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4화
돌발 이벤트라 하면 시스템을 통틀어 업데이트만큼이나 불길한 것의 일환으로 계단과 사다리, 조명퀘스트 등등이 있었다.
“당백이가 감독님께 제가 아니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다지 뭐예요~ 움하하하!”
재욱의 앞에서 으스대고 있는 꼴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런 놈한테 제 목숨이 달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지한이를 추천했어야 하는데!’
후회해 보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야, 이리 와. 이럴 시간 없어. 형, 이따 봐.”
백야가 재욱에게 작별을 고하자 율무도 신이 나서 손을 흔들었다.
남은 신은 두 개.
스트레스 지수를 0으로 낮춰 놓고 시작하면 기회는 아홉 번 정도가 있었다.
<병약미> 패시브 때문에 스트레스 지수가 ‘주의’ 단계만 돼도 목구멍에서 피가 역류했지만 ‘경계’까지만 가지 않는다면 해 볼 만했다.
율무는 백야가 자신을 챙겨 주는 게 기분이 좋은지, 분장실에 도착한 뒤로도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않았다.
“일단 메이크업 받으면서 들어.”
율무가 맡은 역할은 너드미 넘치는 공과 대학생으로, 말주변이 없고 약간의 찌질한 매력을 겸비한 캐릭터였다.
촬영에 들어가면 지금처럼 실실 웃어서도 안 되고 ‘세상에서 내가 제일 찌질하다’고만 생각하라고 하자 우렁찬 대답이 들려왔다.
“너 소심한 게 뭔진 알지?”
한평생 호탕하게 살아온 율무는 소심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알지~ 눈치 보는 거. 하고 싶은 말 있어도 제대로 못 하고.”
“그렇지. 지금부터 너는 그런 소심한 사람이 되는 거야.”
자신의 눈치를 보며 대사를 읽어 보라 하자 율무가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곤 비장한 얼굴로 외쳤다.
“저기요.”
“NG. 야, 작게 말한다고 다 소심한 사람인 줄 알아? 목소리는 또 왜 까는데?”
금방이라도 목을 조를 것 같은 섬뜩한 목소리였다.
“차라리 말을 더듬어.”
“아~ 오케이. 다시, 다시.”
율무가 감을 잡았다며 재도전했다.
“저, 저기요.”
“그렇지! 잘했어. 봐, 하니까 되잖아.”
“좀 괜찮았어?”
“완전 메소드 연기 같았어.”
조련이 수준급이었다.
지잉-
그때 율무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잠시만.”
“응.”
백야는 자신의 대사를 암기하며 율무의 용건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한편 모르는 번호로 온 메시지를 확인한 율무는 표정이 좋지 못했다. 신분을 밝히진 않았지만 말하는 싸가지를 보아하니 필승이라는 개발자가 틀림없었다.
[웬만하면 NG 안 내는 게 좋을 텐데. 백야 피 흘리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뭔 개 소리야….”
기분이 더러워진 율무가 낮게 욕을 읊조렸다.
“응? 나 불렀어?”
대본에 집중하고 있던 백야가 눈을 살짝 돌려 거울 속 율무를 바라봤다. 그 깜찍한 얼굴에 율무의 화는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율무는 핸드폰을 넣으며 백야의 안색을 살폈다.
“너 컨디션은 좀 어때?”
“좋아.”
“응. 나도 너 좋아.”
방심한 사이 훅 들어온 플러팅에 백야의 솜 주먹이 그의 어깨를 내리쳤다.
보는 눈이 많아 이 정도로 봐주는 줄 알라는 협박이 이어지자,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두 사람의 대화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스태프들의 소리였다.
잠시 후, 준비를 마친 백야는 율무를 데리고 감독에게 향했다.
“감독님! 율무 왔어요.”
“안녕하세요~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와 주셔서 제가 더 고맙죠. 그럼 바로 리허설 할까요?”
