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똑똑.
흰 폭의 화선지에 붉은 물감이 번지듯 하얗게 쌓인 눈 위로 붉은 색의 온기가
느껴지는 액체가 아롱져 떨어져 내렸다. 붉은 색의 그것들은 주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와 손목을 거쳐 땅위로 떨어졌다. 뚝뚝
떨어지는 피들은 눈 위에 아름다운 혈화(血花)를 피워내었다.
쿨럭.
고통스러운 듯 어깨를 수그린 그의 입에서 또 다시 피가 쏟아져 나왔다. 피를
쏟고 있던 그는 힘겨운 듯 오른손으로 입가를 닦으며 왼 손으로 자신의 곁에
있던 어린 나무줄기를 움켜쥐었다. 힘겨운 듯 왼손에 힘을 주고 일어선 그는 비
틀비틀 눈 위를 걸어갔다. 남겨진 어린 나무에는 선명한 다섯 손가락의 혈도장
(血圖章)이 찍혀있었다.
"제길-."
속된 말을 내뱉던 그는 힘이 다한 듯 두 무릎을 꿇으며 힘겹게 주저앉았다. 그
런 그의 주위로 풀어헤친 그의 청은발이 그의 치부를 가리려는 듯 허공에서 천
천히 내려와 그의 몸을 감쌌다. 눈에 반사된 달빛이 그의 몸을 덮은 청은발을
비추며 반짝거려 그가 있는 곳이 마치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그에게
서 느껴지던 피의 향내가 주변과 차단되는 것 같았다.
전방에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이 들리더니 남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얀? 얀 어딨니? 그만 들어와. 밖은 춥단 말이야."
"알..... 았어요. 곧, 갈테니. 먼저 들어가세요."
"얀? 어디 아픈거야? 목소리에 힘이 없어."
50m전방에 오두막에서 나오는 빛이 보이며 우렁찬 테드의 말이 들려왔다. 얀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형. 밤 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나봐요. 공기 좀, 더 들이마시다 들어갈게요."
"운동도 좋지만 몸 상하기 전에 어서 들어와."
테드의 마지막 말에 웃음을 지은 얀은 힘없이 흔들리는 무릎을 어렵게 고정시
키고 간신히 일어섰다. 얀은 테드의 말에 호응하듯이 힘을 주어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서 현기증을 느끼곤 자신의 오른 쪽에 뻗어있는 나무의
몸통에 몸을 기대고 숨을 골랐다. 얀은 자신의 입가에 고여있는 피를 발치에 뱉
어냈다. 온기를 가진 그것은 빠르게 눈 사이로 파고 들어가 흰눈을 붉은 색으로
변모시켜 버렸다. 얀은 자신의 입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었다. 그는 발
끝으로 흰눈을 쳐내어 붉게 변한 눈 위에 덮어 증거인멸을 하고는 길게 한숨을
뽑아 내었다.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지고 있는 눈으로 인해 거짓말처럼 그의 주
위에 점점이 뿌려있는 붉은 빛을 내비치던 그것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피가 입가에 얼룩져 있을 것을 염려한 얀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의 입에 문지르
곤 주머니에서 꺼낸 흰 손수건으로 닦아내었다. 하얀 손수건에 선명한 붉은색의
피가 찍히는 것을 보고 얀은 중얼거렸다.
"이런... 손수건을 빨간색으로 바꿔야겠군."
얀은 비틀대는 몸을 바로세우고 힘겹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숲을 헤치고 나아가는 얀의 뇌리에 어제 의사 선생님이 자신에게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몸에 이상이 없냐구?"
중년의 갈색머리의 의사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
했다.
"걱정하지 말게 모두 정상일세. 두 달 전의 그 사건 때문에 걱정했나본데... 근
육과 심폐기능 어느 것 하나 정상인과 다르지 않네. 결론지어 말하자면 지금 자
네의 상태는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최상의 상태란 말일세. 소문에서
들었던 대로 등에는 상처가 났던 흔적조차 없다네...."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내던 의사는 얀이 인사를 하고 나갈 때쯤에 그에게 인사
치레로 말하였다.
"허허. 괜한 걱정이 병을 만드는 법이네. 마음 편히 가지게."
하지만....
얀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건은 한달 전으로 돌아간다. 동굴사건 후 얀의 몸에는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았고 그는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냈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달이 되는 그날로부
터 일주일동안 피를 토해내었다. 물론 처음엔 조금씩 기침에 섞여 나오는 각혈
이었다. 그때는 사건의 휴우증이라 여기고 조심해서 몸을 움직였다. 각혈이외에
는 약간 힘이 빠지고 빈혈기만 있을 뿐 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별
로 걱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겐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다. 괜한 걱정을 끼칠까
봐... 일주일동안의 각혈 후 거짓말처럼 증세가 사라졌다. 몸은 그전과 같은 건
강한 상태였고 멀쩡해진 몸을 보고 안도를 했는데 한달이 지난, 그러니까 동굴
사건이 발생한 지 두달이 되는 3일 전부터 또 다시 각혈을 하는 것이었다. 주기
가 일정한 날짜들... 혼란스러웠다.
사건의 휴우증일까? 아니면.... 설마? 아니다. 아닐것이다.....
그 고역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머리에서 열이 나기 시작하자 얀은 차가운 눈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그의 손의
온기 때문에 눈이 물로 변하며 손에 묻어있던 피가 물과 섞여 떨어져 내렸다.
열을 식히는 냉기에 그는 멈칫하며 멍한 상태에서 벗어났다.
병명도 모르는 상태라니.... 그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피식 웃었다.
이런....
꿈의 세계에 들어온 후 한 달의 한번 마법(?)에 걸리는 날이 없어졌다고 좋아하
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생리통으로 고생을 하던 제영(얀)은 꿈에 들어온 후 그것을 제일 맘에 들어하였
다. 그러나 이제는 한 달에 일주일동안 각혈을 한다. 다행히도 생리통같이 심각
한 휴우증이 없어서 안도했지만 오늘의 상황을 보니 그런 생각마저도 자신에게
멀어져갔다.
몸은 달라졌을지라도 자신의 정신의 한구석에선 현실의 육체를 기억하는 건가?
아니면 그런 현실로 돌아가지 못하는 아쉬움에 노력할 생각조차 않는 자신에게
대한 몸의 반항인가? 경종을 울리는 것인가?
제길. 이제는 한달에 일주일씩 피를 토해야 하니.....
얀은 오늘 다른 때보다도 더한 피를 쏟게 만든 원인을 다시 시도해보았다. 역시
나 힘이 모이지 않았다. 같은 느낌을 갖고 여러 번 시도를 해봤지만 의지의 힘
을 쓸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돌아오는 것이라곤 지금과 같은 휴우증이다. 다
른 때는 기침을 할 때나 각혈을 하던 것이 이제는 조그만 움직여도 울컥하며
흘러나온다. 구토(嘔吐)가 아닌 구혈(嘔血)이 된 것이다. 거기다 약간 힘이 빠지
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다. 일주일동안은 힘을
사용하려 할 때마다 이래야 하는 건가? 힘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좋아했었는데...
다음달도 같은 경우가 될 거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얀은 이 증세가 자신을 계속 따
라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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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y in dreams(차원연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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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제너시스 Date : 04-09-2001 01:10 Line : 237 Read : 3588
[48] <차원 연결자-45.마음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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