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하루의 피곤함을 잊게 해주는 밤의 여신의 힘은 그들(얀과 테드)의 작은 오두막
집에도 내리고 있었다. 이미 밖은 어두컴컴해졌고, 밤의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인간들의 집인 그곳에선 어둠을 격퇴시키는 따스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따스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창가로 다가가서 그 안을 들여다보면 녹색으
로 예쁘게 칠한 동그란 탁자에 머리를 괴고 앉아있는 청은발의 아름다운 소년
을 볼 수 있었다.
그 소년은 무슨 고민이 그리도 많은지 아름다운 눈썹을 찡그려가며 땅이 꺼져
라 한숨을 쉬어 대었다. 땅의 정령 노움들은 그의 한숨에 질려버렸는지 멀찍이
떨어져서 그의 그런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의 그런 행동은
청초한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도록 하였으며 더불어 외모의 아름다움을 배가
시켰다.
수심이 가득한 그의 얼굴은 보는 사람(정령?)의 가슴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바
람의 정령 실프들도 그의 한숨이 그녀들을 밀어낼 때마다 파도처럼 밀려갔다
되돌아옴을 반복하며 그의 곁에서 맴돌았다. 이리저리 흩어지면서도 그의 얼굴
을 만져보고 싶은 욕심이 그런 행동을 부추겼다.
그의 몸에선 이 땅을 창조한 그들의 아버지와 같은 친근함이 흘러나오고 있었
다.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그 기운이 느껴졌을 땐 그들은 너무도 기뻐 그에게
다가갔지만 그는 그들의 말을 듣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그가 깨닫지 못하는 이
상, 실체화되지 못하는 정령들은 아쉬움에 그의 곁에서 머물렀고 그를 지켜보았
다. 그래서 오늘은 더욱더 슬퍼하였다. 그의 도움이 되지 못하므로....
얀이 계속 한숨을 쉬자 테드는 곤혹스러운 듯 이마를 찡그리더니 참고 있던 궁
금증을 터트렸다.
“무슨 걱정 있어?”
“걱정은-요. 아니에요. 먼저 자요, 형-.”
얀의 이마에는 ‘나는 걱정 많은 사람이요.’ 라고 쓰여 있었지만 말할 생각을
않는 그였기에 테드는 더욱 물어보지 못하고 포기했다.
“그럼, 하-아, 난 졸-려-서, 이만 들어갈게....”
“잘 자요-.”
형이 들어가는 것을 본 얀은 거실 식탁 위의 램프 불을 더욱 작게 하고는 탁자
에 엎드렸다. 그의 뇌리에 캐시의 마지막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소문은 믿을 것 없다]는 건 사실이지만, 리네스가 한달전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해. 한달전에 리네스가 너에게 차였다는 사실은 누구나
(?) 아는 거니까, 발뺌할 생각 말고, 잘 생각해봐. 그런 콧대가 센 타입일수록
실연의 아픔은 오래가는 법이라고. 네가 잘 생각해서 행동해. 너의 행동에 한
소녀의 일생이 달렸으니까-. 여자의 마음에 생긴 상처는 오래가는데다가 그 여
파는 무섭다는 건 알고 있겠지?’
제이드...!! 그런 소릴 퍼트릴 사람은 아마 그 녀석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이랑
무슨 원수가 졌는지..... 내일 만나기만 해봐! 얀은 탁자에 엎드린 채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문제는 풀리지 않고 머
리만 복잡해져갔다.
얀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했다. 친구들과 같이 온 그녀는 자신을 시종
을 부리듯 대했다. 기분은 나빴지만 종업원인 이상 감수해야할 부분이었기에 처
음에는 친절하게 대했다. 하지만 그녀는 ‘좋은 아침’에 자주 들렸고 그때마다
공주병 말기암 증세를 보이면서 자신을 괴롭혔다. 평소 경멸해오던 타입이다 보
니 의식적으로도 또 무의식적으로도 냉랭하게 대하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
면 어린애 같은 행동이었다.
