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7화
* * *
뮤직 스테이 대기실.
내몰리듯 소파 구석에 앉아 있는 백야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애써 다른 곳을 보는 시선은 흔들리고 있었다.
빠안-
바로 옆에서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는 청 때문이었다.
햄스터 관찰하기는 최근 청에게 새로 생긴 취미였다.
“버, 벌써 시간이…! 나 금일이 챌린지 찍어 주기로 했는데.”
“같이 가.”
“아니야. 금일이가 나만 오라 그랬어. 너는 쉬고 있어.”
어색한 연기로 청을 떼어 놓은 백야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어디 가?”
그러나 이번에는 율무가 손목을 그러쥐며 멈춰 세웠다.
“금일이 컴백해서 챌린지 찍어 주기로 했어.”
“같이 가.”
데자뷔인가.
대기실 한 번 벗어나기가 개인 외출만큼이나 힘들었다.
“안 돼.”
“왜? 나도 금일이랑 친해.”
“남경이 형 말 못 들었어? 회사에 이상한 소문 돈다고 너랑 붙어 다니지 말래.”
“소문? 무슨 소문.”
율무는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얘한테는 안 알려 줬나?’
입술을 달싹이던 백야는 난감한 얼굴로 대답을 삼켰다.
차마 ‘네가 나한테 차여서 울었대’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오해를 받았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쟤랑 나랑?’
대체 평소에 무슨 생각들을 하고 사는 건지.
일상생활은 가능한 거야?
곧 선배가 될 예정인 개복치는 벌써부터 꼰대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뭔데? 말해 줘.”
“몰라. 남경이 형한테 직접 물어봐.”
율무의 손을 떼어 낸 백야는 도망치듯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BB9의 대기실을 향해 가는데, 마침 맞은편에서 금일이 매니저와 함께 걸어오는 게 보였다.
“어? 애기~ 왜 혼자 돌아다녀?”
“나 갈래.”
백야가 홱 돌아서자 금일이 얼른 달려와 팔을 붙잡았다.
“미안! 미안. 안 할게. 백야 왜 혼자 돌아다녀?”
“챌린지 찍어 달라며.”
“아휴. 대기실에 계셨으면 제가 모시러 갔을 텐데. 지금 가는 길이었거든.”
금일이 아부하며 백야의 어깨를 주물렀다.
“어디서 찍을 건데?”
“저기 계단에서.”
방송국마다 챌린지나 단체 사진을 찍는 핫플이 있었는데, 지금 향하는 곳도 그중 한 곳이었다.
다행히 선객이 없어서 금방 촬영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무 알아?”
“챌린지 영상 대충 보기는 했는데 한 번만 봐 줘.”
매니저가 음악을 재생하자 백야가 급하게 딴 안무를 선보였다. 이번 BB9의 컴백 곡은 락킹 사운드의 밝고 청량한 야구부 콘셉트였다.
후렴구가 나오자 금일을 등지고 선 백야가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양발을 엇박자로 들썩거렸다.
B급 댄스 스킬을 끼고 있지만 <갓끼>가 더해져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뭐야. 왜 이렇게 잘해?”
“괜찮아? 안무 따는 게 느려서 연습했어.”
자신을 위해 따로 연습까지 해 왔다는 말에 금일은 감동했다.
“바로 찍어도 될 것 같은데?”
금일의 부탁에 매니저가 촬영을 시작했다. 게스트인 백야는 금일보다 한 걸음 앞에 서서 안무를 시작했다.
백야가 렌즈를 보며 방긋방긋 웃자, 촬영을 하던 매니저의 광대도 천천히 올라갔다.
씹덕이란 것이 폭발하고 있었다.
‘저 형 왜 저렇게 좋아해?’
춤을 추던 금일은 매니저의 표정을 보고 웃음이 터질 뻔했다.
마지막은 금일과 백야가 하이파이브를 하며 어깨를 부딪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리허설대로라면 여기서 끝이었지만, 금일이 갑자기 허리를 굽히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에 백야도 따라 인사하며 허리를 숙이자 예정에 없던 인사 배틀이 시작됐다.
