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2화
[백야 : 헉!]
소품을 망가뜨린 백야가 화들짝 놀라며 스태프를 바라봤다.
놀란 햄스터 짤과 똑같은 모습에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백야 : 이, 이거 어떡해요?]
자리로 달려간 백야는 돗자리를 들춰 보며 바닥을 확인했다. 다행히 바닥은 젖지 않았다.
[백야 : 큰일 날 뻔했다.]
하마터면 문화유산을 훼손할 뻔한 백야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어지는 두 번째 2행시.
이번에는 지한이 앞으로 나왔다.
[지한 : 야생화가 들판에.]
[지한 : 화사하게 피었구나.]
수준급의 2행시에 스태프들 사이에서 감탄이 쏟아졌다.
세 번째 순서로 율무가 나섰다. 그는 백야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부탁했다.
[율무 : 저는 당 선비에게 이 2행시를 바칩니다. 운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때는 그가 필승을 만나기 전이라 한창 깐족거릴 때였다.
[백야 : 야.]
[율무 : 야한 눈빛으로.]
[백야 : 이 씨….]
시작부터 느껴지는 싸한 기운에 백야가 앞니를 드러내며 입질의 기미를 보였다.
[백야 : 먹물 뿌려도 돼요?]
[율무 : 당백이 화, 해 줘야지. 화~]
율무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마음 약한 백야는 마저 운을 떼 주었다. 그러자 그가 야심 차게 준비한 사랑 고백이 이어졌다.
[율무 : 화를 내는 너. 그 모습마저 귀여워 보인다면 이건,]
[민성 : 미친 거지. 훠이! 들어가.]
민성이 진상을 내쫓듯 손을 저으며 자리로 들여보냈다. 그리곤 대신 자리를 차지해 자신의 2행시를 읽었다.
[민성 : 야채 먹는 날.]
[민성 : 화요일.]
[율무 : 우우~]
쫓겨난 율무가 엄지를 아래로 내리며 야유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둘.
유연이 청에게 순서를 양보하자 청이 시지를 들고 씩씩하게 일어났다.
[청 : 야한 햄스터!]
[청 : 화이팅!]
조선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영어를 외치는 외국인에게 스태프들은 F를 주었다.
사실상 꼴찌였다.
이어서 마지막을 장식한 유연의 2행시까지.
[유연 : 야식 먹으면 민성이 형이.]
[유연 : 화낸다.]
[민성 : 야, 내가 언제 화를 냈어.]
[유연 : 율무 형 라면 끓이다가 혼나는 거 봤는데.]
율무는 그때가 생각나는지 눈물을 훔치는 척 눈가를 톡톡 찍었다.
[율무 : 흑. 애기 먹이려고 끓이던 거였는데….]
[민성 : 미안하다고 했잖아.]
[율무 : 그건 그래~]
민성이 순순히 인정하자 율무도 서러운 척을 그만두었다.
그사이 투표 집계가 이뤄지고, 그 결과 한 편의 시 같은 2행시로 감탄을 자아낸 지한이 1등을 하게 됐다.
[율무 : 장원 급제요~]
지한에게 꽃이 달린 장원 모자가 수여됐다.
그러나 아이돌에게 학문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무예였다. 이어지는 2차 시험의 진행은 장원 급제 한 지한이 맡게 됐다.
[지한 :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한 그는 준비된 대본을 읽었다.
[지한 : 아이돌이라면 신체 또한 유연해야 하는 법.]
그는 이번 시험에서는 민첩성과 유연성, 박자 감각을 중심으로 보겠다고 전했다.
[지한 : 다들 <야화> 안무는 알고 있겠지요?]
[율무 : 알지, 알지~ 요즘 저잣거리에 나가면 다 그 노래만 듣고 있던데 모를 수가 없지.]
요즘 조선에서 제일 뜨거운 가요가 아니냐며 율무가 능청스레 받아 주었다.
