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렇겠죠. 증거가 없다고 믿고싶으시겠죠."
미르는 말을 마치곤 차갑게 굳은 얼굴로 왕비를 바라보았다.
아니야. 모든 증거는 처리했어. 암살을 맞았던 집단은 자신들의 의뢰자를 밀고하지 않는다.
관계되었던 귀족도 숙청하거나 암살을 했다. 문제될 것은..... 없...어.
왕비는 눈을 들어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나, 어미를 몰아대고 싶소. 어리광도 어릴 때 해야 귀여운 거요."
그녀는 미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팔타니온!!"
미르는 모든 것을 꿰뚫을 것 같은 시선으로 왕비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왕비의
안색은 점차 창백해져갔다. 미르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자 머릿속이 복잡해 오면서 까맣게
잊고있었던 어떤 일이 떠올랐다.
처리과정에서 쥐새끼 한 마리를 놓쳤다고 했다. 설마 그럴리가 없어. 몇 년간을 그놈을 처리
하기위해 노력했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미르는 피가 굳어 검붉게 보이는 서류를 그녀의 눈앞에 흔들며 말했다.
"이 서류는 어마마마가 숙청했던 그 집안의 비밀금고에서 나온 겁니다. 죄상이 낱낱이 적혀
있습니다. 어마마마는 철저하게 증거인멸을 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람의 생존본능 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팔타니온가의 집사가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는 대신으로 바꾼 것이지요. 7년
간 증거가 없어서 단죄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칼자루를 쥔 사람은 저입니다-."
이럴 순 없다. 내가 들인 공이 어디인데... 이렇게 무너질 수 없어...
그 놈의 집사가!!!
그녀는 부채를 쥔 손으로 소리가 날 정도로 의자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부채는 산산조각이
나 허공으로 흩어져갔다.
악에 받쳐 자신을 쳐다보는 어머니를 보며 미르는 엄숙하게 말을 해나갔다.
"무엇이 더 중요했던 거지요? 행복했던 모자(母子)를 없앨 정도입니까? 아바마마의 후궁이
었던 그분은 친절하고 상냥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마마마는 7년전 그날, 신성한 국경
일에 그분을 암살했습니다. 어렸던, 얀마저.... 암살대상에 들어있었습니다...
...도대체... 그런 것보다 뭐가 더 중요했단 말입니까? 그 분과 어머마마는 친자매지간이나 마
찬가지 아니었습니까?"
"흥, 친자매지간? 그런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가문이 달린 일이었다. 왕세자로 뽑
히는 왕자의 외가가 득세를 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 난 너의 외가인 마르온을 위해서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헤르나는 예로부터 왕자의 능력으로 왕세자가 결정되었지. 능력면에
선 네가 나을지 몰랐어도. 얀, 그 아인 모든 이들을 사로잡았다. 불안했다. 그 아이가 선택을
받을까-. 그렇다고 그 아이만 죽이기는 너무나 위험했지. 내가 그녀 테실라와 친한 사이라
해도 혐의까지 벗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그녀까지 암살대상에 넣은 것이었는데... 이웃나라
까지 알려졌던 그녀와의 우정이라면 혐의는 간단하게 피할 수 있었지. 귀족들의 동정표까지
얻으면서 말이야..."
그녀는 차분히 이야기하면서도 얼굴에는 씁쓰름한 표정이 역력했다.
" ...우습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너를 위해 했던 일인데, 나를 도와줄거라 믿었던 너의
뛰어남이 나의 발목을 잡는데 쓰이다니...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야-."
그녀의 자조적인 말을 듣고 있던 미르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제가 원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은... 어머니의 만족을 위한 일이었겠죠-."
가만히 미르를 바라보던 왕비는 시선을 내리깔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혼자만의 생각이었단 말인지-."
의자에 손을 올려 이마를 받치는 자세로 잠시 생각하던 왕비는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들
어올려 위험한 눈빛으로 미르를 쳐다보며 말을 했다.
"내가 이대로 물러설거라 생각하느냐?!"
그녀는 손을 들어 까닥였다. 그러자, 그녀의 그림자에서 암흑의 살수가 튀어나왔다.
미르는 한치의 떨림도 없이 말을 해나갔다.
