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오후의 늦은 햇살이 주점(좋은 아침) 안을 붉게 비추고 있었다. 아름다운 문양의 분홍빛 레
이스 커텐 사이로 들어오는 그 빛은 주점을 아늑한 분위기로 만들어주었다.
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서 있는 얀의 주위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가득해서, 얼마 안되는 손
님들은 차마 그의 곁으로 다가서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와는 다르게 얀은 손에 행주
를 들고 손님들이 자리를 떠난 테이블을 치우고 있었다. 조심해서 그릇들을 치우고 있는 그
에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장식을 한 금발의 아가씨가 용기있게 다가와 말을 걸었
다.
"일 끝나고 시간있어요?"
"죄송합니다, 손님. 저에게 그런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군요..."
얀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사죄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얕본다고 생각했는지 아무말도
없이 얼굴을 붉히더니 급하게 돈을 계산하고 일어났다. 다급한 그녀의 걸음소리와 함께 "쾅
"하고 문이 부서질 정도의 소리가 들려왔다.
얀은 한숨을 쉬고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휘-익.
얀의 등으로부터 대칭으로 있는 가게의 문이 열리며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그 소
리에 얀은 테이블을 치우다 말고 뒤돌아보았다. 예상대로 제이드였다. 제이드는 '좋은 아침'
과 거래하는 청과상 탄타로의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일을 돕는 그는 어느새 얀과 친해져 얀
의 일을 도와도 주고,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는 검은머리의 핸섬한
청년이었다. 입구에서 다급하게 얀에게 걸어오던 제이드는 눈을 휘둥그래 뜨더니 놀랍다는
듯 이야기했다.
"얀, 너 방금 리네스 봤냐. 그녀가 그렇게 화난걸 본 건 처음인걸-?"
"리네스?"
"어, 너 몰랐어? 방금 나간 예쁜 아가씨 말이야. 주노에서 가장 인기있는 아가씨야. 물론, 네
가 온 이후에는 조금 주가가 떨어졌지만...."
"뭐?"
"아, 아니.(여자보다 더 예쁜 네 녀석 때문이라고 어떻게 말해.) 그보다 리네스가 왜 그렇게
화가 났던 거야? "
"아-. 아마 나 때문일 거야. 그녀가 미팅(만남)신청을 했는데... 그걸 거절했거든..."
"야-. 정말이야. 이거 특종인데! 그 콧대높은 리네스가 차이다니! 너 변종 아니야? 그 아름
다운 리네스를 보고도 퇴짜를 놨다고?! 여자친구가 그렇게 많으니 배부르냐?? 아름다운 아
가씨를 내버려두고...-여기서 제이드는 한숨을 쉬었다.- 취향이 특이하다."
"내가 여자친구가 많긴 하지만 난 그런 타입은 딱 질색이야. 사실, 집에 일찍 가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해야 하니까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요즘 대청소중이거든 가을이 지나기 전에 침
대시트를 다 빨아야해. 그리고 제이드, 너도 집안 일 좀 도와, 너의 집 식구들 장난 아니잖
아."
"뭐, 식구들이 많긴 하지만 여자형제들이 있잖아-. 그 애들만 해도 두집살림 하고도 남는다
고-."
"너 지금부터 연습해놔야지, 나중에 사랑받는다-."
"뭐-? 그럼 넌 얼마나 사랑받으려고 그렇게 열심히 하냐?"
제이드는 웃으면서 오른팔로 얀의 목을 감고 왼손으로 그의 머리를 비벼대었다. 한 두번 당
한 것이 아닌 얀은 대비책으로 마련한 방법을 사용했다. 자신의 목을 걸고있는 제이드의 옷
소매를 살며시 걷어올려 그의 솜털을 쥐어뜯었고 황당한 공격을 당한 제이드는 눈물을 글썽
이며 그만두었다. 한참동안 자신의 팔을 문지르던 제이드는 얀과 같이 가게를 지켜야 할 나
머지 한명이 없다는 걸 깨닫고 얀에게 물어보았다.
"참. 빌 아저씨는 어디 가신거야?"
"나 혼자서도 잘 한다며 바닷가재때문에 수산업길드에 가셨어."
