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고백제 (3)
갑자기 자신을 잡아끄는 손길에 얀의 몸은 멈춰 세워졌고 얀은 놀란 눈으
로 뒤돌아보았다.
"디아스?!"
자신을 뒤로 잡아챈 인물은 디아스였다. 디아스는 힘들게 달려왔는지 숨
을 헐떡이며 입을 열지 못했다. 얀은 거칠어져 있는 숨을 가다듬으며 디
아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목을 잡고있는 디아스를 바라보며 얀은 빨리 말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쏘아보냈다. 지금까지 뛰어왔기 때문에 디아스는 얼굴 가득 열기
로 달아올라 있었고 무척이나 미안해하는 낯빛이었다. 숨을 고른 그가 말
을 했다.
"지금 생각난 게 있거든... 시간도 없는 상황에서 이런 말해서 미안한데,
고백하기에 앞서서 꼭 준비해야 할 것이 있어. 먼저 가줘."
"뭐?"
"곧 뒤따라 갈 테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보다 늦게 가면, 고백할 기회가 완전히 사라질텐
데, 어떻게 하려구."
"그래서 먼저 가달라는 것 아니야. 네가 어.떡.해.서.든 시간 좀 끌어달라
고, 내가 늦을 때엔 말이야."
순진한 소년이라고만 생각했더니 헬레나와 관계된 일에는 인정 사정없다.
"........."
"그럼 잘 부탁할게."
디아스는 달려가며 뒤돌아 손을 흔들었고, 얀은 허탕한 듯 힘없이 같이
흔들고 있었다.
얀은 멀어져가는 디아스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다가 몸을 돌려 자신
의 고지를 바라보았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달려왔던 얀은 사람
으로 가득 찬 그 길이 얼마나 달리기 어려운지 알고 있었다.
어디해볼까.
두 손을 불끈 쥔 얀의 입가에 미소가 생겼다. 숨을 한번 들이키고는, 그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등뒤에서, 이마에서 땀이 흐른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거친 숨소리가 자신
의 귓가에 들려온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 자신의 한계를 시험한다.
사람들에게 부딪히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비켜서서 달리는 것도 묘미.... 얀
은 자신의 상황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퍽.
복잡한 길에서 달리는 요령을 터득했다고 자신만만해 하던 얀은 달려가다
골목길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과 부딪쳐 나동그라졌다. 얀에게 부딪쳤
던 사람도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 건물 벽에 몸을 부딪치고 말았다. 벌
떡 일어선 얀은, 자신이 조심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기 때문
에, 미안해하며 머리를 부딪쳤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매만지고 있
는 청년에게 한걸음에 달려갔다. 얀은 부끄럽고 겸연쩍은 마음이 들어서,
고개를 숙이며 청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죄송합니다.... "
꽤 아팠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청년은 고개를 들어 얀을 바라보았다.
얀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이채(異彩:분위기나 느낌이 다른 것에 비해
눈에 띄게 다른 상태.)를 띄었다. 가만히 얀을 바라보던 그는 팔을 내밀어
벽을 집고 일어섰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던 청년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닙니다. 조심하지 않는 저의 잘못이죠. 그런데... 바쁘신 것 같군요. 이
렇게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얀의 모습에서 사정을 짐작한 청년은 웃어 보이
며 말을 했다. 청년의 말에서 자신의 할 일이 생각난 얀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요 빨리 가봐야합니다. 실례를 저지르고 이렇게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급한 일이라는데 어서 가봐야죠. 그 대신 잠깐만...."
청년은 자신의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다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세요."
청년은 상처가 나있는 얀의 손을 손수건으로 싸주며 미소를 보였다.
"어서 가보십시오."
청년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그럼..."
멋쩍어 하며 청년이 손수건으로 만지작거리던 얀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뒤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클라우드 님....."
골목의 그림자에 숨어있던 남성이 얀을 배웅하고 있는 밝은 갈색머리 청
년의 등뒤로 다가왔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달려가고 있는 얀의 뒷모습
을 바라보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신호를 하셔서 다가오지 않았지만.... 왜 갑자기 상관하지 말라고 하신겁
니까?"
청년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하지 않고, 거리를 걸었다. 청년을 쫓는
남성은 아무 말도 없는 그를 바라보며 궁금하게 여길 뿐이었다.
