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tasy in dreams(차원 연결자)<8>
(제영이 사고나기 5분전...)
정연은 어젯밤 꿈 때문에 복잡해져오는 머리를 흔들었다. 제영이 수렁에 빠져들어 가는 꿈
이었는데 아무리 자신이 도우려해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보고있어
야 했다.
아침에 제영에게 오늘하루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런 이유-꿈-로 말한다는
건 우스운 것 같아 하지 못했다.
미신이라고 구박을 받을 것도 같았고, 또 말이 씨가 된다고 말만해도 제영이 잘못될 것 같
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솔직히 후회되었다. 미리 얘기했다면 제영이
경솔하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텐데 자신이 소극적인 행동을 하는 바람에 제영이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정연은 제영의 곡예와도 같은 나무 타기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생각보다 나무를
잘 타고 있었다. 별명이 원숭이였다고 소리치더니 맞는가 보다. 마음 한구석에서 안도감이
밀려왔다. 둔녀라고 불리는 제영이 이런 재주가 있다니-. 신은 사람에게 한가지 재주는 내
린다더니, 제영은 이런 엉뚱한 재능을 타고 났나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정연은 자신도 모르
게 피식 웃었다.
정연은 격려 차원에서 한마디라도 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크게 소리쳤다.
"둔탱아, 조심해서 올라가!"
"제영아, 힘내!"
지수도 뒤이어 외쳤다. 가만있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상황에서 평온을 유지하는
건 힘들 테니까... 곁의 예린를 흘끔 바라보았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어느새 제영은 스카프가 걸려있는 곳에 다다랐고 스카프에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슬아슬하
게 나뭇가지 하나로 몸을 지탱하며 스카프 끝에 손을 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보는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바라보던 정연도 긴장한 나머지 침이 마름을 느끼고 입술을 핥았다. 아
무소리도 들리지 않고 자신의 심장박동이 빠르게 뛰는 것만이 느낄 뿐이었다. 눈 가득히 제
영의 모습만이 들어왔다. 그녀는 그렇게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제영을 바라보았다.
아, 제영이 스카프를 잡았다.
정연은 긴장되어 있던 신경의 줄이 느슨해짐을 느끼곤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제영
이 소리쳤다.
"야, 나 멋있지 않냐? 스카프를 구한 영웅, 제영이라 불러다오. 하하하"
그 말을 듣고 정연은 쓸데없이 고민했던 것을 자조했다. 자신의 생각은 괜한 기우였던 것이
다. 이제, 제영이 내려오기만 하면 그녀는 자신이 영웅이라도 된 듯 날뛸 것이 분명했다. 그
런 행동을 할 것이 분명한 그녀를 생각하곤, 정연은 제영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말을 생
각하고 있었다.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애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뭐지?!!
정연의 주위에 서있던 반 친구들이 나무 밑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그녀주위에는 아무도 없
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주위 상황들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
다.
정연은 그런 것들을 부정하며 죄어드는 가슴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천천히 둥글게 모여
서 있는 반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여기저기서 '어떻게 하지?'라고 말하는 여자애들 특유의
소음들이 운동장을 시끄럽게 채우고 있었다. 제영과 친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반 친구들은
정연이 다가서자 몸을 비켜 길을 내주었고, 정연은 미처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겨 그 중심
으로 들어섰다.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조용했다. 침묵이 무겁게 그녀의 몸을 압박하고 있었
다.
예린과 지수가 무언가를 둘러싸고 서있었다. 그녀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암묵의 장벽이
그들에게 내린 것 같았다. 지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손수건을 제영의 머리에 대고 있었다. 하
얀 손수건은 빨갛게 물들어갔다. 무겁게 짓누르는 침묵을 깨고 예린은 울먹이며 말을 했다.
"어, 어쩌면... 어쩌면 좋지 정연아, 나 때문에 제영이....제영이..."
정연은 아무말도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달려와서 다급하게 소리치는 선생님과 선영의 목
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려왔지만 주변의 말도 시끄러운 소음도 정연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적막에 쌓인 어두운 공간에 제영과 그녀 홀로 서 있는 듯이 느껴졌고 제영
의 모습이 눈에 아프도록 들어왔다.
