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1화
* * *
“아. 이분이요? 저희 가게 단골손님인데 최근엔 오신 적 없어요.”
“그래요? 그럼 혹시 이분이 나타나면 이 번호로 연락을 주실 수…,”
덕진이 점원에게 명함을 건네던 때였다.
부웅, 끼익-
붕, 끽!
맞은편 길가에 세워 두었던 검은색 밴이 아슬아슬한 후진과 전진을 반복하며 불안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뭐, 뭐야?”
율무가 있어서 시동을 켜 놓고 내리긴 했지만 분명 사이드 브레이크를 잘 걸어 놓았는데?
순간 종종 들려오던 차량 급발진 사고가 떠오른 덕진은 사색이 되어 카페를 뛰쳐나갔다.
부우웅-
그 순간, 보란 듯이 덕진의 앞을 지나 유유히 골목을 빠져나가는 차량에 덕진은 솜사탕 씻은 너구리가 되었다.
“…뭐야?”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던 덕진은 얼른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다행히 통화는 끊어지지 않은 듯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율무 님! 율무 님 괜찮으세요? 혹시 지금 운전하고 계신….”
잠깐만. 그나저나 율무한테 면허증이 있었던가?
그럴 리가.
팀에서 운전면허를 가진 자는 민성이 유일했다.
‘무면허 운전?!’
자신의 아티스트가 사회면 메인을 장식할 만한 범죄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덕진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러나 곧 수화기 너머로 다소 격한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미쳤어?!]
[닥치고 얌전히 있어. 협조 안 하면 어디 콱 처박아 버리려니까.]
율무에게 협박을 하는 괴한의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나, 나, 납치?!!’
덕진은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어머, 저기요! 괜찮으세요?”
카페 직원이 달려 나와 바닥에 쓰러진 그를 부축했다.
* * *
지잉, 지잉-
[발신자 : 율무 님(강아지)]
차 안에서 필승과 실랑이를 벌이던 율무는 뒤늦게 덕진을 떠올리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형. 그러니까 이게,”
[여보세요? 여기 성남 카페인데요. 가게 앞에서 방금 이분이 쓰러지셨거든요?]
“느에?!”
놀란 마음에 소리친 율무는 이내 필승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차를 도난당한 충격에 쓰러지신 것 같은데…. 일단 제가 경찰에 신고를,]
“아니요! 아니요. 제가 보호자께 연락을 드려 놓을게요. 죄송하지만 잠시만 맡아 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건 상관없지만….]
“그냥, 그, 길바닥에 버리지만 말아 주세요. 금방 사람 보낼게요.”
전화를 끊은 율무는 급하게 연락처를 뒤졌다.
그러나 남경에게 연락하자니 그는 다른 멤버들을 챙기랴, 저의 무단 행동을 수습하랴 정신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회사에 말할 수는….’
그러다 이 일에 아주 적합한 사람 한 명이 떠올랐다.
에임의 대환이었다.
[어.]
“형! 저 좀 도와주세요.”
[바빠. 끊는다.]
“백야! 당백이한테 중요한 일이에요. 형이 안 도와주면 걔 진짜 울고불고 난리 날걸요?”
[에이 씨…. 뭔데.]
백야를 들먹이자 대환의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그렇지 않아도 백야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돌연 누나네 집으로 퇴원을 해서 심기가 매우 불편한 상태였다.
남경에게 전해 듣기로는 충격으로 목소리를 못 낸다던데.
그 고운 음색을 다시는 듣지 못할 수도 있다는 스트레스에 최근 대환의 예민함은 극에 달해 있었다.
[쓸데없는 거면 죽는다.]
대환의 협박에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은 율무는 덕진이 쓰러진 장소를 알려 주었다.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야!]
백야를 들먹이며 한다는 부탁이 택시 기사 노릇이라니. 순간 열이 받은 대환이 크게 소리 질렀으나 통화는 이미 끊어진 뒤였다.
하극상도 이런 하극상이 없었다.
‘만나면 엄청 깨지겠네.’
이번 일로 회사에서 요주의 인물이 된 건 물론, 대환의 미움까지 사게 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으니. 바로 필승을 손보는 일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뭐야? 백야 그렇게 만든 거 네가 한 짓인 거 다 알아.”