"....글세... 뭐랄까. 갖고 싶어하던 귀여운 토끼를 본 기분이었을까?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그런... 것...말이야...."
어린아이 같았던 자신의 기분을 떠올린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든
클라우드의 눈동자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얀의 뒷모습은 쫓고 있
었다.
"죄송합니다. 동행이 있어요."
세스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춤을 신청하러 온 남성을 거절했다. 그 모습
을 보고 있던 헬레나는 웃음을 머뭄고 세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무도회도 막바지야. 지금 안 즐기면 언제 즐기겠어. 세실리아는 너무 얌
전해, 아까부터 너와 춤추기를 고대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를 보라구.
무도회 내내 춤 한번 추지 않는 너를 보고 어떡해 생각하겠어. 자신들이
싫어서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할거 아냐.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
구, 숙녀로서의 자각이 있는 거야?"
당연히 없지.
세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얀과 디아스가 사라진 이유가 대충 짐작은 가는
데, 정작 그들이 사라지자 곤란한 것은 자신이었다. 헬레나는 중간중간
자신에게 몰려드는 남성들을 고르며 춤을 추고 있었지만 세스는 곤란해
하며 사람들의 눈에 안 뜨이는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눈에
띄는 사람은 어디에서 있어도 금새 표가 나길 마련이다. 어디서 얘기를
듣고 왔는지, 남성들이 줄을 이었고 3분마다 신청하는 남성들 때문에 곤
욕을 치르고 있었다.
자신을 이런 모습으로 만든 얀에게 이를 갈던 세스는 살포시 웃으며 헬
레나에게 말했다.
"헬레나, 미안하지만 난 얀하고만 춤을 추고 싶은 걸. 그가 왔을 때 내
가 다른 사람과 춤을 춘다면 얀의 마음이 어떻겠어."
세스는 은근히 눈에 힘을 주며, 자신의 곁에서 춤을 신청하기 위해 어물
거리는 남성들에게 하나하나 눈도장을 찍었다.
"하.... 역시구나."
"뭐가?"
세스는 헬레나의 뜬금없는 말에 의아해하며 돌아보았다. 헬레나는 뒷짐을
지고 구두 끝으로 땅을 파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
스럽지만 어딘가 슬퍼보이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이 연인사이라는 것은 알고있었어."
세스의 이마에 식은 땀이 흐른다. 그가 손을 내밀어 저지하려하자, 헬레
나는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고백할게 있는데...
얀의 여자친구인 너한테 미안하지만, 얀을 처음 봤을 때...... 첫눈에 반
했다고 할까. 내 눈엔 왕자님처럼 보였거든. 이런 말하면 웃을지도 모르
겠는데... 그것도 첫사랑이야... 믿기지 않지? 나조차 믿을 수 없으니까..
남자친구들을 여러 명 사귀어 봤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헬레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떡해서든 얀의 관심을 끌고 싶었어. 그리고 자신감에 차 있었으니까.
나 정도라면 세실리아에게서 쏠려있는 그의 관심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
각했어.. 하지만 깨달았어...."
"뭘?"
뒷말이 궁금해진다.
그녀는 빙긋 웃고는 궁금해하는 세스의 시선을 피해 섰다. 세스는 자신의
귀에 들리는 그녀의 (짐작은 했었지만)듣기에는 약간 난처한 발언에 난감
해하며 쓸쓸해 보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갈색 머리카
락이 바람에 외로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명랑하게 말했다. 그녀의 음
성엔 말해서 속시원하다는 여운이 남아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파고들 틈새 같은 건 없다는 걸. 나.. 정말 세실리아가
부러워."
헬레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음....."
그녀의 말을 들은 세스는 이마를 받친 채 생각에 골몰했다.
얀이 이곳저곳에 연정을 뿌릴정도로 잘난 놈이었던가?
자신의 대답으론 아니다. 이다.
하지만... 여성들은 그와 몇분 이야기하지 않아, 자신의 내면을 들어내
보이며 밝게 웃는다. 그에게 어떤 매력이 있다는 걸까? 그녀들이 단지
외면만 보고 반했다는 생각은 들지않는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좋아한다
는 눈빛이 떠오르지 않을테니가...
