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4화
* * *
독방에 갇힌 두 명의 호구는 서로를 힐끔거리며 탐색했다.
[율무 : …저기요.]
[백야 : 네?]
앉은 자리에서 통 튀어 오른 백야는 깜짝 놀란 얼굴로 뒤를 바라봤다.
[율무 : 제사 드렸어요?]
[백야 : 아니요. 여기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시던데….]
30분째 감금되어 있던 율무는 이미 한차례 교육을 들은 뒤였다.
돈을 쓰는 만큼 조상님께서 좋은 옷을 입으시고, 좋은 음식을 드시게 되어, 그 복이 오롯이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정신 세뇌 교육을.
[율무 : 혹시 얼마짜리 생각하고 계세요?]
[백야 : 저는 그냥 5천 원만….]
사실 5천 원도 아까웠지만 그마저도 내지 않는다면 제 소지품을 돌려받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율무 : 5천 원이요?]
율무는 적은 액수에 놀란 듯 잠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율무 : 그럼 밥에 물만 말아 드실 텐데. 반찬은 못 먹는데….]
이 사람은 뭐지? 한패인가?
백야의 경계 어린 시선이 율무를 향했다.
큰 체격에 단단한 몸. 구릿빛 피부의 강아지 같은 얼굴의 남성은 자기가 덤벼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상대를 봐 가며 덤빌 줄 아는 현명한 눈새는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백야 : 하! 하! 그러시구나….]
[율무 : …….]
너무 오버했나. 율무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실장이 들어와 교육을 시작했다.
정성이 들어간 제사를 올려야 조상님께서 더 좋은 상을 받아 보실 수 있고 어쩌고저쩌고….
율무는 한차례 교육을 들은 뒤였지만 어째서인지 두 번째 수강을 하고 있었다.
단 한 번의 강의만으로 질문하는 족족 정답을 맞혀 대 실장님께서도 기뻐하셨다.
[실장 : 조상님께서 너무 흐뭇해하고 계세요.]
조상님과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는지 실장은 말끝마다 조상님을 운운했다.
[율무 :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형은 그걸 또 믿었다.
백야는 그냥 5천 원을 기부하고 얼른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쯧. 이래서 눈치 없는 사람은 안 된다니까.’
속으로 율무를 흉보던 백야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백야 : 저기요, 실장님. 저는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 얼른 제사만 드리고 가 봐야 하는데….]
[실장 : 아. 그럼 지금 바로 법당으로 이동할까요? 지금쯤이면 제사가 끝났을 거예요.]
가여운 희생양이 저희 말고도 또 있던 모양이다.
작은 교실에서 30분이나 갇혀 있었던 백야는 드디어 답답한 공간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도망가고 싶었지만, 자신의 옷과 핸드폰이 인질로 잡혀 있어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법당 안으로 들어선 두 명의 호구들.
실장은 얼마짜리의 초를 내어 주면 되겠느냐 물었다.
[백야 : 제가 현금을 안 들고 다녀서 5천 원밖에 없는데요….]
백야가 쭈뼛거리며 카드 지갑에 들어 있던 5천 원을 내밀었다. 타코야끼를 사 먹으려 남겨 둔 비상금이었다.
[실장 : 카드도 돼요.]
젠장. 카드는 생각도 못 했는데.
[실장 : 이왕 하시는 거 5만 원짜리 하세요. 그래야 내년에 좋은 대학교 가죠.]
[백야 : 아…. 카드….]
‘싫다’고 말할 용기가 부족했던 백야는 자신의 카드를 내려다보며 머뭇거렸다.
[실장 : 현금 내셨으니까 차액만 계산해 드릴게요.]
[백야 : 어…. 그런데 제가 아직 용돈을 못 받아서 그만한 돈은 없을 텐데….]
[실장 : 한번 긁어 볼게요.]
백야의 손에서 카드를 가져간 실장은 리더기에 꽂으며 금액을 입력했다.
띠릭-
그러나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승인 거절 안내가 떴다.
[실장 : 정말 없네. 그럼 3만 원짜리도 있는데, 그걸로 하시겠어요?]
어떻게든 어린애의 지갑을 털어 보겠다는 의지가 대단했다.
[백야 : 네에….]
호구는 이번에도 거절하지 못했다.
초조한 듯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이번에도 승인 거절이 뜨길 기대했다.
띠릭-
[백야 : 오옥!]
조상신께서 제가 불쌍해서 도와주신 게 아닐까?
한 번 더 들려오는 승인 거절 알림에 백야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백야 : 도, 돈이 없나 봐요.]
백야가 카드를 돌려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실장은 만 원짜리도 있다며 카드를 한 번 더 긁었다.
지독한 사람.
[백야 : 네에….]
광기 어린 눈빛에 기선을 제압당한 백야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띠리링-
[실장 : 아. 됐네요.]
승인이 거절될 때마다 표정이 굳어지던 실장은 그제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카드를 돌려주었다.
이곳에서 무사히 탈출한다고 해도 잔고가 부족해서 떡볶이는 못 먹을 것 같았다.
우울해진 백야는 시무룩한 얼굴로 카드를 받아 들었다.
[백야 : 감사합니다아….]
현금 5천 원과 카드 결제 만 원.
신선고 전교 1등은 사이비 단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 도합 1만 5천 원을 뜯겼다.
다음은 한국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학생들만 모아 놨다는 한국대학교에 재학 중인 율무였다.
[실장 : 얼마 하시겠어요?]
[율무 : 50만 원이요.]
[실장 : 역시 똑똑한 학생이라 그런가 수업에 대한 이해도가 월등히 높네요.]
입을 쩍 벌리며 경악하는 백야와 달리 실장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똑똑하긴 개뿔! 여기서 제일 멍청하구만!’