율무가 적의를 드러내며 필승을 노려봤다.
그는 목적지도 알려 주지 않은 채 아까부터 무작정 차를 몰고 있었다.
율무는 ‘백야의 일만 해결되면 이 사기꾼 범죄자 새끼를 꼭 감방에 처넣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시선이 얼마나 뜨거운지 옆통수가 다 따끔거리던 필승은 인적이 드문 도로에 차를 멈춰 세웠다.
한순간도 경계를 풀지 않았던 율무는 그가 운전대에서 손을 떼자마자 안전벨트를 풀며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백야 원래대로 돌려놔. 안 그러면 너 곱게 못 돌아가.”
덩치만 큰 강아지가 아까부터 입질을 멈추지 않자 필승도 조금 난감했다.
‘반기지 않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그래도 눈앞에 나타나 준 것만으로 다행인 처지 아닌가?’
필승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다고 믿고 있는 백야와 달리, 개복치의 부하들은 필승을 희대의 나쁜 놈으로 간주한 지 오래였다.
자신의 컴퓨터를 해킹당한 뒤, 역해킹을 시도했다가 되레 미래의 자신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이들이 알 리 없었으니까.
‘그 사이코패스 새끼 때문에 내가 무슨 개고생을 했는데.’
필승은 조금 전의 발언이 제 얼굴에 침 뱉기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무튼 엄연히 따지면 자신도 백야만큼이나 피해자인데 죽일 놈 취급은 많이 억울했다.
순간 기분이 나빠진 필승은 주먹으로 운전대를 마구 내리치며 분노를 표출했다.
빠앙!
빵!
빵!
빠아아앙!
시끄럽게 울려 대는 경적에 율무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저 미친…!”
처음 보는 광기에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외진 곳이라 다행이지, 시내 한복판이었다면 꽤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 만한 미친 짓이었다.
달칵-
여차하면 도망갈 생각으로 율무가 문고리를 당겨 차 문을 살짝 열었다.
그렇게 몰래 퇴로를 확보한 순간, 동작을 멈춘 필승이 운전대에 머리를 박은 채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퀭한 시선이 율무를 옭아매듯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짜증 나네….”
“미친 새끼.”
“푸흐흐흐.”
율무의 대답이 우스운지 필승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몸을 뒤로 기대었다.
하지만 율무는 그가 미친놈이라 한들 개의치 않고 그를 향한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도와주는 척할 땐 언제고, 뒤통수를 쳐?”
“뒤통수? 아아~ 그치. 그거도 내가 한 거라면 내가 한 거지.”
필승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러다 주머니에서 낡고 구겨진 종이를 꺼내 율무의 다리 위로 툭 던져 주었다.
“일단 이거라도 갖다 줘.”
주어는 없었지만 이 물건이 필요한 사람이 백야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구겨진 종이를 펴 보자 조금 번지긴 했지만 쿠폰 번호 같은 것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근데 어떻게 살았지? 아. 무슨 아이템 같은 게 하나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의 사태는 필승이 <천재 아이돌> 칭호 활성화 조건을 없애려 무리를 하다 벌어진 일이었다.
“중간에 갑자기 그 새끼만 안 끼어들었어도 우리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자신도 끼어든 건 마찬가지였으나, 필승은 본디 내로남불이 지독한 사람이라 신경 쓰지 않았다.
“돌았냐? 알아듣게 말해.”
한편 율무는 아까부터 뜻 모를 소리만 중얼거리는 필승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언행은 거침이 없었다.
필승이 저보다 족히 다섯 살은 많을 텐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말하면. 네가 알아는 듣고?”
아마 아까부터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필승의 화법 때문일 탓이 컸다.
“그래서. 백야는 뭐 하고 있어? 걔가 죽으면 나도 곤란한데.”
“그게 네가 할 소리야?!”
율무가 발끈하며 다시 필승에게 달려들었다.
멱살이 잡힌 필승은 저항할 힘도 없는 듯 그가 흔드는 대로 짤짤 흔들렸다.
그러다 율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근데 왜 나를 원망하지? 그러게 내가 NG 내면 안 된다 그랬잖아. 귀띔까지 해 줬는데 제대로 못 한 건 본인 아닌가?”