"바닷가재? 아-! 네가 한다는 그거!"
"으-응. "
얀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현실에서는 그리 뛰어난 요리솜씨는 아니었지만, 꿈에 들어온 뒤로
는 그 동안의 특훈(꿈에서 움직이지 않는 대신 발달한 오감)이 도움이 되었다. 한달간 가게
에서 일하면서 처음에는 그의 미모에 대한 소문을 듣고 왔던 손님들이 이제는 그의 요리 때
문에 즐겨 찾았다. 새로운 퓨전 요리는 손님들의 입맛을 항상 즐겁게 해주었다. 아직까지는
일류 주방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맛을 보고 새로운 요리맛을 잘 감지해 내는 그의 혀는
음식을 만드는 것에 도움을 주었고 그런 점 때문에 주노에서도 알아주는, 훌륭한 요리사 감
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빌 아저씨는 그런 그를 키워주기 위해 여러 요리재료와 훌륭한 요리
선생을 찾아다녔다.
"나 때문에 아저씨가 고생이시지, 뭐-."
"나라면 그런 고생 사서하겠다. 뭐- 바른 말이지. 손님 잘 물어 오겠다.(내가 개냐?) 음식솜
씨 좋지. 거기다 부지런하기까지. 아- 네가 여자라면 내가 확 찜해놓는 건데... 뭐, 지금의
너도 별로 상관은 없지만..."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제이드의 시선에 오한을 느끼는지 얀은 몸을 떨며 부정했다.
"야-.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말아라. 니가 하면 왠지 진담처럼 들려."
"오-호. 몰랐냐? 나 진담이야"
제이드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고 얀은 고개를 흔들며 뒷걸음쳤
다. 그들의 추격전은 체력이 딸린 얀이 제이드에게 잡히면서 막을 내렸다. 제이드의 뛰어난
고문기술(간지럽히기)에 걸린 얀은 항복을 선언했고 제이드는 조건을 내걸었다.
"네가 잘하는 그-거. 해줘. 나 그것 먹으려고 점심도 안 먹고 왔단 말야."
"야-! 그거가 아니고 '볶·음·밥'이라니까!"
"그래. 그 보르... 하여간 그거.."
"에고. 내가 참아야지....(한국어가 그렇게 어렵나?) 잠깐만 기다려."
얀은 하얀색의 귀여운 메이드 앞치마를(빌 아저씨의 취향이 옆 보인다.)하고 주방으로 들어
갔다. 제이드는 즐거운 표정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곁에는 얀의 모습을 구
경하는 청년 및 아저씨들로 테이블이 점령당하고 있었다. 오후의 해가 지면서 '좋은 아침'은
남성들의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싱글벙글 거리는 제이드의 등에 강한 충격이 전해져 왔다.
"아얏! 뭐야-. 너도 또 왔냐."
로인이였다. 약간 탄 검은 빛 얼굴로 웃고있는 그는 제이드의 아픔을 즐기고 있었다.
"또-오? 당연하지 너만 오라는 법있냐? 그래도 난 약과야. 저 녀석은 매일 출근 도장을 찍
잖아."
로인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제이드는 그를 발견하고 웃어버렸다. 보석상을 하는 케나
로씨의 둘째아들 라슈였다. 사람을 기피하는 저 냉철한 녀석이 웬일인지 모르겠지만 이른
저녁시간이 되면 정확하게 이곳에 나타났다. 사람이 가장 붐비는 저녁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 로인왔네. 너도 저녁 먹을 거야?"
"응. 나도 제이드가 먹는 걸로... 부탁해. 그런데... 저기 있는 라슈의 주문은 안 받아?"
"어-. 정말 언제 왔지? 뭐-. 그가 먹는 건 정해져 있으니까."