그녀의 행동을 짜증나게만 생각하던 얀은 리네스에게 한 행동들을 하나씩 되짚
어보자 가슴 한구석이 뜨끔해졌다. 같은 찻집의 손님인데도 친구라고 편하게 대
해주던 사람들과 달리 너무 차이가 나게 그녀를 대했다. 그녀가 느낄 당혹감을
생각지도 않았다. 바로 옆에 서있는데도 생각 없이 내던진 말들, 그녀를 대하던
태도, 자신이었어도 화가 날 것이다. 그때 머리 속에 스쳐지나가듯 마지막으로
그녀가 보인 표정이 생각났다. 상처받은 표정... 자신은 그것을 보면서도 위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얀은 얼굴이 화끈거려 밤새도록 잠을 이루
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뒤척거렸다. 내일은 꼭 그녀에게 사과하러 가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서야 그는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난 얀은 평소 때 하지 않던 행동을 함으로써 테드를 또 다시
곤혹스런 지경에 빠뜨렸다.
“형, 이거 어울려?”
“............”
얀이 안 어울리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는 벌써 13번째 옷을 들었다 놨다
하며 테드를 들볶았다. 자신이 깨도 아니고, 더 이상은 못 참겠다.
.
“...얀, 아까 7번째로 입었던 것이 제일 잘 어울려-. 흠흠.”(--;)
“어-. 정말? 형 고마워.”
정말이지 얀은 푸른색이 잘 어울린 다니까. 역시 동생하나 잘 뒀어. 흐뭇한 마
음으로 흰색 셔츠 위에 파스텔 톤의 푸른 조끼를 걸치고 그 아래에 연한 푸른색 바지를 입고 나와 옷차림새를 정리하고 있는 얀을 바라보았다. 쌀쌀한 바람
을 막아줄 수 있는 무릎 위까지 오는 정장 스타일의 카디건(가디건)을 걸치자
더욱 완벽해 보였다. 빨간 끈으로 묶은 청은발과 단정한 옷의 조화는 예상외의
아름다움을 뿜어내었다. 일반적인 서민들이 입는 수수한 옷인데도 그가 입으면
귀족집안의 자제처럼 보인다는 생각에 테드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아침마다 이런 구경을 할 수 있는 자신이, 그리고 그런 동생을 가졌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자신을 뒤로하고 오두막집을 나서는 얀을 보며 손까지 흔들
어 주었다.
‘좋은 아침’에 출근한 얀은 볼일이 있다고 빌 아저씨께 양해를 구했다. 아저
씨는 쾌히 승낙을 하셨고 세스의 필살 째려봄을 여유있게 피해낸 얀은 즐거운
마음으로 물어물어 리네스의 집으로 향했다. 좀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그녀에게
빨리 사과하고 싶었다. 얀은 그녀의 집이 있는 도시 중심으로 내려가는 길에 히
아신스 꽃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꽃집을 보게 되었다. 무엇을 선물할지
고민했었는데 그녀에게 꽃을 선물하면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히
아신스 꽃을 한 다발 사 들었다. 꽃다발을 들어 꽃향기를 맡던 얀은 꽃다발에서
뭔가가 빠진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고
그 허전함을 채워줄 수 있는 묘안을 떠올렸다.
얀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묶고 있던 끈을 풀어서 꽃의 줄기에 예쁘게 장식하였
다. 그리고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장식을 하고서야 허전
해 보이던 부분이 매워지는 것 같았다. 연보라 빛의 귀여운 꽃망울들이 달려있
는 초록색 줄기는 리본모양으로 매여져있는 빨간 색 끈과 어울려 더욱 돋보였다.
