막이 걸린 숭정전. 그곳에 나란히 선 데이즈는 자리 배치도를 확인한 뒤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청 : 오! 피크닉 온 거 같아!]

정전에 펼쳐진 여섯 개의 돗자리. 청이 털털하게 앉으며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민성 : 떼잉…. 어디서 자꾸 영어가 들리는지.]

[율무 : 청나라에서 사신이 과거를 치르러 왔다던데?]

[백야 : 거기는 중국어 아니야?]

[지한 : 사신이면 이미 청나라에서 시험 통과한 거잖아.]

[율무 : …….]

[백야 : 아싸. 한 명 제꼈다.]

백야가 율무는 이길 수 있겠다며 기뻐했다.

[민성 : 어허! 조용, 조용! 자네들은 긴장도 안 되는가.]

‘자신은 이날을 위해 30년을 준비해 왔다’며 민성이 허풍을 떨자 조선 스나이퍼가 또 한 번 저격에 나섰다.

[지한 : 약관(20세)을 넘긴 지 얼마 안 되었다 들었소만.]

[민성 : 거 참! 출석을 시작하겠소!]

민성이 급하게 화제를 돌리며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다. 상소문을 보듯 근엄한 표정을 짓던 민성은 이내 멤버들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했다.

[유연 : 그런데 그쪽도 같은 응시생 아니오?]

어째서 같이 시험을 치러야 할 자가 진행을 겸하냐며 유연이 이의를 제기했다.

[민성 : 궁에 인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대충 모른 척하시오.]

[율무 : 영 허술하네~]

민성은 이어서 소지품 검사가 있겠다고 선언했다.

[민성 : 모두 가져온 물건을 자리 위로 펼쳐 보시오.]

그때 청이 손을 번쩍 들며 질문했다.

[청 : 근데 이거 무슨 테스트야?]

화면 아래에 ‘조선 최고의 아이돌 <데이즈>를 뽑기 위한 시험’이라는 자막이 깔렸다.

[유연 : 그런데 외국인도 응시할 수 있어요? 저 사람 아까부터 자꾸 영어 쓰는데.]

[청 : No! 나 한국 사람!]

[유연 : 조선 사람이겠지.]

응시 자격 조건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길 잠시. 그사이 백야의 앞으로 다가간 민성은 그의 소지품을 먼저 확인했다.

시험에 응시할 시지와 붓, 벼루, 먹, 문진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민성 : 합격.]

[백야 : 정말요?]

[율무 : 아직 시험도 안 쳤는데?]

감독관의 권력 남용에 민원이 폭발했다.

[민성 : 귀엽잖아.]

[지한 : 인정.]

[유연 : 둘 다 제정신이야?]

시험장이 다시 한번 소란스러워졌다.

시험은 공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1분 만에 합격 취소 통보를 받은 백야는 조금 아쉬워했다.

다시 시작된 소지품 검사.

백야의 자리와 달리 청의 자리에는 물건이 한가득이었다.

[율무 : 쟤는 진짜 나들이 왔는데?]

[민성 : 약과, 떡, 유과…. 이게 다 뭐니? 시험에 꼭 필요한 것들만 가져오라 했을 텐데.]

[청 : No! 이거는 햄스터 먹이! 꼭 필요한 거야.]

청이 미니 약과를 까서 백야의 입술 위로 갖다 대자 작은 앞니가 먹이를 물었다.

[지한 : 인정.]

[유연 : 아니, 이 사람은 아까부터 뭘 자꾸 인정하는 거야?]

아무 말 대잔치로 한참을 떠들던 멤버들은 20분이 지나고 나서야 시험을 칠 수 있었다.

1차 시험은 2행시 백일장.

조선의 인재상은 문무를 두루 겸비한 자로, 1차에서는 ‘문’에 해당하는 학문의 깊이를 검증해 보겠다는 도가 담겨 있었다.

제시어는 <야화>였다.

[백야 : 제한 시간 있어요?]

[민성 : 5분 드립니다. 저 모래시계 안의 모래가 다 떨어지면 붓을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율무 : 네에~]

생각보다 짧은 시간에 멤버들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뚜껑을 연 백야가 벼루 위로 먹물을 꾹 짜자 검은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백야 : 끄앙!]

청과 지한도 같은 실수를 하며 손에 먹물을 묻혔다.

[유연 : 난리 났다, 난리 났어.]

그 모습을 보며 한심해하던 유연은 절제된 자세로 붓을 적셨다.

초등학교 창의적 체험 활동 때 서예부를 했었다던 그는, 왼손으로 오른쪽 소매를 잡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우아하게 답안지를 써 내려갔다.

[율무 : 전생에 선비셨어요?]

백야는 옆에서 멤버들이 드립을 치든 말든 오리처럼 입을 내밀고는 엄청난 집중력을 선보이며 붓에 먹물을 듬뿍 적셨다.

그리곤 한 자 한 자 신중히 써 내려갔다.

5분 후.

모래시계가 멈추자 멤버들이 태연히 붓을 내려놓았다.

민성은 각자 자신이 쓴 답안지를 들고 나와 2행시를 발표하면 스태프들의 투표로 등수가 결정된다고 했다.

[민성 : 그럼 누가 먼저 할래?]

[백야 : 저요!]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고 생각한 백야가 손을 번쩍 들었다.

[율무 : 오~ 당 선비~ 자신 있나 본데?]

[백야 : 아니야, 보지 마!]

율무가 백야의 답안지를 보려 하자 마른 몸이 시지 위로 엎어지며 철통 방어했다.

[민성 : 애기 먼저 해.]

민성의 허락이 떨어지자 백야가 시지를 들고 일어났다.

벗어 놓은 꼬까신을 신고 햄풍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율무와 유연이 서로 손바닥을 부딪치며 박장대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율무 : 푸하하하!]

[유연 : 푸하하!]

관종들의 어그로에 백야가 뒤를 노려봤다.

[백야 : 뭐야, 왜 저래.]

뭐 때문에 터졌는진 모르겠으나 관종에게 먹이 금지는 국룰. 가볍게 무시한 백야가 시지를 들며 2행시를 발표하려 했다.

[백야 : 운을 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백야의 부탁에 청이 목청껏 외쳐주었다.

[청 : 야!]

[백야 :  야옹! 지,]

그런데 백야가 운을 떼는 순간, 유연과 율무도 동시에 외쳤다.

[유연 : 야옹!]

[율무 : 야옹~]

[백야 : 엥?]

어떻게 알았지?

백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옆을 바라보자 율무와 눈이 마주쳤다.

율무는 백야의 돗자리를 내려다보며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남은 부분을 읽었다.

[율무 : 야옹! 지한이가 화내는 소리.]

[백야 : 뭐야?]

아직 읽지도 않았는데 율무가 자신의 답을 알고 있자 백야의 눈이 커다래졌다.

[유연 : 넌 먹물을 얼마나 묻힌 거야. 돗자리에 네가 쓴 거 그대로 적혀 있잖아.]

유연이 돗자리를 가리키자, 그 위로 백야의 필체가 선명하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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