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2화
* * *
“아들아, 이분은 누구시니?”
율무의 본가.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금지옥엽이 웬 노숙자를 데리고 본가를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입 닥쳐요.”
“입 닥쳐입니다.”
율무의 돌아 버린 눈깔을 본 순간, 생명의 위협을 느낀 필승은 그를 평생 형님으로 모시겠다는 맹세를 하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딱히 자존심은 상하지 않았다.
원래 돈이 많으면 형이니까.
“이 사람 사정이 있어서 혼자 둘 수가 없어서. 엄마랑 아빠가 잘 좀 감시해 줘.”
“…감시?”
“내 방에 가둬 놓고 절대 어디 못 나가게 해.”
“…가둬?”
크면서 속 한 번 썩인 적 없던 아들이 늦은 사춘기라도 온 걸까. 부모님은 걱정 가득한 얼굴을 펼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올바른 관계는 아닌 듯한 모습에 남자는 아들을 따로 불러냈다.
“율무야, 잠시만 이리로.”
“응.”
“저분은 정말 뭐 하는 분이시니? 회사 사람이야?”
“그냥 아는 형인데 내가 뭘 좀 부탁할 게 있어서. 밥만 좀 챙겨 줘. 오래 머물게 하진 않을게.”
남자는 아들의 어깨 너머를 살피며 필승의 차림을 천천히 뜯어봤다.
검게 그을린 티셔츠에 구멍 난 양말, 녹아 버린 앞머리, 냄새가 나는 듯한 꾀죄죄한 얼굴은 아무리 봐도 노숙자가 틀림없었다.
말은 못 하고 있지만,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 얼굴에 율무는 애교로 상황을 무마시켜 보기로 했다.
“부탁해용~ 응? 응?”
“그래…. 네가 이유 없이 이러진 않을 테니까.”
“고마워. 진짜 며칠만.”
애교로 나가네 가장을 함락시킨 율무는 이번엔 미모의 여성 뒤로 다가가 허리를 껴안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아아~”
“율무야….”
범상치 않은 비주얼에 충격이 만만치 않은지, 여성은 흔들리는 눈으로 아들을 올려다봤다.
“딱 이틀만. 아니다, 삼일? 그 안에 내가 치울게.”
거참. 쓰레기도 아니고 치운다니. 듣는 ‘입 닥쳐요’ 서럽게….
필승은 자신의 취급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었기에 악마의 주둥아리 단속을 철저히 할 뿐이었다.
“그래. 알겠어. 밥은 먹었고?”
“난 괜찮아. 저 사람만 좀 챙겨 줘. 나는 금방 들어가 봐야 해서.”
아니나 다를까, 때마침 율무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덕진이었다.
“형. 몸은 좀 괜찮,”
[세상에, 율무 님!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몸은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어요? 저는 납치당하신 줄 알고 당장 신고해야 한다고, 흐어엉!]
대환도 함께 있는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걔가 어디 납치당할 덩치예요? 야, 너 만나면 가만 안 둔다.]
예상했던 반응에 율무는 입술을 말아 물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나 잠깐 통화 좀.”
필승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온 율무는 대환과 덕진에게 거듭 사과했다.
“정말 죄송해요.”
[크흥…. 됐고요. 지금 어딘지나 말씀해 주세요.]
“그냥 제가 알아서 들어갈…,”
[저 진짜 화났거든요?! 당장 어딘지 말하세요!]
수화기 너머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필승이 작게 박수 쳤다.
“가수 회사 아니랄까 봐 거기는 매니저도 발성이 좋네.”
“야이 씨. 이게 다 너 때문,”
율무가 발끈하자 이번에는 덕진이 기겁하며 잔소리를 쏟아 냈다.
[뭐라고요? 설마 지금 제 탓하시는 거예요? 저는 제 매니저 인생을 걸고 차에만 있어 달라고 그렇게 부탁드렸는데!]
“아니요.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위치!]
“본가입니다. 바로 주소 보내 드릴게요.”
율무의 위치를 파악한 덕진은 ‘지금 당장 갈 테니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라’며 으름장을 놓은 뒤 전화를 끊었다.
“거, 미안하게 됐소.”
“됐소?”
“미안합니다.”
율무에게 완전히 기선을 제압당한 필승은 구석에 몸을 구겨 넣으며 찌그러졌다.
행사가 끝났는지 이어서 남경과 민성, 지한에게서도 전화가 왔지만 사정을 말할 자신이 없었던 율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곧 불어닥칠 후폭풍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 머리야.”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던 율무는 필승을 홱 돌아보며 부릅뜬 눈으로 경고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원래대로 못 돌려놓으면 진짜 가만 안 둬. 그땐 다 같이 죽는 거야. 알겠어?”
“넵.”
“와서 봐요. 이걸로 괜찮은지.”
책상으로 다가간 율무는 자신의 구형 노트북을 꺼내 주며 물었다.
컴퓨터를 부팅해 사양을 확인하던 필승은 똥 씹은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딴 쓰레기를 돈 주고 사는 놈이 다 있네….”
“다 들리거든?”
“…….”
뜨끔한 필승은 입을 다물며 못 들은 척 휘파람을 불었다.
“그거론 힘들어?”
“솔직히 이걸로는 너튜브도 겨우 보…. 아닙니다. 해 볼게요. 해야죠.”