백야가 다친 건 너 때문이라는 확인 사살에 율무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숨쉬기가 한결 편안해진 필승은 주름진 옷을 툭툭 털며 고개를 떨군 율무를 바라봤다.
“그러게 네가 NG만 안 냈으면 이럴 일도….”
자신의 책임을 은근슬쩍 율무에게 떠넘기던 필승은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말끝을 얼버무렸다.
‘뭐야. 이 새끼 상태 왜 이래?’
필승이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러려고 율무를 찾아온 게 아닌데 악마의 주둥아리가 기어코 말실수를 해버리고 말았다.
“어이.”
필승이 율무의 팔을 슬쩍 건드렸다.
그러나 약하게 흔들리기만 할 뿐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X 됐다.’
사실 율무가 저를 애타게 찾은 만큼이나 필승에게도 율무는 꽤 중요한 존재였다.
자신의 눈을 피해 심어놓을 스파이라고나 할까.
지한과 유연이 백야의 비밀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탓에, 두 사람은 버그로 인식돼 사이코패스의 감시망 아래에 놓였을 게 뻔했다.
반면 율무는 어떠한가.
끝까지 제 말을 의심하며 시스템의 존재를 부정해 준 덕에 버그로 인식되진 않았지만 유일하게 백야의 비밀을 아는 존재였다.
“크흠. 그… 시간 없으니까 그냥 들어요.”
제가 아쉬운 처지라는 걸 자각한 필승은 갑자기 공손해졌다.
“가서 전해요. 업데이트가 뜨더라도 절대 누르지 말고 버티라고. 그렇게 버티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
“이봐요. 내 말 듣고 있어?”
대답이 없던 율무는 이내 잠긴 듯 꽉 메인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나 때문이었어….”
“뭐가요?”
“내가… 내가 백야를 죽였어.”
투둑-
턱 끝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필승은 매우 당황했다.
덩치만큼이나 멘탈도 센 놈인 줄 알았더니 유리 멘탈이 따로 없었다.
‘아니, 뭐가 이렇게 극단적이야?’
시스템의 권한을 되찾아 오기 전까진 이놈이 중간다리 역할을 해 줘야 하는데, 이래선 이용해 먹을 수가 없었다.
필승은 급한 대로 눈앞의 강아지를 달래 보기로 했다.
“잠깐, 잠깐만. 아직 살아 있잖아? 백야 안 죽었잖아.”
“나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죄책감에 시달리던 놈에게 기름을 부어 버렸으니 활활 타오르는 건 당연했다.
율무를 달래 보기 위해 이런저런 듣기 좋은 말을 꺼내던 필승은 그냥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했다.
“그러니까 사실 그쪽이 엮여 있던 퀘스트는 잘 끝났는데, 하필 내가 해킹을 당하는 바람에 시스템 권한을 빼앗긴 거지.”
그 사악한 놈은 미래의 자신으로, 백야가 원래 있던 세계의 필승이라고 했다.
권한을 되찾은 그는 제가 백야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바꿔 놓았던 코드를 원래대로 되돌리려 했을 테고, 그 과정에서 퀘스트가 번복된 것 같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원래 코드라는 게 종종 하나를 고치면 다른 한 군데에서 에러가 나고 그러거든? 그래서 그것 때문에 백야가 다쳤을 확률이 큰, 커억!”
“뭐 이 새끼야?”
필승의 자초지종을 듣던 율무가 속눈썹에 눈물방울을 단 채로 그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멱살을 움켜쥔 손에 힘줄이 돋은 게 진심으로 화가 난 듯했다.
“케엑. 켁. 수, 숨…!”
바둥거리는 필승을 죽일 기세로 노려보던 율무가 손을 놓아주자 약골 개발자는 숨을 헐떡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결국 네가 한 짓이라는 거잖아, 이 쳐 죽일 새끼야.”
조금 전의 순둥순둥해 보이던 강아지는 어디로 가고 지금은 무시무시한 호랑이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기 위해 동아줄을 잡았는데 아무래도 썩은 동아줄이었던 모양이다.
‘백야 씨, 전 여기까지인가 봐요. 그쪽이 나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파이팅.’
범인은 나율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