백야의 족집게 강의 덕분인지 율무도 연기를 곧잘 했다. 감독과 스태프들의 칭찬으로 자신감을 얻은 그는 곧바로 본 촬영에 들어갔다.
그러나 문제는 촬영이 시작된 뒤부터였다.
“저, 저기요!”
실제 촬영이라는 생각에 긴장을 한 건지, 율무는 국어책 연기를 선보이며 첫 번째 NG를 냈다.
“율무 씨가 긴장했나 보다. 조금만 가볍게 해 볼까?”
“넵. 죄송합니다~”
율무가 스태프들에게 사과하며 허리를 굽혔다.
백야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조금 오버한 것 같았다.
“미안. NG 안 낼게.”
“아니야, 내도 돼. 한 세 번까지는 괜찮아.”
“응?”
의미심장한 대답에 율무가 반문했으나 백야는 금방 말을 돌렸다.
“그냥 너무 긴장되면 음…. 우리 자컨 찍을 때처럼 콩트 한다고 생각해. 너 그런 건 잘하잖아.”
“알겠어.”
기분 나쁜 문자와 다르게 백야의 안색은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율무가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뒤를 도는 순간, 스태프들이 술렁이며 덕진이 달려왔다.
“괜찮으세요?”
“앗. 네. 갑자기 왜 코피가….”
당황한 백야가 율무의 눈치를 보며 휴지로 코를 틀어막았다.
“벌써 나면 안 되는데…?”
게다가 마치 코피가 날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혼잣말에 율무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두근거림이었다.
* * *
다행히 첫 번째 NG 이후론 흡족한 연기를 선보인 덕분에 백야도 더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
감독도 율무가 마음에 들었는지, 출연 분량을 늘이고 싶다며 추가 촬영을 제안해 와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다.
“율무야, 진짜 잘 됐다. 그치.”
율무의 선방으로 코피 한 번에 S급 뽑기권을 얻은 백야도 신이 나서 방방거렸다.
그러나 율무의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같은 번호로 받은 또 한 통의 문자 때문이었다.
[이제는 좀 믿겨요?]
그날 감정을 너무 드러냈나?
제 반응이 재미있어 유연이 아닌 저를 긁는 것 같았다.
해당 번호를 차단한 율무는 백야의 팔을 잡아당기며 요 며칠간 계속했던 질문을 던졌다.
“당백이 어디 안 갈 거지?”
“또 그 소리야? 약속, 도장, 복사까지 다 해 줬잖아.”
“빨리.”
“안 가. 네 옆에 천년만년 붙어 있을게. 됐냐?”
“응.”
율무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웃는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다. 숙소가 조용한 걸 보니 멤버들은 아직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애기 피곤할 텐데 얼른 코~ 해야지.”
“죽는다 진짜.”
솜 주먹이 팔뚝을 내리치려 하자 율무가 숨죽여 웃으며 도망쳤다.
“2시에 연습 있어서 몇 시간 자지도 못하겠다. 이따 봐~”
“응. 너도 고생했어.”
백야가 먼저 방으로 들어섰다. 냉장고에서 탄산음료를 꺼낸 율무는 잠이 오지 않는 듯 거실 바닥에 앉았다. 소파를 등받이로 쓰는 게 한국인다웠다.
핸드폰을 꺼내 든 그는 자신의 신경을 긁어 놓은 문자를 한 번 더 읽어 볼 생각이었다.
우연이라기엔 찝찝했으나 그렇다고 믿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 제대로 경고했어야 하는 건데.”
율무가 구시렁거리며 메시지 함을 켜는데, 순간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소파에서 깜빡 잠이 든 유연이었다.
“뭐를 경고하는데?”
“아웁!”
“쓰읍. 다 깬다.”
유연이 비명을 지르는 율무의 입을 잽싸게 틀어막았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걸 보니 담요와 소파의 색깔이 비슷해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제 입을 턱 하니 막은 손을 떼어 낸 율무는 일그러진 얼굴로 낮게 다그쳤다.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건데?”
