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antasy in dreams... <20> 희망
따사로운 햇살이 창문을 통과하여 한 남자를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아무것도 느끼
지 못하는지 멍한 얼굴로 방안에 놓여져 있는 텅빈 갈색 의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홀쭉해
져 있는 그의 얼굴위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 아직도 저러고 계신거야."
"정말. 그 소문이 진짜였나봐."
궁성 안의 메이드 차림새의 시녀들은 그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기사의 소문을 듣고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재잘대며 몰려들었다. 3왕자가 사라진 후 조용한 정적만이 감도는 4
궁전에는 그런 그들을 제지할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정작 그 구경거리가 된 기사는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있기만 할뿐이었다.
떠들고 있는 그녀들 뒤로 중후한 중년 남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잠시만 비켜주시겠소."
그 목소리에 황급히 뒤돌아 본 그녀들은 그가 청의 기사단장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앞다투
어 방안에서 빠져나갔다. 그들이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그는 방문을 닫고 조용하
게 앉아있는 기사곁으로 걸어갔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청의 기사단장이 입을 열었다.
"제롬. 이런 행동이 왕자님에게 누를 끼친다는 것을 모르느냐?"
멍하니 의자만을 바라보고 있던 제롬은 그의 음성에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아버지..."
"그래도, 사람은 알아보는 구나."
"..아..버지는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실 수 있는 거죠..."
"....내가 침착한 걸로 보이느냐..."
"......... "
"그래-. 다른 사람 눈에도 그렇게 보이겠지.... 불경스런 말일지 모르지만-, 얀 왕자님은 7년
동안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난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비통함을 억눌러야만
했다. 냉정해져야하기 때문에-, 7년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뉴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얀이 언제나 앉아있던 갈색의자를 쓰다듬었다.
"7년전 호위기사였던 난 테실라님과 얀님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 아무리 적의 수가 많
았다고 해도 그건... 나의 실책이었다. 그 뒤로는 너와 너의 어미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지.
미안한 말이지만, 난 그날의 악몽에만 잡혀있어서 얀 왕자님을 신경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 그러면서 점차 나만을 바라보는 그분이 아들처럼 느껴지게 되었지-. 너에게는 사랑조차
주지 못한 아버지인 내가 말이야...... 미안하구나..."
"...미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저..또한 마찬가지니까요...
그때의 제 머리속에는 저를 사랑해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불평만이 있었지, 제가 아버지
를 사랑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저도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단지, 지금에 와서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얀님을 원망했다는 겁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
렇게 함께 지낼 날이 얼마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면.... 결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원망만 하고 지냈던 지난 7년의 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제롬은 고개를 들어 제뉴인에게 시선을 맞추며 자조에 찬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얀님은 7년 동안 원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버지를 그분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했으니까요....
3개월전 분을 못참고 아버지를 찾아왔을 때 그분을 처음 보았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우습
지만, 아버지와 할말도 못하고 그분과 단둘이서 이 방에 남겨졌을땐 난감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그분의 기분을 느꼈습니다. 두려움이었지요-. 저의 무의식속에 잠들어있는
그분에 대한 원망을 본 것이었죠... 저는 당황했습니다. 한번도 남의 상황을 염두해두지않던
제가 말입니다. 안절부절못하던 제가 그분의 손을 잡았을 때 그분은 온몸으로 저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전 그 분의 도움이 되고 싶었던 건데-. 호위기사라는 임무를 다하지 못
하고... 그분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러는 것이 그분의 명예에 손상이 가는 것을 알지만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
다. 그래서 얀님이 사라진 이곳에서 그분을 지키지 못한 저를 자책하려 했습니다...."
"부전자전이라는 건가..."
"예..?"
"네가 하는 실수가 7년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말이다-."
"........... "
"이러고만 있을 거냐?"
"......?!"
"네가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면 7년전의 나와 마찬가지로 정작 필요한 것을 잃을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워프가 된 장소도 어디인지 모릅니다. 이 넓은 케탄 대륙에서
그분을 어떻게 찾습니까."