90도 가까이 허리를 숙인 겸손한 자세의 금일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큰절을 올리는 시늉을 했고, 이에 백야도 지지 않으려는 듯 납작 엎드리는 바람에 우스운 영상이 탄생했다.
“아이고~! 귀하신 분이 어찌 이런 누추한 바닥에…!”
“그만 일어나.”
매니저의 중재에 금일이 백야를 얼른 일으켜 세웠다.
너희 멤버들이 보기라도 하면 큰일 난다는 호들갑도 잊지 않았다.
“복숭아 바닥에 떨어뜨렸다고 애들이 안 빌려주면 어떡해.”
“오버하지 마. 영상은 잘 찍혔어요?”
금일의 장난이 낯부끄러웠는지 백야는 화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이후로 세 번 정도 촬영을 더 진행했지만, 첫 번째로 찍은 영상이 제일 마음에 든다며 해당 영상을 업로드하기로 했다.
“뭐 먹을래? 내가 쏠게.”
“그럼 제일 비싼 거로 먹어야지~”
백야와 금일이 방송국 지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
연예계 가십에 귀가 밝은 금일은 매점으로 가는 내내 최근 가장 흥미로웠던 소문 베스트 5를 들려주었다.
혈기 왕성한 나이답게 주로 누구랑 누가 사귄다더라 하는 연애 소식이 대부분이었다.
“대체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거야?”
“4층 복도 끝에 막다른 데 알지? 세트 장비 쌓아 두는 곳.”
“응.”
“거기가 비밀 연애 만남의 장소거든. 거기서 그렇게들 걸린다더라.”
“그렇구나.”
“어라? 반응이 이게 끝?”
제 한 목숨 건사하기도 힘든 개복치에겐 시시콜콜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런 거 말고 다른 재밌는 얘기는 없어?”
“이게 재미없으면 대체 뭐가 재미있지?”
금일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백야를 내려다봤다.
“음…. 사주? 나 타로랑 사주 진짜 잘 보는 데 알아.”
금일은 할 말을 잃은 듯 냉정하게 시선을 돌렸다.
“야. 그냥 우유나 골라.”
“진짠데…. 근데 다섯 개 더 사도 돼?”
백야가 금일을 빤히 올려다봤다. 멤버들을 가져다주려는 것 같았다.
“사, 사.”
“아싸.”
백야는 신이 나서 음료를 품에 한아름 안은 채 돌아왔다.
“근데 너 아직도 포기 못 했냐?”
“조용히 해.”
“자기만 우유 고른 것 봐. 다른 애들은 크지 말라고. 이야~ 인성 무슨 일이냐.”
“사장님 계산해 주세요. 야, 계산해.”
음료에 과자까지 얹어 금일의 주머니를 탈탈 턴 개복치는 다시 대기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 야, 맞다. 나 너한테 말해 줄 거 있었는데. 와 씨. 이걸 왜 까먹고 있었지?”
“뭔데?”
“박하랑 말이야.”
달갑지 않은 이름에 백야가 인상을 찡그렸다.
“들어 봐. 며칠 전에 연습생 출신 너튜버가 연생 생활 후기? 이런 거 올렸는데 너희 회사 애더라고. 너도 아는 애인지는 모르겠는데.”
“나 회사에 친한 사람 별로 없어. 연습생 중에서는 지호 정도?”
백야는 자기를 친형처럼 따르고 잘 챙겨 주는 지호가 생각났다.
며칠 전 회사에서 마주쳤는데 저보다 한 뼘은 더 자라 있는 키에 상당한 배신감을 느꼈다.
“아무튼. 걔가 연습생 때 자기를 엄청나게 괴롭히던 친구가 있었는데, 월말 평가 망치게 하려고 일부러 다치게 해서 실제로 회사 나간 애들도 있고 그랬대. 근데 그게 박하랑이라는 말이 있더라.”
“에이. 아무리 싫어도 그렇게까지 몰아가는 건 좀….”
“야. 우리 처음 스페셜 스테이지 할 때 기억 안 나? 걔가 너한테만 꼽주고 어깨빵 했잖아.”
“그랬나…?”
시스템의 암살 시도에 비하면 하랑의 열등감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라 잊고 있었다.
