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7화
* * *
뽈뽈뽈-
전투력 만렙 햄스터가 빈 연습실을 찾아 복도를 거닐었다. 백야에게 납치당한 율무는 묵묵히 뒤를 따를 뿐이었다.
‘비었나? 비었다!’
달칵-
문고리를 돌린 백야가 율무를 먼저 보컬 룸 안으로 쑤셔 넣었다.
방음도 빵빵하고 적당한 크기의 공간, 그리고 앉을 자리까지.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에 이보다 좋은 장소는 없었다.
피아노 의자를 빼낸 백야는 안쪽에 율무를 앉히고 자신이 바깥쪽 자리를 차지했다.
혹시나 율무가 도주를 시도할 경우, 자신이 온몸으로 막아서기 위함이었다.
“몸은 좀 어때?”
눈치를 보며 망설이던 율무가 먼저 용기 내 말을 걸었다.
뾱뾱!
그에 앞발로 가슴을 두 번 두드린 햄스터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뜻인 것 같았다.
“포인트는? 모자라진 않아?”
얘 단체방 안 읽나?
갸웃거리며 핸드폰을 꺼낸 백야는 엄지를 놀려 율무의 얼굴 앞으로 척 내밀었다.
[안 모자라. 근데 너 왜 내 문자 씹어?]
“씹은 거 아니야. 바빠서 그랬어.”
[다른 애들도 바빠.]
“미안.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고?
백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어쩌다가?
뽀얀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됐어.”
필승에게 핸드폰을 넘긴 율무는 부모님의 명의로 개통한 서브 폰을 사용 중이었는데, 땅굴을 좀 파느라 백야에겐 말하지 못했다.
“번호 알려 줄게.”
한편 백야는 저만 율무의 번호를 몰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턱을 떨어뜨리며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우리는 멤버인데?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말하려고 했는데, 요즘 신경 쓸 게 많아서….”
본가에 감금해 둔 기생충이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걸어오는 통에 정신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사랑, 아니, 사람이 변했어!’
백야가 배신감 어린 표정으로 율무를 바라보기만 하자, 그도 미안한지 핸드폰을 가져가 손수 자신의 번호를 입력해 주었다.
[나율무]
애칭도 하트도 없는 무미건조한 세 글자.
이에 백야는 2차 충격을 받았다.
‘저게 다야? 하트는?’
율무가 질척대지 않자, 급기야 백야가 질척을 요구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왜 하트 안 붙여?]
“네가 싫어하잖아.”
[아니야. 붙여도 돼.]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겠다던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율무는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
[붙여!]
“괜찮아.”
[왜!]
“안 붙여도 돼. 그런데 왜 왔어?”
찔리는 구석이 있던 율무는 노심초사하며 백야의 눈치를 살폈다.
‘이 씨!’
하지만 눈새는 율무의 불안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핸드폰을 되찾아 와 이름 앞뒤로 하트를 마구 붙여 내밀 뿐이었다.
[♥♡율무♥♡]
“이건 좀… 그렇지 않아?”
분명 맞는 말인데 왜 이렇게 충격이지?
백야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그 새, 개발자랑은 여전히 연락 안 되는 거지?”
엄청난 충격에 모든 의지를 상실한 백야가 허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전투력은 빠르게 복구됐다.
“아까는 네가 천장에 줄을 매달고 있어서 깜짝 놀랐어.”
뭬야?!
째릿-
또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한 건가 싶어서 그를 노려보자, 율무가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아니야. 오해 안 했어.”
정확히는 할 뻔했으나 백야가 먼저 해명한 것이지만.
“목은… 여전히 소리가 안 나오는 거지?”
목소리는 나온다, 이놈아!
“누구세요!”
오랜만에 듣는 시스템의 초월 번역에 백야의 전투력은 완벽히 회복됐다.
“아. 소리는 낼 수 있는데 말이 이상하게 나온다 그랬지….”
끄덕!
“그건 오류 때문이라고?”
[그래! 근데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야.]
