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원연결자-46화 (46/127)

<45>

"싫어요!!"

"클로아...."

채색옻칠로 이루어진 아라베스크풍의 아름다운 장식의 방에서 두 여성의 상반

된 음성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꿈에나 볼 수 있을 듯한 아름다운 검은머리

소녀 앞에 서있는, 중년의 미부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중년 미부인이 못마땅한 듯 소녀는 머리를 돌렸고 그 바람에

비단결 같은 칠흑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가려져 있던 장신구가 들어났다. 굵게

웨이브진 검은 머리카락 한 움큼이 하늘빛의 옥으로 만든 8cm 가량의 (보석이

대롱대롱 달려있는)긴 대롱 안에 집어넣어져 있었는데 그녀가 머리를 돌리자

하늘빛 옥에 매달려있던 보석들이 옥 대롱에 부딪치면서 맑은, 여러 음을 연주

해내었다. 그 음악들은 투명하게 공기 중으로 울려 퍼졌다.(풍경소리를 연상하

면...)

입술을 깨물으며 무언가 말할듯 말듯 머뭇거리던 그녀는 결심을 굳혔는지 고개

를 돌리고중년미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 어머니와 같은 삶을 살긴 싫어요. 저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사랑하

고 결혼하는 그런 사랑을 꿈 꿨다고요. 왜 저의 슬픔을 이해해 주지 않으시는

거죠. 제가 간절히 바랬던 소망이 깨졌단 말이에요. 그 사람이 죽은지 4달밖에

안되었는데, 이제는 다른 여자들처럼 여러 부인들 중 하나가 되라고요? 전 싫어

요. 그 늙은 대신 토드란에게 시집을 가느니 죽겠어요.

그건 나라와 나라간에 맺어졌던 혼약이었어요. 그것도 왕들이 약속했던 태중약

혼(泰重約婚)이라구요. 그런 나라간의 언약이 아침 이슬과 같이 사라졌어요. 충

격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그 사람이 죽은지 4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과 결혼을 생각해보라니요? 태중약혼을 했던 왕자가 거의 죽은 상태나 마

찬가지였다는 것은 저도 들어서 알고있었어요. 그래도 그런 사람이었느니 나만

을 바라봐 줄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12년 동안 그날을 꿈꾸며 기다렸는

데... 너무 허망해요. 그 간절한 기다림이 한낱 휴지조각보다도 못하다니..."

"클로아... 또 억지를 쓰는구나 너도 그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잖아.

그래도 전례(前例)을 깨고 수절(守節)이 아닌 다른 기회를 주시는 모하드님께

고맙지도 않니? 너에게 이번에 혼담이 들어온 두 곳도 그 사람에 못지 않단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것은 너도 알고 있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고맙게 여겨야

하는 건 폐하께서 직접 청을 넣어주셨단 사실이다."

중년의 미부인은 안타까운 듯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를 시선을 받은

클로아는 울컥하는 마음을 참으려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신을 바라보았다. 그

녀는 치마 끝에 나와있는 보라색 비단신에 수 놓여진 당초무늬를 바라보며 마

음을 가다듬었다.

차라리 수절하는 것이 낫다. 물론, 자신이 결코 그 사람(태중약혼을 한 왕자)을

위해 수절을 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그 만큼 새로 청혼이 들어온 사람들이 싫었

던 것이다.자신이 어머니에게 했던 행동은 그 청혼자들에게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빚어낸 연기(演技)였던 것이다.

자신은 단지 이곳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누구든 좋다고 생각했었다. 병든 남

자이든지 지위가 낮던지. 이곳은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답답한 감옥이나 마찬가

지였던 것이다. 지긋지긋한 이곳에서 탈출 할 수만 있다면 청혼이 들어온 상대자

들을 관심조차 두지않고 허락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 혼약이 깨어지면서 새로 들

어온 청혼들의 주인공들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송두리째 바뀌게 만들었다.

그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60세의 내무대신 토드란.

라크람의 숨은 실력자라 불려지는 인물. 그래 그의 마지막 부인이 된다면 평생

을 편히 놀고먹을 수 있겠지. 언니들처럼 남편의 다른 부인들과 싸울 일은 없을

테니까. 자신은 그의 부인들의 딸이나 손녀들의 나이와 비슷할테니 다른 부인들

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생각하니.... 한기가

스쳤다. 돈냄새가 물씬 풍기는 남자였다. 열 손가락에 덕지덕지 껴져있는 호화

찬란한 반지들하며 방을 굴러다닐 것 같은 몸매, 얼굴에 껴있는 개기름, 자신을

바라보며 웃던 탐욕스런 눈동자,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었다.