얀이 그러고 서있는 동안 머리카락을 고정시키던 힘이 사라지자 힘을 잃은 머
리카락들이 풀리면서 불어오는 바람에 부드럽게 휘날렸다. 청은색의 머리카락들
이 그의 얼굴과 몸 주위에서 불꽃처럼 너울거렸다. 빨간 리본으로 장식되어진
히아신스 꽃을 든 미남자가 아름다운 머릿결을 휘날리며 서있는 것을 본 길거
리를 지나던 사람들은 눈을 떼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얀은 머리카락
을 가지고도 정지마법을 부릴 수 있다는 새로운 정신공격의 한 형태를 보여주었다.
그녀가 좋아 할 것이다. 자신의 진심이 담긴 선물을 받으면 기분이 풀리겠지-.
좋아할 그녀를 떠올리던 얀은 꽃을 바라보며 미소를 띄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있
는 얀의 눈에, 뭔가 이상한 것이 잡혔다.
어-, 뭐지? 이 파란 것은-?
얀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자신의 머리카락이었다. 어느새
풀린 머리카락들이 바람에 제멋대로 휘날려 자신의 모습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실프의 장난이었다. 빛을 반사시키며 아름답게 반짝거리
는 그의 청은발은 정령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귀신 역할을 맡으면 어울
릴 듯한 긴 생머리고 보니 놀라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
가 되었다. 자신의 추태를 깨달은 얀은 허겁지겁 주머니를 뒤적거려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하얀 손수건을 머리끈 대용으로 사용하려 펼치던 얀은 그것을 바라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지난주에 테드가 선물한 손수건이었던 것이다. 테드는 우습게도
여성들이 사용하는 레이스가 곱게 달려있는 아기자기한 손수건을 선물했다. 그
때 테드의 얼굴이란..... 푸-훗.
테드는 황당해 하는 자신을 보더니 당황해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나서 더
듬는 목소리로 자신이 고른 것이 아니고 여점원에게 예쁜 것으로 골라달라고
부탁 했었다며,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 아무래도 여점원은 테
드가 싱글벙글 웃으며 부탁을 하자 애인에게 줄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신경 써
서 골라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자신은 웃었고, 자신이 계속 웃기만 하자
나중에는 테드는 바꿔오겠다며 손을 내밀었지만 자신은 손수건을 접어서 주머
니에 넣으며 테드가 처음 선물한 것이니 바꾸기 싫다고 말했다. 사실인즉슨 이
러했다. 그 말도 맞긴 하지만, 친구들에게 테드의 실수담을 들려줄 증거물이 필
요했고 더 큰 이유는 테드의 곤란해하는 얼굴이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사악
한....--;)
휘날리는 머리채를 묶고 나서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즐거워진 마음이 그
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마치 춤을 추는 스텝처럼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미끄러지듯이 거리를 나아갔다.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채가 그의 걸음걸이에 따
라 좌우로 리듬감 있게 흔들거렸다.
노튼 양장점 다음엔 카리나 베이커리, 그 맞은편은 만물 잡화점이고... 여기까지
는 맞았고, 저기 보이는 황금집 여관에서 우회전을 해서 나가면 갈색 대문이 바
로 보인다고 했는데.... 얀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골목을 나섰고 자신이 찾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저것도 갈색 대문이냐.... (--;) 그의 앞에는 이름 모를 나무로 만들어진
육중한 대문(大門)이 있었다. 정말 크다. 그냥 아담한 집을 상상했던 얀은 그 집
으로 걸어가서 그 대문을 살펴보았다. 자신의 키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나무
의 갈색 결 무늬를 구경하며 손으로 대문을 집던 얀은 힘없이 그것이 열리는
바람에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본 얀은 열린 문틈 사이
로 서있는 노신사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얀을 바라보며 말을 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네-, 리네스양의 문병차....”
“아-. 아가씨의 친구분이셨군요.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노신사가 리네스양의 조부쯤 되리라 생각했던 얀은 내심 놀라워했다.
얀이 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자 노신사는 친절하게 말했다.
“저를 따라 오시지요. 아가씨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Name : 제너시스 Date : 04-09-2001 00:24 Line : 136 Read : 3559
[28] <차원 연결자-26.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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