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8화
뭐야, 이거? 콜록, 콜록.
“여기는 어디…? 콜록, 콜록.”
백야가 기침을 하자, 목에 고여 남아 있던 피가 손바닥을 적셨다.
초월 번역이었다.
한편 세게 충격을 받은 멤버들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버렸다.
“Oh my god….”
“배, 백야야… 형이잖아. 정말 모르겠어? 율무랑 청이도 기억 안 나?”
기억이 안 날 리가 있나.
우주 먼지가 됐을 때도 가족들만큼이나 그리웠던 멤버들을 잊을 리 없었다.
그러나 시스템의 지배를 받는 입술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죄송해요. 모르겠어요….”
미치고 환장하겠네!
백야가 아무리 날뛰어 봤자 시스템은 그의 패시브인 <병약미>에 충실할 뿐이었다.
제가 말을 하면 할수록 쌓여 가는 오해에 개복치는 끝내 입을 닫기로 했다.
‘그냥 말을 하지 말자.’
* * *
그 결과 백야는 선택적 함구증과 부분 기억 상실 판정을 받았다.
“환자분. 여기가 어디인지 아시겠어요?”
“…….”
빠안-
백야는 대답 대신 의사를 뚫어지라 쳐다보기만 했다.
‘간단한 대답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럼 이분들이 누구인지는 알아보시겠어요?”
끄덕끄덕-
의사가 멤버들과 가족들을 가리키자 백야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은요?”
끄덕!
“세상에, 하느님. 감사합니다.”
엄마 복숭아는 안도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후 의사는 백야의 심박수와 간단한 것들을 체크하곤 뒤를 돌아 소견을 발표했다.
“충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대화를 나누셨다는 걸 보면 실어증은 아닌 것 같고, 심리적인 요인일 가능성이 크네요.”
응. 아니야.
“그러니 보호자들께서 평소처럼 잘 대해 주고 각별히 살펴 주세요. 그런데… 피를 토했다고요?”
“네. 깨어나자마자요.”
민성의 증언에 뒤를 돈 의사는 이번엔 백야의 입 안을 살펴보았다.
“흠…. 목에 남아 있던 게 나온 것 같은데. 일단은 오늘 밤까지 상태를 좀 더 지켜보시죠. 별다른 이상이 없다면 내일은 퇴원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병실 문 앞까지 따라가 인사한 남경은 속으로 생각했다.
‘기억 상실증이라는 게 사실은 흔한 건가?’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기억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의사의 말로는 깨어난 직후, 뇌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 그런 것일 수 있다며 안심시켰지만 남경은 영 찜찜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새벽부터 스케줄이 있어서요. 백야야 회사 일은 너무 걱정 말고, 이참에 푹 쉰다 생각하고 집에서 밥 잘 먹고 잘 자.”
남경의 걱정 어린 시선에 백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의 권유로 퇴원 후 백야의 거처가 숙소가 아닌 누나네 집으로 결정 났기 때문이다.
멤버들이 많이 아쉬워했지만, 그편이 백야의 회복에 나을 거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 때문에 곤란해진 건 오히려 백야였다.
‘활동 중단이라니? 숙소로 오지 말라니!’
필승의 잠적에 이어 상상도 못 한 전개에 개복치는 정신이 혼미했다.
현재까지 남은 포인트는 38.
퀘스트를 닥치는 대로 해도 모자란 마당에 숙소로 돌아갈 수조차 없다니.
조력자와 떨어지게 된 백야는 굉장히 초조해졌다.
“저… 어머님. 백야 스케줄과 복귀 시점에 관해서는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한창 바쁠 텐데 미안해서 어쩌죠?”
“어휴. 아니요. 오히려 저희가 더 죄송하죠. 믿고 백야를 맡겨 주셨는데…. 면목이 없습니다.”
남경은 사과를 드리며 백연의 눈치를 살폈다.
동생의 소식을 듣고 가장 크게 분노했던 백연이 지금도 이글거리는 눈으로 남경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야가 의식이 없는 동안, ‘애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무리하게 활동을 시켰다’며 당장 계약을 해지시키겠다고 하는 바람에 얼마나 진땀을 흘렸던가.
옆에서 ‘백야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지 않겠냐’며 말려 주던 지훈이 없었다면 지금쯤 백야의 탈퇴 기사가 보도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쪽에서 남경과 백연, 지훈, 어머니가 복잡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멤버들은 백야의 침대를 둘러싸고 작별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한백야, 아프지 마.”
“심심하면 문자 해.”
“진짜 우리 알아보는 거 맞지?”
지한과 유연, 민성의 말에 백야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미안.”
한편 율무는 백야가 깨어난 뒤로 더욱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네가 왜 미안해. 너도 많이 놀랐을 텐데.”
민성이 기가 죽은 율무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 주었다.
그러나 이미 자신 때문에 백야가 이렇게 된 게 틀림없다고 확신한 강아지는 고개를 들 생각이 없었다.
죄책감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먼발치에서 사과만 반복하자, 오히려 난감한 건 지켜보던 이들이었다.
‘왜 저렇게 기가 죽었지? 쟤는 깐족거릴 때가 나은데.’
설마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저러는 건가?
애초에 자기가 NG를 내면 안 된다는 것도 어떻게 알았는지 의문이었다. 이건 유연과 지한에게도 말한 적 없는 퀘스트였으니까.