아까부터 은근슬쩍 불만을 드러내며 신경을 긁는 필승이었다.
‘저걸 한 대 팰 수도 없고’라는 얼굴로 내려다보던 율무는 커머스 앱을 켜며 핸드폰을 넘겨주었다.
“필요한 거 다 담아 봐요.”
이게 웬 횡재냐는 얼굴로 공손히 핸드폰을 받아 간 필승은 이때다 싶어 최고급 노트북과 최신 장비들을 장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핸드폰을 돌려받은 율무는 1,000만 원을 훌쩍 넘긴 결제 예정 금액에 까드득 이를 갈았다.
“6K 레티나 디스플레이 789만…. 장난하냐?”
“그거 꼭 한번 써 보고 싶었어.”
혈압이 올랐지만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린 율무는 군말 없이 결제해 주었다.
‘그래. 친구의 목숨값에 비하면 이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내줄 수 있다.’
대신 살벌한 경고 또한 잊지 않았다.
“무조건 살려 내.”
“응. 근데 성공하면 이거 다 나 주는,”
“이 새끼가!”
그러나 참을 인을 네 번이나 새길 여유는 없었는지 결국 율무는 폭발하고 말았다.
베개를 집어 필승을 마구 내려치자 그가 팔로 얼굴을 막으며 비명을 꽥꽥 질러 댔다.
“끄악! 끕! 끅!”
팔을 들어 얼굴을 방어하던 필승은 그의 움직임이 멈추자 율무를 힐끔거리며 슬며시 팔을 내렸다.
“달라고 안 할게. …요.”
“너 다 해, 이 새끼야.”
“진짜?!”
통 큰 형의 씀씀이에 필승이 물개 박수를 치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아. 그리고 지한이나 유연이 이름으로 전화 오면 무조건 받아. 내가 거는 거니까.”
필승과의 연락 수단으로 핸드폰까지 넘긴 율무는 필승에게 아낌없이 퍼 주고 나서야 방을 나설 수 있었다.
“엄마, 나 가 볼게.”
“벌써 가려고?”
얼마 만에 온 집인데 벌써 돌아가는 거냐며 그녀가 아쉬워했다.
“활동 끝나면 한번 올게.”
“그래. 밥 잘 챙겨 먹고. 아, 백야는 좀 어때? 너는 괜찮고?”
율무와 백야의 영상을 본 듯 부모님의 시선에 걱정이 어려 있었다.
“난 괜찮지~ 백야도 괜찮을 거야.”
그러라고 데려온 필승이니까 꼭 괜찮아져야만 했다.
* * *
덕진과 합류한 율무는 두 손을 싹싹 빈 뒤에야 숙소로 복귀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숙소에는 덕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대단한 보스몹 남경이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못했습니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무릎부터 꿇은 율무는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쏟아질 잔소리를 대비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왔냐? 쉬어라.”
“어…. 어?”
“들어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고. 내일 아침 일찍 데리러 올 테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숙소를 나서는 남경의 모습에 율무는 속으로 생각했다.
‘X 됐다.’
남경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면 오히려 차분해지는 타입이었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해지는데, 마침 민성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형….”
남경 다음으로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민성이 아닐까.
아무것도 묻지 않는 남경과 달리 그는 할 말이 많은 듯, 잠시 이야기를 하자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민성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청은 유연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눈알만 데굴데굴 굴려 댔다.
“미안.”
멤버들 옆을 지나며 짧게 사과한 율무는 민성을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앉아.”
민성이 기꺼이 의자를 내어 줬지만 율무는 눈치껏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그럴 필요 없어.”
“아니야. 난 이게 편해.”
“그럼 그러든가.”
맞은편에 편하게 앉은 민성은 율무와 시선을 맞추었다.
“어디 갔다 왔어? 이런 적 한 번도 없었잖아.”
“그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급한 일 뭔데?”
“개인적인 일….”
팀 전체에 피해를 끼쳐 놓고 이유를 말할 수 없다 하자 민성의 미간이 구겨졌다.
“네가 오늘 무슨 짓 한 건진 알아? 스케줄 무단이탈이야. 네 개인행동 때문에 다른 애들이 대신 사과해야 했고, 너 대신 아쉬운 소리를 들어야 했어.”
“…….”
“왜. 데뷔하고 승승장구하니까 이제는 간절하지 않아?”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오늘 네 행동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율무는 입술을 말아 물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하……. 지친다 정말.”
율무가 미안한 얼굴로 민성을 바라봤다.
그러나 시선을 피한 민성은 깊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형! 형,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급하게 따라 일어선 율무가 다리를 절며 민성의 손목을 붙잡았다. 무릎을 꿇고 있던 탓에 다리에 쥐가 난 모양이었다.
“진짜 잘못했어. 그런데 내가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말을 못 해. 조금만 기다려 주면….”
말없이 서 있던 민성은 잡힌 손목을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이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민성과 율무가 나오길 기다리던 멤버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일동 차렷 자세로 눈알만 굴려 댔다.
“그래. 근데 이것 좀 놔줄래? 지금은 혼자 있고 싶은데.”
부드럽게 손을 풀어낸 민성은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미, 민성! 민성 어디 가?”
“바람 좀 쐬고 올게. 너희 먼저 자.”
민성이 숙소를 나서자 청이 불안한 얼굴로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