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3화
[청 : Shh. 이게 다 햄스터 때문이야. 고기 많이 먹어야 키 큰단 말이야.]
그래도 미움받기는 싫었는지 다급히 귓속말을 하는 청이었다.
그러나 그의 햄스터는 이미 토라진 상태였다.
청의 배신으로 결국 두 명으로 굳어져 버린 첩자 후보. 민성과 백야에게 최후 변론의 기회가 주어졌다.
[백야 : 여러분, 저는 간첩이 아니에요! 헤드폰이 갑자기 흘러내렸단 말이에요. 저는 진짜 이대로는 억울해서 돌아갈 수 없어요.]
[유연 : 간첩? 북한에서 오셨나 봐요.]
유연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백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백야 : 이이…!]
콩!
결국 솜 주먹이 그의 등을 내리쳤지만 타격은 크게 없었다.
이어지는 민성의 최후 변론. 그는 당연히 백야를 지목했다.
[민성 : 백야야. 내가 봤어. ‘첩자는 백야다’에 내 전 재산을 걸지.]
[율무 : 여기에 전 재산을 태운다고?]
[백야 : 전 재산?! 형! 덕진이 형! 방금 들으셨죠? 민성이 형 통장 이제 제 거예요.]
백야가 눈에 불을 켜며 달려들자 민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름 초강수를 뒀다고 생각했는데, 백야의 반응을 보니 무리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성 : 아니~ 걸 수도 있다고 했지, 건다고는 안 했어.]
민성이 밑장 빼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독이 바짝 오른 개복치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백야 : 무슨 소리야. 건다고 했거든? 저기 녹화 다 됐어.]
[청 : 맞아. 민성이 건다고 하긴 했어.]
청은 이때다 싶어 백야의 편을 들어주었다. 관계 회복을 노린 계산된 행동이었으나 당연히 실패했다.
그렇게 종료된 최후 변론.
잠시 후, 지한이 상자에서 투표지를 꺼내며 한 장씩 결과를 발표했다.
[지한 : 햄스터.]
[지한 : 당백이.]
[지한 : 백도.]
이름을 적어서 내라고 했더니 다들 이름처럼 부르는 애칭을 적어 냈다. 그렇게 연속으로 백야의 이름이 호명되길 잠시.
[지한 : 도민성.]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민성이 콧방귀를 끼며 옆을 돌아봤다.
[민성 : 너니?]
[백야 : 흥.]
백야도 콧방귀를 끼며 대답을 거부했다.
[지한 : 계속할게. 무조건 백야.]
이번에는 민성이 적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름이 불리자 새침한 눈꼬리가 옆을 노려봤다.
[백야 : 형이야?]
[민성 : 나 촉 좋은 거 알지? 무조건이야.]
팀 내 최약체들의 기 싸움은 꽤 흥미로웠다. 서로를 경계하며 입술을 씰룩거리는 게 그렇게 하찮아 보일 수 없었다.
이어서 마지막 표까지 결과가 공개됐다.
[지한 : 한백야.]
[백야 : 너도 나 적었어? 와….]
[지한 : …….]
지한은 시선을 피하며 가장 많은 표를 받은 백야의 헤드폰을 직접 착용해 보았다.
[민성 : 맞지? 맞지?]
민성이 기대에 찬 얼굴로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헤드폰에서 들리는 음악은 <야화>가 맞았다.
[지한 : 한백야 아닌데?]
[청 : No! 내 한우…!]
[민성 : 안 돼! 내 돈…!]
청과 민성이 절규하며 바닥으로 무너졌다.
[백야 : 거봐!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 한우 좋아하고 있네. 저리 가. 너랑 안 놀아.]
[청 : 아니야! 이거는 마피아의 모함이야!]
[백야 : 아, 좀 떨어져!]
청이 백야의 허리를 잡고 늘어졌다. 백야가 낑낑거리며 겨우 떼어 놓자, 이번에는 민성이 백야의 팔에 매달렸다.