“그 사람 나름 팬이 있었나 봐. 지금은 데뷔했고 회사에서 제일 오래 연습한 연습생이라던데. 그럼 걔 아니면 민성이 형이잖아.”
“죽을래? 민성이 형은 절대 아니야.”
“알지. 그러니까 박하랑 같다고.”
전 연습생의 발언에 ID에서 가장 오래 연습한 민성과 ID 연습생 출신이었던 하랑이 언급되는 중이라고 했다.
마음이 불편해진 백야는 멤버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고마워. 형도 알고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어느새 대기실에 도착한 백야는 금일과 헤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MC 리허설을 마치고 돌아온 민성이 수정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건 뭐야?”
“아. 금일이가 챌린지 도와줘서 고맙다고.”
테이블 위에 음료를 내려놓자 멤버들이 달려들어 제 취향의 음료를 쏙쏙 골라 갔다.
백야는 개중 따뜻한 유자차를 집어 민성에게 건네주었다.
“이 여름에 쪄 죽겠다, 야.”
“형 감기 걸렸잖아.”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던데, 요즘 잔기침을 달고 사는 민성이었다. 병원에 다녀오라고 해도 괜찮다는 말로 안 가고 버티고 있었다.
“땡큐.”
유자차를 받아 든 민성은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 백야의 모습에 거울 속 개복치를 지그시 바라봤다.
“잘 찍었어?”
“응. 그런데 형, 아니다. 저녁에 숙소 가서 이야기해.”
“뭔데 그래.”
“별거 아니야.”
그때 다가온 유연이 백야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지그시 잡아당겼다.
“형. 잠깐만 빌릴게.”
“오냐. 곱게 쓰고 돌려놔라.”
적절한 타이밍에 구원의 손길을 받은 백야는 그를 따라 다시 대기실 밖으로 나섰다.
“왜?”
“왜에? 오늘 같이 스킬 바꾸기로 했잖아.”
유연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사생이 숙소를 습격했던 날, 백야는 유연에게 붙잡혀 스킬에 대해 하나씩 설명해 줘야 했다.
개중 유연이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스킬은 <마약왕(R)>과 <연기 웅덩이(C)>.
사실 패시브 스킬들을 제일 극혐했으나 그건 백야도 자신의 의지로 끼고 있는 게 아니었다.
“숙소에서 하는 거 아니었어?”
“나 이거 끝나고 바로 출국이잖아. 전시회.”
명품 브랜드 C사의 앰버서더를 맡고 있는 유연은 일본에서 열리는 전시회 참석으로 인해 오늘 하루 숙소를 비울 예정이었다.
“아, 맞다. 그럼 다녀와서 해도 돼. 급한 거 없는데?”
“네가 제일 급한데 무슨 소리야.”
<마약왕> 같은 걸 끼고 있으면서 저런 태평한 소리라니.
유연은 제가 없는 사이 지한과 둘이 뽑기를 돌릴까 봐 불안했다.
“일단 <마약왕>부터 해결하자. 이름이 불길해서 안 되겠어.”
백야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스킬의 기능은 스킬 명에 충실한 편이었다.
마약이라는 것 자체가 강한 중독 증세를 일으키니, 백야에게만 도가 지나친 사생들이 꼬이는 것도 그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대로 계속 내버려 뒀다간 언젠가 백야가 마약 스캔들에 휘말려 정말로 왕이 되어 있을 것 같았다.
“아…. 근데 그건 이미 없는데?”
“뭐?”
걸음을 멈춘 유연이 순간 정색을 하며 백야를 바라봤다.
강렬한 눈빛에 주눅이 든 개복치는 유연의 눈치를 보며 변명했다.
“아니이…. 내가 생각해도 조금 별로인 것 같아서. 그리고 이건 너희랑 약속하기 전에 벌어진 일인데….”
<마약왕>을 버린 건 사생이 경찰에게 인도되기 전이었고, 스킬을 바꿀 때는 멤버들과 상의하고 바꾸겠다고 약속한 건 그다음이었으니까.
백야를 말없이 보기만 하던 유연은 한참이나 지나서야 대답했다.
“그래서. 이번엔 뭔데?”
“씹….”
<씹덕 버프(S)>를 말하려던 백야는 순간 떠오른 알림창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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