"괜한 수고하지 마십시오. 저를 피한다 하더라도.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근위기사단을 물리치
실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제가 죽는다면 제일 먼저 의심이 가는 것은 당연히 어마
마마입니다."
"내가 잘못 가르친 것은 아니구나. 최후의 보루까지 만들어 두다니...훌륭하다. 훌륭해..."
왕비는 다시 의자 위에 우아하게 앉았다. 그리고 근위기사단이 들어와 자신의 곁에 설 때까
지 위엄을 잃지 않았다.
"어마마마는 엄연히 세헤르나의 국모시니, 면책특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법적
인 사실, 왕비들이 죄를 지었을 때 기거하는 별궁으로 모시게 될 겁니다."
미르는 슬픈 눈으로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아가는 자신의 생모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왕비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려세우고 말을 했다.
"...확실히 할건 해야겠지..., 정신이 없어서 네가 처음에 온 목적을 잊었구나, 아마 이번에 사
라진 왕자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지?"
미르는 아차 하는 심정으로 그녀의 입을 바라보았다. 본래 목적을 망각하다니...
"그렇습니다. 얀을 워프시킨 장소를 말해주십시오."
그는 확신을 갖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어머니가 이번 사태도 꾸몄
을 확률이 높았다. 원로 마법사들은 빛의 기둥에서 워프의 잔여기운을 읽었다. 하지만 워낙
에 빛의 기둥의 마력이 거대해서 그들의 힘으론 워프시킨 장소까지 알 수는 없었다. 왕비가
그런 대단위 마법까지 이용했다는 건 의심적이긴 했지만. 얀이 걱정되는 그는 더 이상의 생
각을 할 수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주도면밀하게 살피던 왕비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왜 그런 수고를 했다고 생각하는 거지. 난 한번 먹은 음식은 맛이 없어서 두 번 다시
입에 대지 않아... 단물을 다 빨아먹은 사탕은 더 이상 신경쓸 가치가 없지."
기사들과 걸어나가며 왕비는 즐거운 기색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 7년전 사건을 해결한 상으로 한 가지 더 가르쳐 줄까?"
고개를 돌려 미르의 눈치를 보던 그녀는 승리의 미소를 띄우며 속삭였다. 흘리고 들으면 지
나칠, 작은 소리였지만 미르에게는 청천벽력처럼 들려왔다.
"7년 동안 얀왕자의 병을 고치려고 노력했겠지? 그런데.... 왜 수많은 명의(名醫)들이 그 병
을 못 고쳤을까? 응?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의사들이었는데.... "
그녀는 중요한 비밀을 꺼내듯 더욱 조심스레 말했다.
"....그건. 내가 아주 오랫동안 준비한 것이었어. 암살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서 말이지...그
것마저 실패했다면 이번 소동은 내가 일으켰겠지만, 다행히도 성공이었지... 시술자의 생명을
담보로 만드는 죽음의 저주였지만, 그 녀석은 놀랍게도 생명력하나는 끈질기더군. 나도 놀랐
다니까-. 영혼이 사라져도 몸은 움직이다니.... 너희들은 천치가 되었다고 놀랐겠지만-, 천만
해! 나는, 죽었는데도 움직이는 그 녀석의 좀비와도 같은 육체에 더 놀랐어... 너희들은 그녀
석이, 중상의 상처를 입은 데다가 테실라가 죽은 충격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지만.... 말이야."
그녀는 섬뜩한 이야기를 재밌다는 듯 이야기했다.
미르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거짓말 마십시오! 6년전에 얀은 잠깐동안이지만 병석에서 일어나 정신을 차린 적이 있습니
다. 사라지지만 않았다면 분명히 고칠 수 있는 병이었단 말입니다!!"
미르를 보던 왕비는 안되었다는 듯 혀를 차더니,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녀석의 마지막 발악이었겠지. 너희들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으니, 이만 놓아달라고 말이
야-."
왕비는 되돌아서서 다시 당당하게 걸으며 비웃듯이 말을 했다.
"세자, 그대는 나를 이·긴 ·것·이 아니오!!"
-그렇다. 결국 진실로 이긴 것은 그녀인 것이다.-
미르는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모두가 사라진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어두운 방... 고개를
숙인 그의 몸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