얼굴이 잘생기고 유머감각이 풍부하지만 먹는걸 밝히는 먹보에다 게으
름 잘 피우고 바람둥이 기질은 다분하고 친구로서 얀은 잘 알지만....
이성이 느끼는 감정으로는 모르겠다.
"헬레나, 네가 모르는 것이 있는데. 사람은 겉면만 보고 모르는 거야. 얀
이 단점이 얼마나 많은데."
푸훗.
심각하게 말하는 세스의 얼굴을 바라본 헬레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가볍
게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알았어. 넘보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
그런 의미가 아닌데....
세스의 얼굴에 곤란한 빛이 떠올랐다.
"헉헉."
세스는 단상 위에서 여성에게 프로포즈를 하는 남성의 고백을 듣고 있다
가 뒤에서 들리는 거친 숨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 야안."
먼 거리를 달려왔는지 얀의 얼굴은 땀투성이였다. 허리를 숙이고 숨을 몰
아쉬던 그는 궁금해하는 세스의 눈초리에 고개를 들었다.
"갔던 일은?"
"대충...은 된 것 같은데....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후-, 글세 디아스가 와봐야 알겠지, 할 일이 있다면서 훌쩍 나에게 뒷일
을 맞기고 가버리더라고.
....이래서야 잘된건지 아닌지 짐작도 못하겠어."
머리를 좌우로 돌려 주위를 살피던 얀은 다가오는 헬레나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 주고 세스에게 물어보았다.
"몇 명 정도 남은 것 같아?"
"대충 3-4명? 그 정도일걸."
심각하게 얼굴을 찌푸리는 얀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세스가 말했다.
이마의 땀을 훔치던 얀은 광장 주변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 정도 밖에 남지 않았나? 끝날 때까지 오지 않으면 큰일인걸. 대체 나
보고 어떡하게 하라는 거야. 디아스가 던졌던 마지막 말을 생각해보던 얀
은 한숨을 쉬었다. 무대에 올라가서 사람이 올 테니 기다려달라고 할 수
없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잔뜩 긴장하고 있는 얀이었다.
입을 부풀리고 무대를 째려보던 얀이 세스를 힐끔 보았다.
"아, 그래? 그럼 난 디아스가 오나 안 오나 입구 쪽에 서 있을게."
마지막 한 명, 대략 10분이 지났는데 디아스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콩나물 대가리마냥 옹기종기 모여서 있는 사람들 때문에 잘 보이지 않자
까치발을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던 얀은 안절부절못해, 손톱 끝을 물어뜯
고 있었다.
고백제의 성공률은 좋아서 사람들의 기분은 더욱 들떠있었다. 그런데 앞
에 나서서 중지라도 해달라고 소리치란 건가.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그건
초를 치는 것이다. 잘나가는 분위기의 흐름을 끊는 건 사람으로서 못할
짓인 것이다. 아마 과일이라도 던지지 않을까. 디아스는 왜이리 나타나지
않는 거야. 머리 속에서 요동치는 갖가지 생각에 얀은 혼란해 하였다.
머리카락을 쥐고 헤드뱅잉(긴 머리를 미친 듯이 흔드는 것)을 하는 얀을
보며 -그것도 머리가 좀 길은가? - 사람들이 아연해 하고 있을 때 그에
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자, 마지막 기회입니다. 고백 못하신 분, 용기 없는 분, 이번 기회에 확
일 저질러보세요. 한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합니다. 아직 늦은 것이 아
닙니다. 저에게 신청을 하십시오. 고백제는 여러분이 만들어 나가는 겁니
다."
고백제 진행요원들이 팜플렛을 들고 돌아다니며 소리를 치고 있었다. 하
지만 거의 끝난 거라고 생각했는지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별 호응이 없었
다. 마지막에 접어들수록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기 때문에 번호가 늦은
주자일수록 긴장이 가중되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더욱 신청을 하는 남
성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요원들)의 움직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얀의 눈에서 빛이 번득였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기발한 프로포즈를 펼치는 남성 때문에 웃음을 멈추
지 못하는 세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기막힌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세스, 미안하다.
얀은 달빛에 반짝이는 눈물을 흩뿌리며 그 한마디만 남긴 채 앞으로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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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읽고서 올리기 때문에 느리게 올라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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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제너시스 Date : 09-09-2001 15:03 Line : 293 Read : 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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