자신이 종종 따아주던 부드럽고 윤기나는 짙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거짓말 같이 선명한
붉은색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창백해져 버린 안색으로 만족한 듯이 미소짓고 있는 제
영의 모습이 보였다.
무엇을 만족했단 거지?
자신이 다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일을 벌리다니 제영, 그녀만의 만용이었을까?
우리의 방관이 불러온 실수인가?
그것도 아니면 다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해야될 정도로 이번 일이 중요했을까? 내가 말
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제영은 내 말을 들었을까, 그렇게 말했더라면 후회는 없을 것을... 아니야, 소용없어. 모든 것
이 다 때늦은 후회인 것이다.
자신을 자책하고 있는 정연은 제영을 실은 앰블런스가 교문을 나설때까지도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제롬은 점심식사가 끝난 후, 다 먹은 접시가 놓인 수레를 밀며 길게 이어져있는 복도를 걸
어가고 있었다. 제롬의 입에선 작지만 아름다운 선율의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의 기
분이 노래를 통해 잘 나타났다. 경쾌한 리듬의 곡은 그의 발걸음에 맞추어 빠르게 불러졌다.
그의 눈앞에 쭉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금실이 수놓아져 있는 빨간 카펫은 궁전복도를 가로
질러 그가 가야할 방향까지 연결되어있었다.
그가 가고있는 곳은 (제 4궁전에 자리잡고 있는) 식당이었다. 접시를 반납하러 가고 있는 중
이었는데, 시녀들을 시키면 간단한 일을 얀과 관계된 일이라면 혼자서 도맡아 하였기 때문
에 자청한 것이었다.
얀이 식사를 하던 모습을 다시 떠올린 그는 웃음이 나와 참을 수가 없었다. 유독 그만이 즐
기는 일상생활 중 묘미였는데, 얀은 식사가 시작되면 강아지처럼, 파란눈을 초롱초롱 뜨고
제롬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있으면 귀여워서 골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
은 아니었으나 꼬리를 치며 반기는 듯한 그의 모습에 아직까지 시도는 못하고 있었다. 새삼
아버지의 위대함을 느끼는 제롬이었다. 7년동안 그런 모습을 보고도 꿋꿋하게 버티시다니,
수준차이를 실감하였다.
어렸을 때는 애 돌보는 기사단장이라고 놀리는 말을 듣고 창피해서 아이들과 많이 싸웠지만
지금은 그런 자신의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었다. 어둠에 홀로 있을 얀 님을 지금까지 지켜온
것이 그였으니까.
얀 왕자님의 처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수석 요리사의 특제 캔디를 얻어와야겠다. 왕자님이
그것을 유난히 좋아하시니까. 오늘 식사를 잘하신 상으로 드려야지. 동생이 없는 제롬에게는
얀은 사랑스러운 가족이었다. 제롬은 기뻐할 얀을 생각하며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그 때 그
의 눈앞에 섬광이 비추어졌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제롬은 오른팔로 눈앞에
그림자를 만들며 실눈을 뜨고 앞을 내다보았다. 아까보다 빛은 약해 졌지만 복도 가득히 그
리고 그 너머까지 빛나고 있는 그것은, 경계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방대했다. 제롬이 주위
를 둘러보자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시녀들과 바쁘게 뛰어 다니는 경비병들이 보였
다.
제롬은 창문으로 뛰어갔다. 이 정체모를 빛이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
다. 창문에 매달리듯 밖을 바라보던 그는 보고자 했던 것을 확인하곤 얼굴을 굳혔다. 표정을
수습하지 못한 그의 얼굴엔 놀라움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제롬은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서있는 궁전을 비롯하여 중심에 서있는 중
앙 왕궁과 그 곁을 둘러싸고 있는 3개의 궁전이 (또한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최외곽 성벽까
지) 거대한 빛의 기둥에 둘러싸여 있었다.
일견 성스러워 보이는 빛은 사라지지 않고 범인들에게 공포와 혼돈을 가져다주었다.
- Fantasy in dreams... 신들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