[민성 : 백야야. 내 생각에도 이건 첩자의 모함이 틀림 없….]
그러나 경멸 어린 시선에 차마 말을 제대로 끝맺진 못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구질구질하다 싶었는지 민성은 급히 표정을 관리했다.
이내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그는 검지를 펴며 딜을 해 왔다.
[민성 : 9대 1. 내가 9 네가 1.]
정말 재산을 떼어 줄 생각인지, 진지하게 말을 걸어오는 민성의 모습에 백야는 경악했다.
[백야 : 진심이야?]
[민성 : 별로니? 그럼 8대 2.]
[백야 : 됐거든? 나도 돈 있어.]
[민성 : 하, 씨…. 오케이! 7대 3. 더는 안 돼.]
[백야 : 안 받는다고!]
[민성 : 6대 4 해 달라고?!]
[청 : 모라는 거야. 민성은 줘도 싫다잖아! 햄스터는 나만 좋아해!]
백야와 민성의 분위기가 좋아 보였는지 청이 난입하며 백야의 허리에 매달렸다. 그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던 율무는 잊고 있던 첩자를 떠올렸다.
[율무 : 귀엽게들 노네~ 그럼 진짜 첩자는 누구야?]
재산 분할 비율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걸 보니 민성도 아닌 것 같고, 계속해서 백야에게 매달리는 청의 반응을 보니 그도 확실히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후보는 지한과 유연인데, 굳게 다물린 또양이의 입술을 보니 그도 아니었다.
[율무 : 너야?]
[유연 : 푸하하하!]
그때 유연이 웃음을 참기 힘든 듯 폭소하며 자신이 첩자였음을 밝혔다.
[청 : 이 사기꾼! 내가 저럴 줄 알았다! 햄스터야, 우리는 당한 거야!]
[유연 : 네가 배신해 놓고 왜 내 탓을 해?]
[청 : 이이…! 고기 내놔!]
[유연 : 싫어. 나한테 맡겨 놨냐? 날강도가 따로 없네.]
그렇게 두 번째 시험의 장원을 유연이 차지하며 영상은 끝이 났다.
‘별거 없네.’
30분이나 하는 영상을 홀린 듯 시청했지만 머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러나 메인 화면으로 나가는 순간, 머글의 머릿속엔 마약왕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름이 백야랬나?’
아이돌은 걸그룹만 취급하는 그에게 남자 아이돌의 이름을 외울 뇌 공간 따위는 없었다.
그럼에도 백야의 이름은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대단한 중독성이었다.
* * *
멤버들이 <야화> 자컨 영상의 모니터링을 끝냈을 즘 <가족사> 촬영 현장에 율무가 도착했다.
그동안 율무가 나오지 않는 컷들만 미리 당겨서 촬영한 백야는 자정이 넘어서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왔어?”
“응. 근데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율무가 어색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굳은 표정이 그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긴장했어?”
“나 이런 덴 처음이잖아.”
율무가 가슴을 짚으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요란을 떨면서도 빠르게 굴러다니는 눈알은 현장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 백야는 율무의 등을 토닥이며 그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대사도 별로 없고 편하게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하셨어.”
그런데 말하고 나니 너무 작은 역할 같았다. 혹시라도 율무가 기분 나빠하진 않을까 뒤늦은 걱정이 들었다.
백야가 슬쩍 올려다보자 저를 보고 있던 율무와 눈이 마주쳤다.
역시. 생각보다 작은 역할에 실망한 게 틀림없었다.
“어…. 그래도 나랑 같이 나오는 신이 많아. 캐릭터 자체가 소심하고 내성적인 친구라서 부담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말을 하면 할수록 저를 바라보는 율무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실망했어?”
자신의 추천으로 오게 된 거라 백야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실망한 얼굴을 보니 백야도 조금 섭섭한 마음이 생기는 듯했다.