백야는 저 키만 큰 대학생 형이 불쌍했다.
[율무 : 그런데 카드가 바지에 들어 있어요. 현금만 꺼내 와서.]
[실장 : 괜찮아요. 바지에 있다고요? 저희가 가져올게요.]
[율무 : 네.]
실장이 카드를 가지러 간 사이, 백야는 율무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겼다.
이 한심한 형에게 여기서 돈을 쓰면 안 된다고 알려 줘야 할 것 같았다.
[백야 : 저기요… 형.]
[율무 : 네.]
[백야 : 여기 이상한 곳 같아요. 돈 쓰지 마세요.]
율무는 무심한 눈빛으로 백야를 내려다봤다.
[백야 : 아무래도 사이비 같아요.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고요.]
그러나 율무는 대답이 없었다.
‘틀렸어. 이 형은 완전히 넘어갔어.’
저 혼자라도 튀어야겠다 결심한 백야는 실장의 뒤를 눈으로 좇았다.
다행히 교육을 받던 곳과 달리 법당은 트여 있어서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볼 수 있었다.
실장이 향한 곳은 상담실이었다.
[백야 : 후우….]
‘오케이! 옷과 핸드폰은 과감히 버린다.’
동선을 확인한 백야는 힘차게 현관문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한 걸음 내딛기 무섭게 뒷덜미가 잡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백야 : 왜, 왜 이러세요?]
겁먹은 백야가 율무를 경계하며 바들바들 떨었다.
[율무 : 가만히 있어.]
역시! 네놈도 한패였구나!
선뜻 50만 원을 부른 걸 보니 자신을 부추기기 위한 바람잡이였던 게 틀림없었다.
[백야 : 누나아…. 끕.]
짧은 순간 오징어 배에 팔려 가는 상상까지 마친 백야는 눈가가 촉촉해지며 눈물이 차올랐다.
하찮은 눈코입이 일그러지자 율무는 조금 당황한 듯 백야를 놓아주었다.
[율무 : 미안. 가만히 있어. 데리고 나가 줄 테니까.]
데리고 나가 준다고…?
한패가 아니야?
백야가 율무를 빤히 바라보자 그는 머쓱한 듯 고개를 돌렸다.
[율무 : 네 카드를 자꾸 긁는 거 보니까 이상해서 일부러 그랬어.]
이상한 걸 이제야 알았다니!
눈치가 더럽게 없는 형이었다.
그래도 그가 각성한 덕분에 동료를 얻은 백야는 조금 든든해졌다.
* * *
그 시각 설백야의 집.
대학로를 세 바퀴나 돌았음에도 백야를 찾을 수 없었던 재욱은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재욱 : 큰일 났어요! 백야가 납치를 당한 것 같아요!]
[아영 : 뭐? 애기가 납치를 당했다고?!]
[주석 : 내, 내 새끼…! 백야야악! (눈물)]
[한별 : 아빠 울지 마. 이럴수록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해.]
[지은 : 감히 내 새끼를 건드려? 다 죽었어. 어디야.]
당근을 썰고 있던 지은은 그대로 식칼을 든 채 현관으로 향했다.
[재욱 : 아, 아줌마! 칼…!]
[지은 : 왜. 하나는 부족할까?]
그 말이 아니잖아욧!
재욱은 울고 있는 주석과 전투 의지로 활활 타오르는 중인 설가네 세 여성을 바라봤다.
[재욱 : 가는 길에 신고라도 당하면 큰일 나니까 일단 그건 내려놓으시고, 적당한 걸로 들고 가요.]
세 여성은 합의 끝에 야구 방망이와 골프채, 무선 청소기를 들고 집을 나섰다.
코를 훌쩍거리던 주석은 효자손을 들고 뒤를 따랐다.
[아영 : 야. 타.]
지하로 내려가자 아영이 운전석에 올라타며 조수석을 가리켰다.
그녀가 옆구리에 끼고 있는 야구 방망이가 무서웠던 재욱은 냉큼 달려가 옆자리에 올라탔다.
[재욱 : 원래는 정문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갑자기 절을 하고 오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잠자코 재욱의 이야기를 듣던 한별은 짚이는 게 있는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흥분했다.
[한별 : 그 사이비 새끼들이 범인이었어?! 언니, 정문으로 차 돌려!]
한별은 최근 학교 앞에서 알짱거리는 사이비 무리가 있는데 그들이 데려간 게 틀림없다고 했다.
[한별 :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그렇게 한별의 지휘 아래 각자 역할이 주어졌다.
[한별 : 너는 미끼다.]
재욱을 재물 삼아 그들의 본거지를 알아내는 계획이었다.
친구와 떡볶이를 먹으려다 졸지에 미끼가 된 그는 잠시 후 정문 앞에 버려졌다.
[재욱 : …….]
멍청하게 서 있으면 그들이 접근해 올 거라던 한별은 근처에서 가족들과 잠복을 하고 있겠다 했다.
[재욱 : 하…. 이게 뭔….]
[대학생1 : 안녕하세요~]
‘정말 이게 될까?’를 고민하는 사이, 대학생1이 홀로 있는 재욱에게 접근했다.
[재욱 : 이게 되네.]
[대학생1 : 네?]
[재욱 : 아니에요. 무슨 일이신데요?]
[대학생1 : 혹시 백야 씨 친구분이세요?]
재욱의 눈이 커다래졌다.
[대학생1 : 맞구나~ 백야 씨가 친구분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데려와 달라고 했거든요.]
[재욱 : 걔 지금 어디 있는데요?]
[대학생1 : 같이 가실래요?]
웬일로 일이 쉽게 풀렸다.
힐끔 뒤를 돌아본 재욱은 풀숲에 숨어 있는 설가네를 확인하곤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욱 :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