얀은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고 얼마 후 음식쟁반을 들고 나왔다. 알록달록
한 색깔이 들어가 있는 볶음밥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솜씨좋게 모양을 낸 것을 로인
과 제이드에게 내밀자. 로인은 건장한 체격에 어울리지도 않게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기름
에 볶아진 각종 야채와 고기, 밥의 고소한 냄새와 볶음밥에 첨가되어 있는 매콤하고 새콤한
특유의 소스의 냄새가 풍겨왔다. 볶음밥의 냄새를 맡으며 침을 삼키고 있는 로인의 모양에
웃던 얀은 주방에서 가져온 다른 음식이 담겨있는 쟁반은 들고 테이블 하나를 독차지하고,
사방에 싸늘한 기운을 퍼트리고 있는(얀의 눈에는 그의 곁에 스물스물하는 무언가(?)가 보
이는 것 같았다.)라슈에게 다가갔다.
"얀의 특식 '떡·볶·이'입니다. 널 위해 특별~히 만들었으니까. 맛있게 먹어."
싱긋웃는 얀을 본 라슈의 굳은 얼굴은 편안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그는 안경을 쓴 이지적인
타입의 청년이었는데 얀(제영)은 라슈를 보면 현실세계의 선영이 생각났다. 그 둘은 비슷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누군가 마음의 빗장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단단한 창살로 무장
하는 타입이라는 것이다. 얀은 처음 가게로 온 라슈를 보았을 때 그의 분위기를 읽었고 선
영을 대하던 대로 편안하게 다가갔다. 그 점 때문이었는지 라슈는 쉽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
었고 주변 사람들은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라슈와 서로 편하게 지내는 얀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얀은 라슈가 자기 말고도 친구들을 더 만들었으면 했지만 그의 마음은 아직까
지 자신이외에는 허락되지가 않았다.
"...맛있는걸. 처음보는 특이한 음식이지만...."
특이한 빨간색의 음식을 묵묵히 퍼올리는 라슈를 바라보던 얀은 그가 오기 전부터 준비했던
말을 떠올리며 약간 머뭇거리더니 이내 말을 했다.
"아직도 아버지와 싸우고 있어...?"
"...... "
"이 말은 그전부터 너에게 꼭 하고싶었는데-,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좀 걱정이 되더라고,
그래서 못했는데, 아무래도 말을 해야지 맘이 편할 것 같아. 부담은 갖지 말고 들어줘-.
나는 말이지... 네가 원하는 것을 했으면 좋겠어-. 너의 인생은 네가 만드는 거니까. 내가 함
부로 참견할건 아니지만 말이야.
뭐-. 난 너의 친구잖아. 힘든 일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얘기해, 그렇게 도움이 되진 않겠지
만 얘기를 하면 그래도 속은 편해질 테니까."
"...... "
얀은 그의 등을 두드려주고 일어섰다.
"조금 맵기는 하겠지만 나의 사랑을 듬뿍 담았으니까.. 남기면 죽-어."
"....고마워..."
짜식, 선영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다니까. 중학교 때 만난 그녀도 부모님문제로 고민을
했었다. 완전하게 그녀의 마음의 문을 여는데는 1년의 시간이 걸렸으니까. 라슈도 그 정도는
기다려야 할거다. 처음부터 급하게 생각할 건 없다. 조금씩 그에게 도움이 되면 되니까...
라슈가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라슈를 보석상을 맞길 생각으로 수도에 있는
타이리쉬 학교에 보냈다. 유명한 현자와 기사들로 유명한 그곳은 다른 나라에도 꽤나 알려
진 곳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그런 점이 장사에 도움이 될 거란 생각으로 자식들 중 머리가
제일 좋은 그를 그곳으로 보낸 것이었는데, 그가 공부에 재미를 가지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
었다. 그는 학자가 되길 원했고, 아버지는 그가 원래대로 보석상을 맞길 바랬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것 때문에 학업도중에 내려와 그의 아버지와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다 잘되었으면
했지만 세상사 맘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오직 그가 생각을 잘해서 판단하기를 바랄 뿐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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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라슈의 설명을 주저리 쓴것은 글쓸것의 밑바탕을 깔아놓은 것이었는데요.
이야기가 너무 길어진다고 해서, 등장인물 한명을 제거해 버리면서..;
뒤에 라슈를 만날 이야기가 팍 사라졌습니다.
어차피 쓰지도 않았으니 다행이기도 하지만...(머리쓰고 있는 제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