그러나 율무의 입에선 백야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네가 원래 이 정도로 귀여웠었나?”
“야, 이 씨.”
발끈하려던 백야는 율무의 진지한 얼굴을 보곤 심각해졌다.
<귀여워서 미안해(S)> 스킬을 장착하고 있을 때보다 <마약왕(R)>으로 바꾼 뒤, 주변인들의 반응이 더 격해졌기 때문이다.
‘설마. 아니야. 기분 탓이야.’
그때 멀리서 재욱이 다가왔다.
“애기. 어디 갈 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가야지. 찾았잖아.”
“왜? 나 남은 신 있어?”
백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얼굴을 하자, 재욱의 손이 백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안 보이면 걱정되잖아.”
“왜 저래, 진짜….”
머리에 남은 감각이 간지러운지, 백야는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며 율무를 소개해 주었다.
“형, 율무 알지? 나랑 같은 팀으로 활동하고 있는 친구야.”
“안녕하세요. 나율무입니다.”
두 장신의 남성이 악수를 나누며 안면을 텄다.
“말씀 들었어요. 오늘 카메오 출연하기로 하셨다면서요? 영상보다 실물이 훨씬 멋지시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당백이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당백이?”
“아. 애기 애칭인데 습관이 돼서 그만. 당도 백 프로라는 뜻이에요.”
“아…. 그러시구나.”
재욱은 왠지 모를 패배감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도착하셨나 봐요. 아직 사복 차림이신 것 같은데. 준비하러 가셔야 하지 않나?”
재욱은 율무를 보내 버리기 위해 모르는 척 말을 흘렸다. 그러자 백야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율무의 등을 마구 밀어냈다.
“야! 맞다, 너 여기 있으면 안 돼. 얼른 메이크업부터 받고 옷도 갈아입어야 한단 말이야.”
“미안. 몰랐어.”
솜 주먹에 떠밀려 분장실이 있는 방향으로 내몰리던 율무는,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재욱을 발견했다.
이대로 자리를 떠나면 자신의 복숭아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율무가 다리에 힘을 주자 커다란 덩치가 멈춰 섰다.
끼잉, 낑-
잘 밀리던 몸이 갑자기 꿈쩍도 하지 않자 백야가 팔을 내리며 신경질적인 얼굴로 올려다봤다.
“왜 안 가?”
“가면 안 될 것 같아.”
“무슨 개 소리야.”
답답하게 구는 율무의 행동에 잠시 조폭 햄스터의 자아가 튀어나왔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너 대본은 봤어?”
“아니. 못 봤어.”
거짓말이었다.
그에겐 남경이 구해 온 대본이 이미 있었다. 대사가 몇 줄 되진 않지만 미리 봐 두면 좋지 않겠냐며 덕진에게 부탁한 자료였다.
“그럼 그냥 같이 가. 너 메이크업 받는 동안이라도 봐줄게.”
“정말?”
율무가 눈에 띄게 좋아하자 백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지. 내가 불렀잖아. 나도 네가 잘해서 더 많은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어.”
율무는 백야의 말에 감동받았는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작은 머리통을 꽉 껴안았다.
“끄앙!”
“널 진짜 어떡하면 좋냐. 왜 이렇게 사랑스러워? 착해 빠져 가지고.”
“하지 마! 떨어져!”
“아, 미안.”
백야가 싫다고 하는 건 하지 않기로 약속한 율무는 그의 호통에 곧장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리곤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나 네가 도와주면 오늘 NG 하나도 안 내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순간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율무의 발언이 돌발 이벤트의 요건을 충족한 것 같았다.
[이벤트 : 최고의 서포터!
멤버를 도와 그가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줘 봅시다!
※ NG 1회당 스트레스 지수 10씩 증가. 단, 미션 중에는 스타 포인트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저놈의 입!’
삐진 놈 달래 주려다가 그에게 목숨을 건 꼴이 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