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8화
‘시X.’
겨우 욕을 삼킨 초록은 벌떡 일어나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세이렌 초록이라고 합니다!”
허리를 펴기 무섭게 마주친 두 쌍의 눈에 초록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엄청난 비밀을 알아 버린 그녀는 긴장한 나머지 묻지 않은 말까지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제, 제가 10시부터 예약을 걸어 놓은 줄 알았는데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봐요. 저는 괜찮으니까 하시던 거마저 하세요.”
“아니요. 저희가 나갈,”
“아니요!? 저는 이런 데 편견 없으니까 절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절대.”
“네?”
“어디 가서 말하지도 않을게요. 저 입도 진짜 무거워요.”
“그게 무슨…?”
“그, 그럼 예쁜 사랑 하세요!”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초록은 제 할 말만 하고 냅다 문을 닫아 버렸다.
‘튀자.’
전속력으로 복도를 달린 그녀는 제발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지 않길 기도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초록 님!”
“에이 씨.”
엘리베이터가 5층에 멈춰 있는 걸 확인한 초록은 비상구로 급히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신장 186cm의 긴 다리를 따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율무는 초록의 몸을 잡는 대신 비상구 앞을 막아서며 그녀의 진로를 방해했다.
“꺄악!”
“저희 잠시 이야기 좀 해요.”
“아, 아니요. 저는 이제 숙소로 복귀해야….”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아요. 정말 잠깐이면 돼요.”
율무는 필사적이었다.
눈앞의 후배님이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해, 보컬 룸에 남겨진 개복치 한 마리가 입에 거품을 물기 직전이었으니까.
* * *
“그, 그럼 예쁜 사랑 하세요!”
초록이 인사를 하며 문을 닫아 버린 순간 백야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뭘… 하라고?’
그러고 보니 낯이 익은 게, 이 온도, 조명, 습도. 저번에도 마주친 적 있지 않나?
개복치는 심각한 얼굴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율무가 제 바짓가랑이를 잡고 울던 날,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데뷔조 무리를 기억해 냈다.
개중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똥 머리.
‘…똥 머리?’
조금 전, 사랑 어쩌고를 외치며 튄 여성이었다.
“캬아아악!”
소문의 근원지를 찾아낸 백야는 하악질을 하며 율무의 등을 내리쳤다.
잡아! 빨리 잡아 와서 해명하란 말이야, 이 멍청아!
“저 잎이 떨어지면 저도 죽겠죠!”
“뭐? 너 그 소리 좀 안 할 수 없어?”
평소에는 눈치도 빠른 놈이 이럴 때만 눈치가 멸망하곤 했다.
벌컥 문부터 열어젖힌 백야는 율무를 밖으로 내몰며 도망가는 초록의 뒷모습을 가리켰다.
“캬아아악!”
하악질을 하는 모습이 상당히 난폭했다.
“왜, 또. 이번엔 뭐가 불만인데?”
갑자기 폭력성을 드러내는 개복치의 모습에 율무도 당황했다.
‘조금 전까지 분위기 좋지 않았나…?’
그러나 감동은 박살 난 지 오래.
율무는 손짓 발짓을 하며 초록을 가리키는 백야를 보고는 얼굴을 구겼다.
“뭐. 잡아 오라고?”
“캬악!”
“알겠어. 알겠으니까 좀 진정해. 저기요! 초록 님!”
율무는 일단 연습생을 잡아 보기로 했다.
‘저분이 무슨 말을 했길래?’
백야가 왜 길길이 날뛰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그는 곰곰이 초록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예쁜 사랑 하세요!’
…사랑?
그 순간, 문득 연습생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돈다며 백야가 한동안 자신을 피해 다니던 게 생각났다.
‘설마 저분이 말하는 사랑이 나랑 당백이의 사랑?’
남경에게 말해 달라고 귀찮게 굴어도 절대 말하지 않던 이유가 이거였나?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율무도 어느새 진심이 되었다.
“저희 잠시 이야기 좀 해요.”
아슬아슬하게 비상계단을 막아선 율무는 초록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도주범을 검거해 보컬 룸으로 돌아오자 피아노 의자에 앉아 다리를 떨고 있는 백야가 보였다.
달달달-
인기척이 느껴지자 고개를 홱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개복치는 문을 닫으며 퇴로부터 차단했다.
“서, 선배님.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못 봤어요. 그냥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져 있어서 잠깐 본 게 전부인데….”
“무서웠다면 미안해요. 절대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초록이 겁을 먹은 것 같자 율무가 부드럽게 타이르며 그녀를 달래 주었다.
캬아악!
그러나 앞니를 드러낸 채 초록을 노려보는 개복치로 인해 효과는 없었다.
“애기야, 좀.”
율무는 한숨을 삼키며 힘이 잔뜩 들어간 백야의 입술을 꾹꾹 눌렀다.
힘 좀 풀어, 제발.
물론 그럴수록 초록의 확신은 점점 더 커져 갔다.
‘…애기? 그럼 그렇지.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저렇게 입술을 자연스럽게 만지면서.’
뜻하지 않게 1열에서 애정 행각을 직관하게 된 초록의 눈알이 바쁘게 굴러다녔다.
그녀가 이처럼 편견 가득한 아이로 자라게 된 데에는 학창 시절에 즐겨 보던 팬픽의 영향이 컸다.
