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5화
* * *
한편 재욱과 가족들이 찾으러 오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백야는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실장 : 형제님, 바지에 카드가 없던데요?]
[율무 : 거기에 둔 것 같았는데. 제가 찾아볼게요.]
[실장 : 아니, 그건 좀….]
율무가 움직이려 하자 실장이 앞을 막아서며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그는 그가 법당을 나서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았다.
[율무 : 제일 좋은 패키지로 할게요. 한 번 드리는 거 제대로 해 드리고 싶어요.]
그에 율무는 가격을 높였다.
호구의 통 큰 씀씀이에 화색이 돈 실장은 몸을 비켜서며 태도를 바꿨다.
[실장 : 그럼 같이 가실까요? 어린 형제님은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백야 : 저, 저만요?]
이렇게 되면 율무가 자신을 버리고 혼자 도망갈지도 모른다.
버려진다는 생각에 눈이 휘둥그레진 백야는 다급히 율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꼬옥-
그리곤 눈썹 끝을 내리며 애처롭게 그를 올려다봤다.
[백야 : 혀엉…. 같이 가요….]
제가 돌보던 새끼 고양이 같은 얼굴에 율무의 동공엔 지진이 일었다.
[율무 :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실장 : 저분은 왜…? 원래 알던 사이세요?]
[율무 : 아니요. 제가 얘 거까지 계산할게요.]
율무는 ‘아까 하고 싶은 패키지 있었다고 했잖아.’라고 말하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백야 : 네? 네에….]
[실장 : 그래요? 어떤 건지 알려 주시면 그걸로 준비해 드릴게요.]
[백야 : 그게….]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여기서 대답을 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백야 : 가서 봐야 할 것 같아요. 아까 보여 주신 그 책자….]
어떻게든 법당을 벗어나야 했다.
백야의 대답에 망설이던 실장은 안쪽에 달린 도어 록을 해제하며 두 사람을 밖으로 이끌었다.
[실장 : 결제만 하고 바로 제사 드릴 수 있게 준비해 드릴게요. 이쪽으로.]
그는 두 사람을 앞장세워 상담실이 있는 곳으로 몰았다.
그런데 그때, 백야가 처음 들어왔던 문이 열리며 대학생1과 재욱이 나타났다.
[재욱 : 어? 야, 한백야!]
[백야 : 재, 재욱아…!]
옷자락을 잡고 있던 손을 금방 팽한 백야는 재욱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실장이 앞을 막아서며 백야가 현관문 쪽으로 가는 걸 방해했다.
[실장 : 잠시만요. 친구분이랑은 이따 만나게 해 드릴 테니까,]
벌컥-
그때 천천히 닫히던 현관문이 열리며 잠복조가 등장했다.
[아영 : 미끼. 수고했다.]
[한별 : 애기야!]
[지은 : 내 새끼 내놔! 이 잡것들아! 당장 그 손 안 떼?!]
완전 무장한 채 들이닥친 설가네 여성 3인방은 ‘당장 애기를 내놓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며 허공에 무기를 휘둘렀다.
[백야 : 엄마아…. 누나…!]
실장이 당황한 틈을 타, 그를 홱 밀어 버린 백야는 율무의 손목을 잡아채 엄마와 누나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아영 : 애기,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옷은 또 이게 뭐야.]
[백야 : 누나아….]
백야가 아영의 허리를 안으며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한별 : 율무 선배?]
한편 한별은 율무와 아는 사이인 듯 그를 알아보곤 황당해했다.
[한별 : 선배가 왜 여기에 있어요?]
[율무 : …….]
저 형이 저보다 먼저 와 있었다는 증언에 율무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허공을 방황하는 시선이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별 : 과에서 공지 내려온 거 못 보셨어요? 학교 앞에 사이비 단체가 어슬렁거리니까 조심하라고.]
[율무 : 그게…. 고양이가….]
[한별 : 뭐라는 거야. 아오, 답답해! 말 좀 빨리할 수 없어요?]
[백야 : 누나, 저 사람들이 내 옷이랑 핸드폰 가져갔어. 내 돈도…. 힝.]
애기의 코 묻은 돈까지 빼앗아 갔다는 말에 한별의 눈알은 끝내 돌아 버렸다.
평소엔 얌전하지만 한번 이성을 잃으면 미친개가 되어 버리는 그녀는 실장을 향해 골프채를 겨눴다.