백야의 건강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나 싶었던 율무는 눈앞의 개복치를 빤히 바라봤다.
피투성이가 아닌 말간 얼굴.
제 앞에서 꼬물꼬물 움직이는 걸 보면서도 믿기지 않아 손을 뻗어 보는데, 마침 핸드폰이 얼굴 앞으로 내밀어졌다.
[너 연기 오디션 제의 들어왔었다며. 근데 그거 왜 안 해?]
“아….”
백야도 알고 있는 줄은 몰랐는지 율무는 당황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냥. 어차피 나는 연기도 잘 못하고, 지금은 개인 활동보다는 팀 활동에 더 신경 쓰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변명은 그럴듯했지만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연기하고 싶어 했잖아.]
“하고 싶은 거랑 잘하는 거랑 다르잖아. 그냥 잘하는 것에 집중하려는 것뿐이야.”
[아까워!]
“다음에 또 기회가 오겠지.”
[안 오면?]
“그럼 계속 데이즈 하면 되지. 나는 지금이 더 좋아.”
율무의 어색한 미소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백야는 다시금 자판을 두드렸다.
[혹시 나 때문이야?]
순간이지만 율무의 포커페이스에 금이 갔다.
“왜 그런 생각을 해?”
[나 그날 쓰러진 거 너 때문이라고 생각하잖아.]
정곡을 찔린 율무는 바로 받아치지 못했다.
필승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음에도 죄책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거 내가 업데이트 안 하고 버티고 있어서 그래. 개발자가 개발을 거지같이 해서 그런 거라고!]
율무도 마지막 말에는 공감했다.
[그런데 왜 네가 자책해? 왜 내 실수 때문에 네가 연기를 포기해?]
“너 때문 아니라고 했잖아. 그냥 내가 하기 싫어진 거야.”
사실 싫다기보단 무서운 것에 더 가까웠다. 율무는 제가 연기에 욕심을 부리는 한, 백야에게 <최고의 서포터!> 퀘스트가 언제고 다시 뜰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퀘스트는 나한테만 해당되는 거야. 너랑은 관련 없어.]
“관련 있던데.”
뜨끔-
백야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없어!]
“거짓말 안 해도 돼. 너 거짓말 엄청 못 하는 거 알지? 눈 커진 것 좀 봐.”
쓸데없이 예리하긴.
율무의 대답에 곧바로 받아치지 못한 백야는 말없이 그를 노려봤다.
‘똥강아지처럼 시도 때도 없이 치대던 놈이 축 처져서 눈치나 보고 있고….’
율무가 혼자 힘들어했을 걸 생각하니 속상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번 커진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왜 갑자기 울고 그래….”
율무를 노려보던 백야는 눈물이 흐르기 직전, 손으로 훔쳐 내며 다시금 자판을 치기 시작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네가 나 때문에 그 좋은 기회를 날려 버린다면 너무 속상할 것 같다는 말을 적던 백야는, 울컥 치미는 답답함에 핸드폰을 패대기쳐 버렸다.
에잇!
조폭 햄스터의 인성질에 당황한 율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왜 핸드폰을 던지고 그래?”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백야는 방음벽 가까이로 다가가 이마를 콩콩 찧기 시작했다.
“야, 야! 왜 이러는데?”
백야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운 율무는 그를 제압하듯 벽으로 밀쳤다.
“말로 해.”
“기억이 나질 않아요!”
“아. 말 못 하지…. 기다려 봐. 핸드폰 주워 줄게. 어디 있지…?”
어찌나 힘껏 패대기를 쳤는지 핸드폰이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율무가 핸드폰을 찾으라 잠시 어깨에 손을 떼고 바닥을 살피는 사이, 다시금 콩콩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상황이 못마땅하다는 시위였다.
“아오. 저 쥐방울만 한 게.”
핸드폰 찾기를 포기한 율무는 자신의 핸드폰을 대신 손에 들려 주며 폭주한 햄스터를 제압했다.