"이렇게 손놓고 있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
".......!!"
"너에게는 살아온 날들보다 많은 세월이 남아있지 않느냐...
온 힘을 쏟아 붓는다면 설마하니 그분의 흔적이나마, 못 찾겠느냐? 젊은 혈기가 있을 때 후
회가 되지 않을 행동을 하거라."
"저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제가 떠난다면 파나인가에 누가 되는 일. 가문의 명
성은 저로 인해 큰 오점을 남기게 될 겁니다!"
"뭐-. 기사직을 내놓는 정도밖에 되지 않겠느냐."
농담을 하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제뉴인을 보던 제롬은 주저하며 말했다.
"그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왕자님과 저 사이의 소문을 더욱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하하하. 너도 알고는 있었구나. 난 내 아들이 순진해서 그런 소문은 알지도 못 하는지 알았
는데..."
"심각한 일입니다. 웃지 말아 주십시오...."
제뉴인은 굳은 의지가 담긴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나도 그것 때문에 고민은 했다. 하지만.... 어차피 결론은 하나지 않느냐? 넌 기사다.
기사의 의무가 뭐지? 목숨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주군에게 맞기고 따라야 한다. 헌
데, 너와 난 그러기에 앞서 더욱 중요한, 지켜야할 것을 잃고 말았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지키지 못하는 기사는 기사라 할 수도 없지. 아직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 그분
은 살아 계셔. 다른 문제는 그분을 찾고 나서야,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
제뉴인은 빙긋이 웃으며 제롬의 두 어깨에 손을 얹였다.
"7년동안 너를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던 내가 방패막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너와 나를
위한 일이라면 더욱더-. 나도 그 동안 놀은 것은 아니란다. 가문의 어르신들을 설득하고 다
녔지... 5년동안은 내가 어떻게 막아 보마. 그 안에 꼭 얀님을 찾아와야 한다."
"저도, 거기에 끼워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젊은 남성의 음성에 놀란 제뉴인과 제롬은 문가를 바라보았다. 문가에
는 단정한 황금빛 금발의 미청년이 서있었다. 제롬과 제뉴인은 자신들을 놀라게 한 장본인
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무릎을 꿇었다.
"왕세자님을 배옵니다."
"영접하지 못한점을 용서해주십시오."
"이런... 어서 일어나십시오."
제뉴인과 제롬은 왕세자 미르가 의자에 앉자, 그의 곁에 가서 섰다. 미르는 그들의 눈을 차
례대로 대하고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을 꺼냈다.
"왕세자의 체면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지만 두 분이 하시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제
가 부탁하고 싶던 것이었는데, 다행이군요-. 제르미스경 부탁드립니다. 부디 제 동생을 찾아
주십시오. 저보다 더 따랐던 당신이라면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것은 왕실
승인서입니다. 국왕의 도장이 찍혀 있는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물론이고 외국의 경우에도
통행증을 따로 끊지 않고 사신의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일을 맡아주시겠습니까?"
제롬은 미르의 눈에 시선을 맞추며 확신이 서린 어조로 말했다. 그의 눈은 불타오르고 있었
고 3주 동안 굶다시피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목소리였다.
"네-. 꼭 얀왕자님을 찾고 말겠습니다."
"그럼... 부디, 행운의 여신 카르디오나가 함께 하길 빌겠습니다."
미르는 일어서서 그들을 바라보았고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그를 배웅하였다.
미르는 얀의 처소를 추억에 잠긴 눈으로 바라보며 걸어 나왔다. 그의 눈가는 촉촉히 젖어있
었다.
왕세자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지금 처리해야할 왕세자로서 책임지워진 일이 없었다면 얀을
찾는 것는 제르미스경이 아니라 자신이었을 것이다. 겉껍질만이 남아있더라도 그 아이는 나
의 동생이다. 영혼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 아인 나를 돌아봐 주었다. 이대로 그를 잊을 수 없
다. 그 아이를 빼앗아 간 것이 누구란 말인가! 미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얀의 처소에서
나오는 순간 궁성벽을 팔로 쳐버렸다.