[한별 : 이런 씨 발라 먹을 놈들을 봤나. 조용히 돌려주실래요 아님 저랑 더럽게 얽혀 보실래요?]
나이스 한 개새X의 협박에 실장은 두 손을 어깨 옆으로 올리며 순순히 항복했다.
[실장 : 돌려드릴게요.]
[한별 : 잠깐. 돈도 돌려주셔야지. 애기 얼마 뜯겼다고?]
[백야 : 만 오처 넌….]
[한별 : 만 오천 원? 그럼 이자까지 쳐서 15만 원.]
[실장 : 아니, 그런 계산법이 어디 있습니까?]
기적의 계산법에 실장이 발끈했다.
탁!
그러나 지은이 청소기를 바닥으로 내리치자 실장은 흠칫 몸을 떨었다.
[지은 : 누가 더 잘못했는지 따져 봐? 불법 단체가! 내 새끼한테! 공갈 협박까지 했는데! 내 새끼 정신적 피해 보상으로 10배면 싼 거지. 안 그래?]
깡패가 따로 없었다.
* * *
마지막 신을 남겨 둔 백야는 안색이 창백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들뜬 호흡.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에 주변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걱정이 쏟아졌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네. 요즘 스케줄이 많아서 조금 피곤한가 봐요. 숙소 돌아가서 쉬면 돼요.”
바닥에 쪼그려 앉은 백야는 이마를 짚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 게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큰 체력이 소모됐다.
[스트레스 : 70%]
이대로 3번만 더 촬영이 지체된다면 백야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왜 이렇게 됐지?’
확실한 건 율무는 NG를 내지 않았다.
다만 야외 촬영인 만큼 주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유독 율무가 함께하는 신에서 자동차가 경적을 울린다든가, 가만히 있던 소품이 떨어진다든가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시스템은 그마저도 율무의 실수로 간주하는 듯했다.
‘아…. 죽겠다.’
촬영이 중단될 때마다 스트레스 지수는 10씩 올라갔고, 허약한 몸뚱어리는 피를 쏟아 냈다.
지금도 한쪽에서는 한별과 율무의 신이 한창이었다.
[한별 : 우리 애기는 몰라도 선배는 나이가 몇인데 이런 델 따라와요? 선배도 돈 뜯겼어요?]
[율무 : 아니….]
[한별 : 그럼 다행이고. 아깐 너무 열이 받아서 선배까지 챙길 정신이 없었는데. 선배도 뭐 뺏긴 거 있어요?]
[율무 : 아니….]
[한별 : 집에는 혼자 갈 수 있죠?]
[율무 : 응….]
다소곳이 손을 모은 율무는 한별에게 혼나고 있었다.
‘곧장 집으로 가라’는 잔소리와 함께 율무가 뒤를 도는 일만 남은 상황.
율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도는데, 순간 한별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재채기를 하며 NG가 났다.
“에취! 헉. 죄송합니다.”
그 순간 백야의 스트레스 지수가 10% 상승하며 80이 되었다.
“우웁.”
남경이 챙겨 준 간이 의자에 앉아 겨우 안정을 취하던 백야는 순간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피를 토했다.
“커흑. 우욱.”
“꺄아악! 백야야!”
곁에 있던 지은이 가장 먼저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자, 옆에서 백야에게 손 선풍기를 대 주고 있던 남경도 사색이 돼 소리쳤다.
“백야야! 119! 119 좀 불러 주세요!”
[<병약미> 패시브와 반응해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킵니다.]
[촬영장을 벗어나면 <최고의 서포터!>는 자동으로 실패 처리됩니다.]
“커흑. 혀, 혀엉. 율무….”
피를 게워 내자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고였다.
흐린 시야 속, 분주해진 스태프들 사이를 헤치며 달려오는 율무가 보였다.
“백야야, 정신 차려 봐. 한백야!”
“유, 율무….”
그 순간 달려온 율무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백야의 몸을 받쳤다.
“배, 백야야. 왜 그래? 아아…. 어떡해, 나 때문이야. 내가 NG 안 내기로 했는데, 나 때문에….”
백야가 피를 흘리는 모습이 충격이었는지 율무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율무야 일단 떨어져. 재욱 씨, 율무 좀.”
남경의 부탁에 재욱과 스태프들이 율무를 붙잡으며 말려 보려 했지만, 그는 거세게 뿌리치며 백야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미안해, 흐으…. 백야, 끄흡. 형, 구급차는? 구급차 언제 오는데!”