“아무것도 기억나질 않아요!”
“자. 내 거로 쳐, 내 거로.”
치워!
“제 이름은 뭐죠!”
율무의 핸드폰도 패대기쳐 버린 백야는 이제 이판사판이었다.
“아, 왜! 대체 뭐가 불만인데?”
“저를 아시나요!”
“아니, 그냥 말 좀 안 하면 안 돼?”
“저 잎이 떨어지면 저도 죽겠죠!”
소통이 불가능했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기만 하는데 율무의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 그래. 뭐. 내가 오디션 안 본다고 한 게 불만이야? 그럼 볼게. 보면 되잖아.”
“나에겐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 웁.”
“제발.”
당장 내일 죽을 것 같은 시한부 주인공 대사에 그가 백야의 입을 틀어막으며 애원했다.
‘진작에 이럴 것이지.’
팔을 두드리며 율무의 손을 떼어 낸 백야는 쪼그려 앉아 그의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야. 이거 켜 봐.’
핸드폰을 내밀자 율무가 얼굴을 비추며 잠금을 풀어 주었다.
[나는 네가 연기하는 게 보고 싶어. 분명 엄청 멋있을 거야.]
조용히 문자를 읽던 율무는 손바닥으로 눈 위를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대충 짐작이 가는 백야는 다시금 손을 놀렸다.
[나는 걱정하지 마. 정말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약속!]
눈 위를 덮은 율무의 손등을 살살 긁은 백야는 그가 저를 보게 만들었다.
그리곤 핸드폰과 함께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빨개진 눈시울에 눈물이 어린 채 활짝 웃는 얼굴.
그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는 순간, 율무는 그동안 짊어지고 있던 죄책감과 미안함이 씻은 듯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치트키인 <갓끼>와 <씹덕 버프>의 효과였다.
“그래도 정말 만약에….”
필승이 시스템 권한을 되찾기 위해 밤낮으로 매달리고 있긴 하지만, 그의 행실을 보면 딱히 믿음직스럽진 않았다.
다시금 율무의 걱정이 이어지려 하자 백야의 눈썹이 사선을 그렸다.
‘쓸데없는 생각!’
어떻게 끄집어낸 놈인데!
율무가 다시 땅굴을 파려 하자, 정신을 차리라는 듯 앞발이 두 뺨을 찌그러뜨렸다.
챱!
“진짜… 믿어도 돼? 정말 나 하고 싶은 대로….”
그렇다니까!
백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율무의 얼굴을 바짝 당겨 왔다.
내 눈을 봐. 내가 거짓말할 사람으로 보여?
* * *
그리고 두 사람이 멜로(?)를 찍을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세이렌의 초록.
툭-
예약해 둔 보컬 룸을 찾은 그녀는 문을 열기 무섭게 모서리에 치여 밀려나는 핸드폰 하나를 발견했다.
‘누구 거지?’
분실물을 주워 든 초록은 생각 없이 핸드폰을 뒤집었다가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말았다.
[♥♡율무♥♡]
설마….
삐걱거리며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더 큰 대한민국 시즌2가 절찬리에 상영 중이었다.
사랑스럽다는 듯 율무의 얼굴을 쥐고 선 병약 남주와 울먹이는 얼굴로 마주 보고 선 만인의 선배.
‘하느님…. 어째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조용히 핸드폰을 내려놓은 초록은 연습실을 버리기로 했다. 여기서 안면을 터 봐야 제 인생만 고달파질 게 뻔했다.
지잉, 지잉-
[사랑하는 청이]
그러나 핸드폰을 내려놓기 무섭게 진동이 울리며 새로운 라이벌의 등장을 알려 왔다.
‘사랑하는…?’
마찬가지로 진동 소리를 들은 율무와 백야의 고개도 초록이 있는 곳을 향했다.
“누구세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낸 백야가 입을 가리며 율무의 뒤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 적절한 대사에 이상하진 않았지만, 초록의 눈에는 밀회 현장을 들켜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는 게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