가늘어진 눈이 율무를 향하자 넓은 어깨가 흠칫 떨렸다. 원망의 눈빛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미안.”
한편 옆에서 옷자락을 붙잡고 미련을 뚝뚝 흘리고 있던 청은 아빠 복숭아를 돌아보며 쭈뼛거렸다.
“저… 햄스터 아저씨. 스케줄 끝나고 보러 가도 돼요?”
“그럼요. 그래 주면 우리 백야도 좋아할 거예요. 그렇지?”
청이 힐끔거리자 백야는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눈을 번쩍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가 오면 되겠다! 너희도 같이 와!’
백야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지한과 유연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러나 둘은 알아듣지 못한 듯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햄스터어….”
오히려 간절한 눈빛에 저와 떨어지기 싫다는 것으로 오해한 청이 백야를 끌어안고 어리광을 부렸다.
토닥토닥-
솜 주먹이 등을 토닥이자 청이 코를 훌쩍거렸다.
“그럼 푹 쉬어. 가 볼게.”
청을 떼어 낸 민성이 멤버들을 챙기며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잠시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백야가 깨어나는 바람에 한참을 지체했다.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면세점 주최 콘서트에서 다섯 명 동선의 안무를 숙지하려면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잘 가라는 말 대신 힘차게 손을 흔들어 주던 백야는 병실 문이 닫히자마자 코피를 쏟았다.
주르륵-
때마침 뜬 업데이트 알람 때문이었다.
[알림!]
[v.1.5 업데이트]
‘뭐야? 아까 누른 줄 알고 쫄았는데 꿈이었어? 와, 다행이다.’
이불 위로 떨어지는 코피를 틀어막으며 손등으로 대충 닦아 내자, 누나와 엄마 복숭아가 기겁을 하며 달려들었다.
“백야야!”
“어머. 다시 선생님을…!”
팔 좀 흔들었다고 코피를 쏟은 것으로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며 고개를 도리질 쳐 보았지만, 이미 가족들의 눈에 백야는 건드리면 깨질 유리알 같은 존재였다.
“너는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했어야지. 어떻게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백연이 속상한 마음을 드러내며 백야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동그란 머리통이 기우뚱거렸다.
“내가 다치지만 말라고 했지.”
작게 뭉친 휴지를 코에 넣어 주자 백야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게 다 시스템 때문인데!’
누나에게 많이 혼나 봤지만 오늘이 제일 억울했다.
잔소리에 입술을 내밀며 반항하던 백야는 코가 막히자 숨을 쉬기 어려운지 입을 ‘하압!’ 크게 벌려 숨을 들이마시곤 다시 입술을 앙다물었다.
바람을 머금은 볼이 크게 부풀었다.
“뭘 잘했다고 귀여운 척이야? 오늘은 안 통해.”
제가요?
귀여운 척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지만 백야를 제외한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다.
‘이렇게 수치스러울 수가!’
부모님이 오신 콘서트에서 하트 3종 세트를 했을 때보다 더 부끄러웠다.
볼에 머금고 있던 바람이 순식간에 빠지며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살짝 찡그린 미간은 어이없어하는 얼굴이었지만, 가족들은 백야의 몸이 다시 나빠진 줄 알고 표정이 굳어버렸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도리도리-
고개를 저은 백야는 다시 침대에 누우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잠을 잘 거라는 나름의 의사 표현이었다.
제가 무언가를 할수록 상황이 더 나빠지는 것 같으니 차라리 잠을 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씹덕 버프>와 <병약미>의 상성이 좋아서 곤란했다.
“우리 애기 삐졌어? 엄마랑 누나가 걱정 많이 했어.”
아빠 복숭아가 안절부절못하며 백야를 달래 보려 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백연도 아차 싶어서 동생을 달랬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럼 엄마랑 아빠 갈까?”
그러나 엄마 복숭아의 말에는 반응했다.
간다는 말에 이불이 슬그머니 내려가더니, 눈만 빼꼼 드러낸 채 가족들을 바라봤다.
“가지 마?”
끄덕-
이불은 다시 올라갔다.
말을 하지 못해 오해가 쌓이는 건 답답했지만 가족들과 함께 있는 건 좋았다.
‘오랜만의 가족 상봉이 병원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루아침에 은쪽이가 된 백야는 이불 안에서 꼬물거렸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보는 중이었다.
‘과연 이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필승이 잠적한 뒤로 삶이 다섯 배 정도 고단해진 백야는 그가 간절했다.
계속해서 말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으니 필승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업데이트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최대한 미루고 싶은데…. 이대로 계속 안 돌아오시면 어떡하지? 아니야.’
그냥 필승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생긴 거라고 믿고 싶었다.
‘힝.’
한숨을 쉬자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근데 뭘 업데이트하겠다는 건지 내용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백야가 허공에 둥둥 뜬 상태창을 이것저것 눌러봤다.
그러다 발견한 업데이트 안내.
[v.1.5는 새롭게 추가된 기능을 업데이트합니다.
- NPC 오류 개선
- 서버 안정화 및 보안 강화]
NPC 오류?
순간 안 좋은 예감과 함께 소름이 머리끝까지 돋았다.
‘이건 절대 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