“형이랑 놀아 주려고.”
“아오, 진짜.”
“는 뻥이고, 깜빡 잠들었어. 이제 온 거야? 백도는?”
“방에. 야, 그것보다 일어나 봐.”
유연을 일으킨 율무는 소파 위로 올라가 앉아 자신의 문자를 보여 주었다.
“이거. 그 개발자라는 사람 같지?”
“맞는 것 같은데.”
유연도 율무에게 온 문자를 확인했다. 거기다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까지 듣고 난 후, 그의 얼굴은 더욱 심각해졌다.
“형이 NG 내니까 진짜 코피를 흘렸다고?”
“응. 우연이겠지?”
지한의 주장대로 무대 위에서 옷고름을 푸는 퍼포먼스까지 했지만, 백야의 달라진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의심이 가던 참이었는데, 율무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는 확신이 들 것도 같았다.
“지한이 형 일어나면 물어봐야겠다.”
“걔는 왜?”
“형이 제일 먼저 알았다던데.”
“뭐?”
지한의 파격 행보에 율무는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조금 융통성이 떨어지고 가끔 알 수 없는 행동을 하지만, 사리 분별만큼은 똑 부러진 애가 왜 그런 말을 믿었을까?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근데 형. 이 개발자 말이 진짜잖아? 그럼 백도 당장 내일 사라져도 이상할 거 하나 없어.”
“왜…?”
유연의 협박에 율무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게임은 무조건 템빨인 거 알지?”
“알지.”
“근데 백도 그게 지금 <개복치> 같은 걸 끼고 있다잖아.”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한 율무는 경악했다.
진실의 여부를 떠나 일단 저 둘을 붙여 놓으면 안 된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 * *
판교의 등대 겜박스.
3일을 꼬박 새운 필승은 곧 죽을 것 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살인적인 업무량에 백야가 접속한 서버의 모니터링까지.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랐다.
<최고의 서포터> 이벤트가 뜨자마자 지한에게 연락한 그는 율무의 연락처를 공유받았다.
번호를 알아내는 방법은 쉬웠다. 백야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자, 지한이 1분도 되지 않아 연락처를 보내왔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그는 손을 뻗어 책상 위를 더듬었다. 핸드폰을 찾는 듯했다.
“이 새끼 씹네.”
문자를 두 통이나 보냈는데도 여전히 답이 없었다.
‘이래서 의심 많은 놈들은 성가시다니까.’
핸드폰을 던지듯 내려놓은 필승은 다시 눈을 감았다.
퀘스트가 뜬 순간을 거의 실시간으로 목격했으니 내용을 바꿔 줄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필승은 일부러 율무의 신경을 긁었다. 그가 백야에게 일어난 상황을 진심으로 믿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NG를 세 번쯤 내면 그땐 바꿔 놓으려 했는데.’
퀘스트를 훌륭히 해낸 덕분에 필승이 나설 일도 없었다.
[SUCCESS] connect @ pthread = 0x400981000
그런데 순간 모니터에 알 수 없는 코드가 나타났다. 코드는 빠르게 올라가더니 이내 익숙한 문자를 만들어 냈다.
[SUCCESS] read :
>> 찾았다.
누군가 필승의 서버에 접속해 문자를 보내오고 있었다.
“뭐야 시X.”
몸을 급하게 일으킨 필승은 해당 창을 꺼 보려 했지만 먹통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서버 권한을 빼앗겨 버렸다.
다급해진 필승은 며칠 전 백업해 두었던 버전을 떠올렸다.
서버를 되돌리면 백야가 새로 뽑았다던 급 스킬이 사라지겠지만, 통제 권한을 빼앗기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 판단했다.
해당 버전을 찾아 롤백을 진행하려는 순간, 새로운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컴퓨터의 전원이 차단됐다.
>> 방해하지 마.
그 순간 컴퓨터가 폭발하며 불길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