[지한 : 반주가 나오면 알고 계신 안무를 춰 주시면 됩니다.]
[백야 : 넹!]
그러던 그때, 급하게 파발이 도착했다. 멤버들을 위해 특별 출연을 결심해 준 덕진이었다.
지한에게 두루마리를 전한 그는 등장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심각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읽던 지한이 근엄하게 말했다.
[지한 : 저런. 이곳에 첩자가 있다는군요.]
아균관의 인재를 빼내 가기 위해 유생인 척 잠입한 자가 있다고 하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백야 : 나는 아니오!]
[지한 : 인정.]
백야가 무슨 말만 하면 일단 맞다 하고 보는 지한은 심각한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민성 : 나도 아닌데?]
[지한 : 증명해 보시오.]
[민성 : 아니, 쟤는 뭘 증명했어?]
백야가 아방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자 민성이 뒤늦게 사과했다.
[민성 : 미안하오. 얼굴이 청렴결백 그 잡채요.]
[백야 : 괜찮소.]
저희도 모르는 사이 마약왕 중독자가 된 데이즈는 백야에게만 유독 무른 모습을 보였다.
[지한 : 하지만 걱정 마시오. 첩자라면 민속 체조나 다름없는 <야화>의 안무를 모를 터. 내 이럴 줄 알고 조선 최고 장인에게 도움을 청해 두었지.]
[유연 : 첩자가 있을 줄 알았다고?]
[민성 : 그럼 일부러 심은 거 아니야?]
두 사람의 콩트에 지한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하마터면 몰입이 깨질 뻔했다.
필사적으로 참아 낸 지한은 바구니에 든 헤드폰을 나눠 주었다.
[율무 : 이것은 볼끼가 아니오.]
율무는 처음 보는 물건인 척 헤드셋을 턱 아래로 꼈다. 그리곤 뒤돌아 백야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백야 : 풉. 바보 같아.]
[율무 : 어허. 바보라니.]
[민성 : 청나라 물건인가?]
[청 : No. 미국 거. X플.]
[유연 : 야. 아니, 이 사람 안 되겠네. 우리 이제부터 영어 쓰면 벌칙 받기로 해.]
청이 자꾸 멤버들의 과몰입을 방해하자 유연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이제부터 영어를 쓰는 멤버들은 애교 벌칙을 수행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때부터 멤버들 사이에 긴장감이 돌았다.
[지한 : 이것은 미리견(미국)에서 들어온 신문물로 오직 아균관에만 있는 도구지요.]
그는 아균관의 기술과 지식으로 첩자에게만 다른 음악이 흘러나오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지한 : 모두 나눠 드린 장비를 착용해 주시지요.]
[청 : 썼어!]
[지한 : 곧 음악이 재생될 건데, 여러분은 당황하지 말고 알고 계시는 안무를 그대로 춰 주기만 하면 됩니다.]
게임의 룰을 이해한 데이즈는 정전 중앙에 <야화> 대형을 갖추고 섰다.
멤버들도 누가 랜덤 음악에 걸릴지 몰라 헤드폰에 쫑긋 귀를 세운 채 서로를 슬쩍 쳐다봤다.
뚱뚜두-
MR에 맞춰 멤버들이 안무를 시작했다.
[백야 : (삐끗)]
그러나 시작부터 백야가 삐끗거리며 동작을 놓쳐 버렸다.
유연이 ‘벌써?’라는 얼굴로 옆을 힐끔거렸다. 시작과 동시에 등장한 첩자 유력 후보에 몇몇이 키득거렸다.
[백야 : 나 아니야!]
백야가 크게 소리쳤지만 헤드폰 때문에 멤버들에게 닿진 않았다.
[민성 : (멈칫)]
[백야 : 어어…!]
이어서 민성이 멈칫거리자 백야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민성은 벗겨진 신발을 핑계 대며 빠져나갔다.
[민성 : 신발, 신발.]