(인물 설정: 시간 탐험대<돈 데크만?인가>에서 터번쓴 숏다리 마법사)

페이든 황태자.

지금 라크람 왕국과 아파넨 제국의 친선 도모차 온 아파넨의 황위 계승자. 외모

나 기품, 학력 모두 나무랄 때가 없다. 아파넨 제국의 태자비가 될 수 있는 기

회인데 뭘 망설이느냐고 시녀들은 자신에게 말을 하지만 그들은 모르는 사실이

있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은 피의 황태자....

황위 계승 문제로 아파넨 제국 안에는 피의 바람이 몰아쳤다. 그 싸움에서 승리

한 것이 4 황자였던 페이든 황자. 그는 무자비하다 싶을 정도로 다른 형제들을

지지했던 가문들을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숙청했다. 그 와중에 자신의 암살을

의뢰했던 친형제들도 모두 가차없이 제거했다. 자신에게 해가 된다면 조금의 인

정 사정없이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얻게 된 이름이 피의 황태자였다.

날카로운 그의 시선을 생각하던 클로아는 흠칫했다.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려왔

다. 그런 사람과 평생을 사느니 결혼 안하고 만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한 그의

저의(底意)도 의심스러웠다. 파혼된 상태라고 하나 자신은 아파넨과 적대국인

세헤르나의 왕자와 혼약(婚約)한 사이였었다. 적대국의 왕자가 파혼(破婚)한 여

자를 왜 지목했는지 모르겠다. 황태자 자신의 소문만으로도 나라안이 시끌벅적

할텐데 가라앉힐 생각은 않고 더욱 자신을 비난할 소지를 만들다니....

적국이 버린 여인을 황태자비로 뽑았다느니 하는 소리로 나라안이 어지럽게 될

것은 안 보아도 뻔했다.

중년부인은 클로아의 얼굴표정을 살피고는, 그녀의 기분이 가라앉았다고 생각했

는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넌 라크람의 공주 '라 클로아피아 타일로세'야. 일국(一國)의 공주가 자기하고

싶은 데로 모든 것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니?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희

생할 줄도 알아야해. 네가 아파넨국과 약혼만 한다면 두 나라간의 우의를 더욱

돈독히 맺을 수 있을 거야. 아파넨 제국은 떠오르는 신성(新星)제국이야, 그만큼

우리 왕국에 이득이 된다는 걸 모르겠니?"

"왜 사실대로 말씀하지 않는 거죠. 전 단지 27번째 후궁의 딸일뿐이라구요. 공

주도 그 무엇도 아니예요. 80명이 넘는 공주들.... 공주의 가치가 있던가요? 그런

제가 왜 왕국을 생각해야하죠? 훗, 제가 태자비라도 돼야지 어머니에게서 멀어

진 폐하의 관심을 받을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에요?"

찰싹-.

중년부인은 소녀를 때린 후 떨고있는 자신의 손을 잡아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 그녀가 말했다.

"가,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 내가 너를 잘못 키웠구나...

너의 재능을 어여삐 여겨 그런 혼처까지 마련해주신 모하드님에게 부끄럽지도 않니?"

"흥. 모하드님? 아바마마도 아닌....

그래요. 제가 관심을 받았다는 것은 인정하죠. 언니들처럼 여러 명의 부인 중

하나가 아닌 당당한 세헤르나국의 왕자의 약혼녀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희망도 사라졌어요. 이곳에서 결혼 못하고 늙어죽으나 돈만 아는 뚱뚱한

늙은이에게 시집가나, 피에 미쳐있는 사내와 결혼하나 그게 그거라구요.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클로아는 쩌렁쩌렁하게 방안이 울리도록 소리치고 방밖으로 뛰쳐나갔다. 달리면

서 맞받는 바람이 머리위로 쓰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가리는)실크로 만들어진

흰 레이스 천을 정신없이 휘날리게 만들었다. 차가운 눈물방울이 그녀의 얼굴선

을 따라 곡선을 그리며 땅위로 드문드문 떨어졌다. 방밖의 커다란 파티오[中庭]

를 가로질러 정신없이 뛰어가던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멈춰 서게 되었

다. 앞으로 쓰러질 뻔했던 그녀는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거칠게 잡아챈 인물을

노려보았다.

