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말은 길었지만 다급하게 벌어졌던 상황은 선영이 교무실로 달려간 직후 3분 동안의 일이었
다.
제영은 어릴적 기억을 되살려 한발자국씩 위로 올라갔다. 생각보다는 어려웠지만 올라갈만
했다. 예전에 무슨 일 때문에 나무에 더 이상 올라가지 않기로 약속한 것 같았는데 기억은
나질 않는다.
"둔탱아, 조심해서 올라가!"
"제영아, 힘내!"
밑에서 정연과 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격려라고 하는 거냐! 정연의 목소리에 머
에 핏줄을 세우던 제영은, 아무 말도 못하고 지켜보고 있을 예린을 생각하곤 발에 힘을 더
욱 주었다.
바로 전에 예린이 만류하기 위해 했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예린에게는
어머니의 유품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길 위해서 그런 거짓말을 해준 예린이
고마웠다. 그래서 더욱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나무에 빨리 오르려했는지 모
르겠다.
조심스레 올라가던 제영은 지상에서 약 3m (아파트 한 층을 3m 정도로 쳤을 때 약 2층에
선 높이)에 도달하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윽, 나무 위에서 보니 더욱 높아 보였다. 더욱이 의지할 것 하나 없는 바람 부는 나무 위
다. 괜히 억지 부린 것 같지...?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교차하던 제영은 문득 예린쪽을 바라보았다. 지수와 정연도 예린의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오를 땐 몰랐는데 반 친구들이 모두 쳐다보고 있
었다. 힘이 났다. 저 들을 위해서도 쇼맨십을 발휘하여 꼭 가져가야겠는걸.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제영은 호흡을 가다듬고 굵은 가지 끝, 약 1m지점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스카프를 바라보았다. 손이 닿을 것 같다.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던 그녀는
한 손으론 가지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스카프를 갖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아, 3cm 정도 모자르다. 도구가 없어서 손으로 잡을 수밖에 없다.(밑에서 조달할 수도 없으
니까.) 그것만으로도 어려운데, 스카프가 흔들리는 바람에 잡기가 더욱 어려워 졌다.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더 세지기 전에 잡아야 할텐데... 이제는 두려움보다 스카프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왠지 제영은 마녀의 탑에 갇혀있는 공주를 구하는 왕자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내밀어진 손에 더욱 힘을 주곤 손가락을 움직였다. 앗, 닿았다. 이젠 잡아당기기만 하면 된
다. 밑에서 아이들의 안도의 한숨소리가 합창으로 들려 왔다.
하하하, 나를 믿으라니까-.
기쁨의 도가니에 빠진 제영은 손을 끌어 당겼고 가지를 잡고 있는 나머지 한 손에 힘을 주
었다.
휴, 다행이다. 다행히도 스카프는 안전하게 제영의 손에 구출되었다. 이제는 조심해서 내려
가기만 하면 된다. 옛날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니까.
제영은 조심해서 굵은 나뭇가지에서 중심 기둥으로 걸어갔다. 흘끔 아래를 내려다보니 초조
하게 기다리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장난기가 동한 제영은 소리쳤다.
"야, 나 멋있지 않냐? 스카프를 구한 영웅, 제영이라 불러다오. 하하하 "
되지도 않는 유머를 구사하던 제영은 왼손으로 스카프를 가슴에 구겨 넣고 손을 살짝 흔들
었다. 그리고 한 걸음을 내딛었는데 순간 발 밑이 미끌했다. 아차 하던 것도 잠시, 발을 헛
디딘 그녀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고 순간의 충격을 견디지 못한 나뭇가지를 잡고있던 오른
손이 풀리면서 공중으로 몸이 붕 떠올랐다. 제영은 찰나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슬로우 모션
으로 보고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시간이 정지되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떨어지고 있다는 충격느낌과 함께 눈앞이 어지러워
지더니 찰나에 한줌의 빛도 없는 암흑의 공간이 그녀의 앞에 펼쳐졌다. 둔탁한 충격이 등
쪽에서 전해졌고 온몸으로 으깨지는 듯한 아픔이 몰려왔다. 하지만 곧 그런 느낌조차 없어
져 갔다. 전신이 차가워짐을 느꼈을 뿐이다. 어느덧 냉기가 뼈속 깊이 밀려와 모든 세포를
냉각시키고 있었고 몸의 각 부분이 차례로 사라지는 듯한 느낌만을 감지 할 수 있었다. 이
제는 역겨움과 어지러움만이 제영을 엄습해 왔다. 멀리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지만 강한 어둠이 몸을 잠식해 가는 느낌을 마지막으로 의식은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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