"이런-. 왕세자님. 진정하시죠."
미르가 고개를 들자 벽에 기대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재상의 모습을 발견했다.
"뒤안 경. 이곳은 웬일이십니까?"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에게 놀란 미르는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뭐-. 세자님과 같은 이유죠. 제가 사랑하던 사람의 자취를 보기 위해서랄까요."
뒤안은 안경을 고쳐쓰며 말했다. 그 바람에 안경에 감추어져있는 그의 은빛 눈이 드러났다.
높은 도수의 뺑뺑이 안경은 그의 아름다운 외모를 가리고 있었다.
"잘 하셨습니다. 왕세자님께서 발동이 걸리지 않으셨다면. 제가 찾으러 돌아다녔을 테니까
요. 이 정도면 저의 협박은 잘 들으셨겠죠. 세헤르나의 문서의 반은 제가 처리하고 있으니,
제가 손만 떼면 세헤르나의 경제와 정치가 멈추는 것은 금방이죠..."
그는 은빛눈을 차갑게 번뜩이며 말했다.
"제르미스 경이라면 저도 믿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크리스는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겁니
다."
뒤안은 말을 끝내고 뒤돌아 걸어갔다. 그의 긴 은빛머리가 찰랑이며 미르의 몸을 스치고 지
나갔다. 가시를 품은 장미의 향기처럼 매혹의 향이 미르를 감쌌다.
미르는 아찔해져옴을 느끼고 머리를 흔들었다. 향기가 아닌 뒤안의 특유의 느낌은 미르를
취하게 만들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복도에는 그만이 서있었다. 미르는 자신의 왕궁
으로 돌아가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뒤안은 얀을 세례명이 아닌 성인이 되었을 때 쓰는 이름(결혼 후 사용)으로 불렀다. 그의 뛰
어난 두뇌로 그렇게 부른다면 어떤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이유를 모르겠구나...
이제는 얀을 찾는 문제가 아니라 뒤안의 말을 가지고 고민을 하는 왕세자였다.
==========================================================================
여기서 세헤르나 왕족들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지 말씀들이죠. 그래봤자. 미르, 유네, 얀 이
지만....
미르의 풀 네임은 - 카드란 네오 미르 세헤르나 (20세)
유네의 풀 네임은 - 유키리온 네오 반 세헤르나 (19세)
얀의 풀 네임은 - 크리스티앙 네오 얀 세헤르나 (18세)입니다.
사실은 외국이름은 first name이 이름이고 뒤가 성이라는 것 밖에 몰라서 제 마음대로 지었
답니다.^^; 다른 분들의 소설 이름을 정리해 보아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서요.
첫 번째 이름은 성인이 되었을 때 쓰는 이름이에요. 세헤르나에선 결혼을 해야지 완전한 성
인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20세가 되면 성인취급을 해주긴 해도 첫 번째 이름을 받을 수
는 없어요. 결혼을 해야지 first name이 주어집니다.
두 번째 이름인 네오는 왕위 계승권이 있는 왕자들에게만 내려지는 칭호랍니다.
세 번째 이름은 세례명이에요. 왕자들이어서 주신의 신전에서 성황(聖皇)에게 직접 받은 이
름이죠. 보통 아명(兒名)(결혼 전까지)으로 쓰여요.
마지막 이름인 세헤르나는 세헤르나국(國)의 적통(嫡統) 왕족에게만 부여되는 이름이죠. 즉
왕자, 공주 등의 성(姓)이예요.
여기서 예외인 것이 유네의 경우인데, 유네는 12살때까지 쓰던 반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자
신의 애칭인 유네를 스스로 사용한다고 설정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로 누구보
다 월등하지만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스타일입니다.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행동을 자
주했죠. 그러다 자신의 생모(生母)인 왕비가 저지른 악행을 12살때 알게 된 후 권세에 회의
를 느끼고 왕위에 관심이 없다는 결심으로 왕자들의 아명인 세례명을 버리고 자신의 애칭을
사용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