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왕세자 미르가 자신의 동생 얀 때문에 슬퍼하고 있을 무렵 그가 있는 세헤르나에서 수천 킬
로미터 떨어져있는 이 곳에선 한 소녀(?)의 파란만장한 모험이 시작되고 있었다.
"에구구구, 하-암.... 삭신이 쑤시는구나. 얼마나 오래 잔거야?"
배고픔으로 잠이 깬 제영은 허리를 두드리며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온몸을 주무르던 그녀
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제영은 눈을 비비며 앞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방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녀가 있는 곳은 울창한 나무들이 있는 숲이었다. 술에 취해(?)
노숙을 해도 파출소나 길거리에 있어야 정상일텐데, 산속이라니.... 거기다 한 번도 보지 못
한 식물들이 널려있는.... 이상하게 생각할 법도 하건만 우리의 히로인인 그녀는 머리를 긁적
이며 잠이 묻어 나오는 무덤덤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어라.., 여기는 어디지..."
잠결이라 눈앞의 광경이 크게 다가오지 않는 까닭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그녀는 더욱 놀
라운 것은 발견했다. 그녀의 머리가 길기는 했지만 염색을 하지 않은 천연의 흑단(?)같은
검은 머리였다. 그런데 자신이 헤집고 있는 이 머리의 색은....
"...머리가 많-이 세었네. 다 녀석(수다 4인방)들이 골치를... 썩여서 그래..."
비몽사몽, 그녀들이 들었으면 분개할 내용을 남발하며 고개를 끄덕여 자신이 한 말에 무언
의 긍정을 표시하던 그녀는(자기가 말하면서도 기억 속에는 남아있지 않다) 비틀거리며 걸
어가기 시작했다. 집을 찾아야지 아침을 먹을 수 있을 테니까.
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제영은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을 먹고 학교 갈 채비를 하는데,
그것이 몸에 배어 무의식중에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제영은 몽유병자가 길을 걷듯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산 속의 오솔길을 따라갔다. 그녀의 주
변에는 그런 그녀를 구경하는 조그마한 동물들과 이름모를 버섯들, 야생화가 늘비했지만 제
영은 그들을 구경하지 못했고 눈꺼풀에 무거운 돌이라도 올려놓은 듯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상황파악을 못하고 자신의 첫 번째 본능(식욕)에 따를 뿐이었다.
숲에 나있는 오솔길을 걸어가며 비틀비틀 이 나무 저 나무에 부딪치던 제영은 드디어 집 한
채를 발견했다. 오직 그녀의 머리에는 한가지 생각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흐느적거리며 오두막집에 잘 도착한 제영은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자신의 심
정을 잘 나타내줄 말을 외쳤다.
"바-압!"
정신없이 밥을(차려져있는 것은 호밀 흑빵과 스프등이었다.)먹던 제영은 어지간히 먹고 나자
정신이 들었는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친절을 베풀어준 집주인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저기, 감사합니다.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고사(枯死)했을지도 몰라요. 무례하게 굴었는데도
잘해주셔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수그린 제영에게 걸걸한 목소리의 남성이 말을 했다.
"뭐, 그런걸 가지고, 텔라리움 숲은 울창해서 조난자들이 많지. 너와 같은 경우가 허다해. 그
리고 한가지 명심할게 있는데..."
"명심할거요?"
"그래. 나는 아·저·씨가 아니야. 형이지... 결혼도 못한 총각에게 무슨, 흠, 흠."
헛기침을 하는 그를 흘끔 살펴보던 제영은 자신의 생각엔 아닌 것 같지만 생명(?)의 은인이
원하는 대로 하기로 했다.
"예. 형! 그리고 말 놓으세요. 제가 더 어린 것 같은데..."
"그, 그래... 그리고 내 한가지 부탁할 것이 있는데..."
"부탁이요?"
"뭐, 엄청난 것은 아니고...."
말을 머뭇거리던 그는 빨간색의 가죽끈을 제영에게 내밀었다. 앞에 놓여있는 가죽끈을 보면
서 이상한 상상을 하던 제영은 들려오는 말을 듣고 웃고 말았다. 어려운 부탁이 아닌 것을
저리 고민하다니.
"머리 좀 묶어 줄래? 보기에 답답해 보여서 말이지."
그랬다. 밥을 먹느냐고 정신없었던 제영은 깨닫지 못했지만 그녀의 머리 스타일은 산발이었
다. 앞을 더부룩하게 가려 삽살개 사촌으로 보이는. 용하게도 식사를 하면서 조금의 음식물
도 튀기지는 않았지만 보는 사람은 괴로울 수밖에....
끈을 가지고 얌전하게 자신의 머리를 꼬고있던 그녀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머리색이 은
색이었던 것이다. 아까 경황이 없어서(먹느냐고 바빴지..) 대충 넘어갔는데, 다시 보니 은색,
아니 은빛머리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오는 걸 보면... 청은발이라고 칭하는 것이 옳을 듯 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둔녀 --;) 머리를 다 땋은 제영은 앞을 바라보았고 앞에 앉아 있는
청년을 정면으로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더니 얼굴을 붉히는 것
이 아닌가? 이상하게 생각하던 제영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를 바라보았고, 그제서야 정
신이 드는지 그가 말을 했다.
"산 속에 있다보니, 사람구경을 잘 하지 못했어. 기분상했다면 사과할게, 그래도 이건 진심
인데 너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보지 못했어."
"예??"
제영의 얼굴이 이상한 것을 들었다는 듯 찌푸려졌다.
18년 동안 살아오면서 예쁘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던가? 대답은 슬프게도 '아니오'였
다.
청년의 말에서 이상함을 느낀 제영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혹시, 거울 없어요?"
"어, 거울은 없고, 뒤꼍에 가면 샘이 있는데. 잘 볼 수.... 야, 어디 가는 거야?!"
제영은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달려나갔고 샘가에 도착했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으
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그곳에는 청은발의 머리카락을 지닌 아름다운 사람이 들어있었다.
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을 가지고있는 그는 부드러운 머리결을 곱게 땋아 목옆으로 길게 내
리고 있었다. 그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혀 주는)평온의 눈은 제영의 가슴을 점차
진정시켜주었지만, 물 속의 그가 정면으로 보인다는 것은.... 돌려 말하면 그가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불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연이에게 죽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