카메오였지만 생글생글 웃으며 촬영장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하던 율무가 소리를 지르자 모두들 놀란 눈치였다.
그때 백야가 율무의 옷깃을 움켜쥐며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미, 친 놈아…. 조용히….”
다 죽어 가는 얼굴로 희미하게 웃던 백야는 ‘촬영 남은 거…’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피를 토해 냈다.
[스트레스 지수가 ‘심각’ 단계입니다. 90%]
스트레스 지수가 90을 찍자 이제는 숨을 쉬는 것도 버거웠다.
백야가 피범벅이 된 얼굴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사이, 몇몇은 몰래 백야의 모습을 촬영해 지인에게 전송했다.
“허억. 헉.”
“조금만 참아. 조금만. 제발….”
눈물로 범벅이 되어 시야가 흐렸지만, 율무는 품 안에서 백야를 놓지 못했다.
“형, 언제 온대? 오고 있대? 왜 이렇게 안 오는데에! 이러다 얘 잘못되면 어떡해?”
“하아…….”
남경도 애가 타는 건 마찬가지였다.
몸이 약한 건 알았지만, 최근까진 누구보다 건강했던 백야였기에 상태가 갑자기 나빠질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멀리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구급차가 보였다.
“차 와요! 비켜 주세요!”
한 스태프의 외침에 홍해가 갈라지듯 백야의 앞으로 길이 만들어졌다.
다가온 구급 대원은 피로 범벅이 된 환자의 상태를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어쩌다 다치셨어요? 부상이 심한가요?”
“피곤해하더니 갑자기 피를 토했어요. 몸도 뜨겁고….”
남경이 백야의 상태를 설명하는 사이, 한쪽에선 응급조치가 취해졌다.
초인적인 힘으로 의식을 붙잡고 있던 백야는 구급차가 도착하기 직전에 실신했다.
처참한 몰골과 달리 맥박은 비교적 안정적인 상태라 대원은 곧장 들것에 옮기며 보호자의 동행을 요청했다.
“나도 갈래. 형, 나도 데려가. 제발.”
율무의 애원에 남경은 마음이 약해질 뻔했으나 그를 데려가는 건 안 될 일이었다.
“덕진이 보내 줄 테니까 넌 여기에 있어. 네가 가면 눈에 더 띌 거야. 너한테 제일 먼저 연락할게. 응?”
율무를 겨우 달래 놓은 남경은 그대로 백야와 함께 인근의 응급실로 향했다.
낯선 촬영장에 홀로 남은 율무는 떨어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율무 씨….”
다가온 재욱이 잘게 떨리는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 주었다.
“괜찮을 거예요.”
투둑-
회색 시멘트 위로 짙은 눈물 자국이 퍼지는 걸 보니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남은 촬영을 이어서 감행할 수도 없는 상황에 감독도 난감했다.
그때 소매로 눈물을 훔쳐 낸 율무는 고개를 번쩍 들어 자신의 스타일리스트를 찾았다.
“누나, 나 다른 옷 있어? 똑같은 거.”
“있긴 한데… 그건 왜? 설마 이어서 하려고?”
“응.”
그 길로 곧장 감독에게 다가간 율무는 백야의 촬영이 어려울 듯하니 자신이 떠나는 걸 끝으로 에피소드를 마무리하는 게 어떻겠느냐 물었다.
“그래 주면 우리야 좋죠. 그런데 율무 씨 정말 괜찮겠어요?”
“안 괜찮아도 해야죠.”
마치 유언 같았던 한 마디가 마음에 걸려서 감히 퇴근하겠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율무는 그렇게 남은 신을 훌륭히 소화해 냈다.
눈이 퉁퉁 부은 탓에 메이크업으로 최대한 가려 보려 했으나 티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장면을 연결했을 때 이질감은 조금 들겠지만, 율무가 현장을 배려해 준 만큼 감독도 그를 배려해 줄 의무가 있었다.
여기까지가 최선이었다.
“율무 씨. 아직 매니저분 안 오셨죠? 제 차 타고 같이 가요.”
“아니에요. 저는 들를 곳이 있어서.”
촬영이 끝나자 재욱이 다가와 율무에게 동승을 제안했다.
그러나 호의를 거절한 율무는 스태프들이 말릴 새도 없이 인사를 남기곤 골목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