자신의 오른손목을 거칠게 잡아챈 인물.... 그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망사 천

사이로 보이는 클로아의 얼굴을 보고있었다. 자신을 멈추게 만든 인물이 누구인

지 알게된 그녀는 입을 앙 다물고 부들부들 떨더니 왼손에 힘을 주고 그의 뺨

으로 올려붙였다.

'찰싹-.'

"당신 따윈 보기도 싫어!!"

빨갛게 부어오르는 뺨을 매만지며, 자신을 때린 여인이 달려가는 뒷모습을 웃으

며 바라보고 있는 주군을,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던 사내가 말문을 열었다.

"황태자님, 저런 여성이 어디가 마음에 들어 선택하신 겁니까?"

팔을 들어 무언의 저지를 한 페이든은 자신의 입 속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침

묵을 담고있던 입술을 열었다. 차가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미성이었다.

"재미있지 않나? 죽어 있는 눈빛이 아니야. 여성권의가 살아있다는 크로나국에

서도 보지 못하는 순종(純種)의 눈빛이지. 그녀의 눈빛엔 불의 기운이 담겨있어.

말 한마디로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정열적인 생명력이네. 사람의 기운을 흥하

게 하고 한순간에 파괴해버릴 만큼...."

그는 뒤돌아 서서 사내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가 웃고있었다.

"내 아이를 낳을 여자가 저 정도는 되야 하지 않나. 피의 황태자와 어울리려면

말이지...하하하하"

히스테릭한 그의 웃음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던 사내가 머리를 가로 저으며 말

했다.

"하지만... 그녀는 적대국의 왕자가 파혼해버린 공주입니다. 그녀를 황태자비로

맞이한다면... 태자님의 위신에...."

"뭐, 내가 더 나빠질 것이 있나?"

"........?!"

"난, 태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5명의 형제들의 피를 이 손에 묻혔네. 더한

것이라도 할 수 있는데... 평판정도야....."

"그렇지만......."

사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그 모습에 피식 웃어버린 황태자는 자조

하듯 말했다.

".......아무말 말게..."

다시 싸늘한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던 황태자는 사내를 지나쳐 자신이 기거하

는 별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내는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커다랗게 보였던 태자님의 등이 오늘따라 작아 보였다.

사내- 사워 크라우트 후작-는 태자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죽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 없지 않았습니까? 그건... 정당방위였습니

다. 먼저 공격한 것은 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렇게 되신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분은 태자님을 대신해서 죽음을 택하신 것입니다. 왜

솔직히 말씀하지 못하십니까. 그분이 그립다고. 아직까지 아픈 눈을 가지고 계

시면서 측근인 저한테조차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크라우트 후작은 복잡해져 오는 머리를 흔들었다.

훗, 어차피 꺼내지 못할 말.....

그는 클로아 왕녀에게서 태자를 대신하여 죽은 그분-태자의 약혼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활기에 찬 눈동자, 밝은 웃음,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분을 다

시 본 줄 알았을 정도로 놀랐었다. 태자님은 왕녀에게서 대리 만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하지 못하신분.....

태자의 유약한 성격은 그 사건 후 180도로 달라졌다. 더 이상 부드럽고 착하기

만한 분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 죽는 것을 태연히 볼 정도로 차가운 성격에 피

의 향내가 그에게서 떠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후작은 믿고 싶었다.

자신을 보며 천진하게 웃던 검푸른 머리의 소년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

아라베스크란 아라비아풍을 가리키는 뜻입니다. 말이 예쁘죠? 그리고 왕녀가 쓰고 있는 쓰

개는 차도로(북부 인도,이란 등지의 이슬람 교도 여성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머리에서 어깨로 뒤집어쓰는 네모진 천)형식이지만 투명 베일이어서 얼굴을 감춘다기보다

장식으로 쓰입니다.

새로운 인물등장이군요. 다음 이야기를 위한 바톤 터치입니다.

파티오(중정)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마당을 말합니다. 유식해보이죠?

--------------------------------------------------------------------------------

Back : 49 : <차원 연결자-46.여행> (written by 제너시스)

Next : 47 : <차원 연결자-44.금제의 발현> (written by 제너시스)

--------------------------------------------------------------------------------

--------------------------------------------------------------------------------

Total access : 314050 , Current date and time : Tuesday 9th April 2002 15:20:02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Fantasy in dreams(차원연결자)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제너시스  Date : 04-09-2001 01:11  Line : 234  Read : 3500

[49] <차원 연결자-46.여행>

--------------------------------------------------------------------------------

--------------------------------------------------------------------------------

Ip address : 211.183.163.8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KORNET)

- Fantasy in dreams.... 여행~...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