와앙!
한편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조금 전까지 애틋하게 율무를 위로하던 개복치는 이미 죽고 없었다.
조폭 햄스터의 영혼이 강림한 백야의 몸은 율무의 손가락을 공격하며 초록을 노려봤다.
“알겠어, 알겠어. 애기 그만~ 쓰읍. 진정해.”
저도 모르는 사이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율무는 백야를 진정시키며 초록과 대화를 시도했다.
“혹시 저희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세요?”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찬성이에요.”
“바람직하다는 게 어떤…?”
“다시 만나신다니 너무 다행이고, 이번에는 부디 후회하는 일 없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맙소사.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율무는 태어나 처음 겪어 보는 난감한 상황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걸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지?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안 사귀어요? ……시X. 너무 이상한데?’
짧은 사이 초록보다 더 긴장해 버린 율무는 조심스럽게 옆을 돌아봤다.
뒤집어지기 직전의 눈깔.
위협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앙증맞은 앞니.
백야의 이마엔 ‘저 똥 머리가 지금 뭐라는 거야?’라고 적혀 있는 것 같았다.
‘연습생은 물면 안 돼, 당백아. 나는 널 고소하지 않지만 이분은 널 고소할 수도 있단다?’
상황이 절망적이었지만 말을 할 수 없는 백야를 대신해 자신이 수습해야 했다.
“어…. 그….”
율무가 2차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인내심이 한계까지 다다랐던 백야의 급발진이 먼저였다.
‘답답해 죽겠네! 넌 뭘 멍청하게 듣고만 있어? 아니라고 해야지! 아니야! 아니라고요!’
[오류]
[?□????이(가) 없어 코드 실행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개복치의 억울함은 그의 패시브 스킬에 맞게 맞춤 번역되었다.
“사실 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네?”
“아, 제발….”
초월 번역과 함께 사태는 개같이 멸망했다.
손바닥 위로 얼굴을 파묻은 율무는 진심으로 울고 싶어졌다.
‘차라리 이파리 어쩌고나 누구세요였으면 좋았을 것을…. 왜 하필 그 대사야?’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오해에 초록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숨을 멈췄다.
‘시한부 소문이 사실이었어?!’
* * *
율무와 백야가 초록의 망붕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동안, 민성은 남경과 함께 병원을 찾은 참이었다.
‘그냥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래.’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민성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움찔 어깨를 떨었다.
“들어가자, 민성아.”
긴장한 민성의 손을 잡아 준 남경은 그를 챙겨 원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긴장감이 도는 적막한 공간.
가만히 모니터를 응시하던 의사는 이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대 결절입니다.”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민성은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남경도 굳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간혹 조용히 진행되는 경우도 있긴 한데, 증상을 못 느끼셨나요?”
“그냥 감기인 줄로만….”
“초기 증상이 감기랑 비슷하긴 해서 많이들 헷갈리시긴 해요. 그런데 환자분은 그것보단 이게 더 문제거든요?”
의사는 문제가 발견된 사진을 확대해 한 부분을 가리켰다.
“낭종입니다. 자세한 건 추가 검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다행인 건 악성은 아닌 것 같네요.”
“낭종이요?”
남경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 생기는 원인은 여러 가진데, 사실 환자분 같은 경우는 생김새가 조금 애매해서 당장 수술을 권하기가….”
의사는 다시금 차트를 진지하게 보더니 소견을 이었다.
“무리하게 수술을 진행했다간 괜히 성대를 망가뜨릴 수도 있으니까 경과를 지켜보고 그때 다시 결정하는 게 좋겠네요.”
“…….”
“오늘은 주사랑 일주일 치 약 처방해 드릴게요. 성대 사용은 최대한 자제하시는 게 좋습니다. 노래는 당연히 안 되고, 다음 진료 전까진 말씀을 안 하시는 게 제일 좋아요.”
“네. 감사합니다….”
멍한 얼굴로 원장실을 나온 민성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멈춰 섰다.
“민성아, 수납하고 올 테니까 잠깐이라도 앉아 있어.”
상념에 빠진 민성은 남경이 멀어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스케줄이 아직 남았는데…. 내일 음악방송은 어떡하지?’
직업이 직업인 만큼 성대 결절이 흔하다고는 들었지만, 막상 닥치고 나니 겁부터 나는 게 이대로 소리를 잃게 될까 봐 무서웠다.
낭종이 커지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수술을 하게 되면 톤이 달라지진 않을까?
음역대가 낮아지진 않을까?
온갖 안 좋은 생각이 꼬리를 물며 공포로 다가왔다.
“민성아. 가자.”
수납을 마치고 돌아온 남경은 초점이 흐려진 민성을 챙겨 주차장으로 향했다.
“너는 차에 먼저 타고 있어. 약국은 형 혼자 다녀올게.”
“응….”
“괜찮아. 당장 수술하는 거 아니잖아.”
상태가 심했으면 수술을 권하셨을 거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남경은 민성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문을 닫아 주었다.
문이 닫히자 비상 조명이 꺼지며 어두워진 차 안.
다리를 접어 끌어안은 민성은 무릎 위로 얼굴을 파묻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 흐으으….”
어깨가 들썩이며 민성은 한참을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