보컬이 주력인 멤버들을 제외하곤 모두 완벽한 퍼포먼스를 보여 준 상황. 시간이 흐를수록 백야만 초조해졌다.
그러나 변주로 넘어가는 부분에서 청이 실수하며 모두의 시선을 받았다.
[청 : (씩)]
하지만 백야를 향해 대놓고 엄지를 치켜드는 모습을 보니 일부러 의심을 받기 위한 행동 같았다.
백야를 향한 살신성인에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어느새 끝이 난 무대.
노래가 끝나자 헤드폰을 벗은 멤버들은 첩자를 가려내기 위한 회의를 시작했다.
[유연 : 일부러 그런 거지? 웃기려고?]
댄스 천재는 멤버들의 실수가 진심이었다고 믿고 싶지 않은 듯 정신 승리를 시도하고 있었다.
[유연 : 이건 무조건 백도야.]
[백야 : 나 아니야…. 헤드폰이 커서 그랬어. 시작하자마자 흘러내렸단 말이야.]
백야가 억울해하자 기다렸다는 듯 햄친놈이 등장했다.
[청 : 나다! 나를 잡아가라!]
[율무 : 에이~ 키티는 일부러 틀린 거 너무 티 나더라.]
[백야 : 어? 너 벌칙.]
억울한 와중에도 벌칙은 놓칠 수 없는지 백야가 스태프를 향해 율무의 영어 사용을 고자질했다.
그러나 백야의 예상과 달리 율무는 오히려 기뻐했다.
[율무 : 세상에. 우리 당백이가 내 애교를 기다렸구나?]
네가 원한다면 벌칙이 아니어도 해 줄 수 있다는 말에 지한은 그에게서 벌칙을 압수했다.
[지한 : 너는 이 시간부터 애교 금지야. 그게 벌칙이야.]
[율무 : 시더, 시더~ 그런 게 어디 있어.]
[유연 : 아…. 혀 짧은 소리, 진짜.]
유연은 소름이 돋는다며 팔을 가볍게 문질렀다.
[지한 : 그럼 지금 백야 말고 또 의심되는 사람 있어?]
[율무 : 민성이 형?]
[민성 : 나? 내가 왜. 내가 얼마나 열심히 췄는데.]
민성이 조금 욱하며 율무를 노려봤다.
[백야 : 맞아! 나도 아까 지한이랑 부딪치는 거 봤거든? 박자 놓쳤어.]
[민성 : 신발 때문에 그렇다니까? 그럼 막 벗겨지는데 어떡해.]
민성은 자신의 신발이 조금 크다며 한쪽 발을 들어 발목을 달랑거렸다. 그의 말이 사실인 듯 갓신의 뒤꿈치 부분이 헐렁거렸다.
[유연 : 그런데 이게 뭐라고 다들 이렇게 진지하냐.]
[지한 : 당연히 진지하게 해야지.]
[유연 :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첩자 잡으면 뭐가 좋은데? 2차 시험 이기는 거야?]
[지한 : 그것도 있고, 한우 준다던데.]
그 순간 청이 손을 번쩍 들었다.
상품으로 한우가 걸려 있다는 말에 햄친놈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햄스터를 배신했다.
[청 : 햄스터다! 햄스터가 도둑이야!]
저를 두둔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돌변하는 모습에 백야가 황당한 얼굴로 바라봤다.
[백야 : 너 뭐야?]
[청 : 무조건 햄스터다! 아까 시작하자마자 틀리는 거 다 봤어!]
[백야 : 나 춤 못 추는 거 알잖아. 내가 꼭 이렇게까지 말해야 해?]
백야의 가슴 아픈 발언에 청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햄스터에게 한우를 먹일 수만 있다면 찰나의 원망쯤은 견뎌야만 했다.
[청 : No! 그래도 햄스터! 내가 오늘 햄스터 소고기 먹인다!]
[백야 : 안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