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상상하며 기대에 찬 눈을 하고 있는 벤투자의 모습
을, 망연실색하여 보고 있던 카롯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계에
서 지장(智將)으로 명성이 자자한 그도 그녀의 대책없는 행동을 막을 방
도가 없었다.
벤투자의 말대로 디아테스님이 벤투자를 그런 목적으로 이번 일에 투입
하셨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군은 이번 일을 명령하시면서 그런 빛은 조
금도 내비치지 않으셨다. 단지 제르미스 경의 행로(行路)를 미행하라고
지시했을 뿐이다.
일 벌리기 좋아하는 벤투자의 오판(誤判)일 확률이 더욱 큰 것이다.
하지만.... 카롯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를 막을 수가 없었다. 제르
미스경을 제거한다면 얀왕자를 찾는 일에 차질이 생길 것을 알면서도 그
녀에게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다.
마계에서는 묵시적으로 지켜지고 있는 3계율이 있다.
첫째는 마왕의 성역에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둘째는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다는 미지의 영역, 죽음의 숲에 들어서
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가 바로 벤투자의 시야에 들지 말라는 것이다.
카롯은 같은 주군을 모시는 입장 때문에 벤투자와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건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 덕분에 벤투자의 장난감 대열에 끼
어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벤투자가 광기모
드로 돌변하면 주군인 디아테스마저도 한수 접어두는 처지이고 보니 그
혼자만으로 그녀의 장난(?)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저승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 마저도 그녀의 눈길이 스치기만 해도 1년
을 앓아 눕는다는 소문이 생길 정도로, 트러블 메이커로서 그녀의 명성
은 자자했다. 마계를 편한 날이 없도록 만드는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디아테스가 그녀를 측근으로 두는 이유는 단 한가지, 그녀의 뛰어난 일
처리능력 때문이다.
싸울 수가 없다면 회피할 방법은 단 하나, 그녀가 질리때까지 가만히 있
는 것이다. 어찌보면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 방법은 장장 천년
에 걸쳐 괴롭힘을 당한 카롯이 적극 추천하는 방법이다. 약간의 반응만
으로도 재미있어 하는 벤투자이다 보니 결국엔 무관심 무반응 밖에는 대
응책이 없었다.
지난날을 회상하며 끙끙거리던 카롯은 어느새 자신의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벤투자의 뒷모습을 발견하곤 재빨리 그녀의 뒤를 쫓았다.
"안녕~~~"
난데없이 나타난 보라색 머리카락의 글래머 미인이 방실방실 웃으며 제
롬과 루쉐의 앞을 막아섰다.
몸의 실루엣을 여실히 보여주는 타이트한 검은색의 롱스커트, 요염하게
허벅지 위까지 내어져 있는 옆 트임새가 그녀의 패션 포인트였다. 과감
히 노출된 가슴라인은 제롬의 눈이 갈 곳을 앗아 버렸다.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하는 제롬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루쉐는 팔짱
을 끼며 제롬과 그녀 사이를 막아섰다.
"안녕이구, 나발이구. 넌 어디서 날아온 녀석이냐? 대뜸 나타나서 인사
라도 하면 우리가 '안녕'이라고 말해줄거라 생각했어?"
허나, 루쉐의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제롬은 이미 그녀와 인사중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날씨가 참 좋죠?"
참으로 인사성 밝은 권장할만한 청년이다. 가자미눈이 되어 자신을 째려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는 미소를 연발하며 그녀와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마을에서의 환영은 그에게 크나큰 휴우증을 남긴 것이다. 오래간만에 기
분이 한껏 업(up)된 그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덩이에게라도 말을 걸
만큼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런 기분을 한껏 고양시키고자 그는 자신에
게 말을 건 아름다운 동네처녀(어디를 봐서 동네 처녀냐?;;)에게 상냥하
게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가족의 안부까지 친절하게 물어보
았다.
사근사근하게 말하는 제롬에게 넘어간, 대뜸 나타나 인사를 한 처녀 (이
름 한번 길군;)벤투자는 어느덧 자신의 사명은 잊어버리고 그의 페이스
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언제나 마이페이스인 그녀가 남의 페이스에 끌려다닌 건 마계가 경천동
지(驚天動地)할만한 사건이었다.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최악의 사태를
막아내고자, 헐레벌떡 뛰어왔던 카롯은 대대손손 훗날까지 길이길이 남
겨야 할 대사건을 눈앞에서 목격하곤 할말을 잃었다.
재잘재잘 즐겁게 떠들어대는 두명의 남녀를 뾰루퉁한 얼굴로 바라보던
루쉐는 벤투자의 뒤에 나타난 청년의 등장에 약간 놀란 듯 눈을 휘둥그
래 떴다가 표정을 가라앉혔다.
청년의 얼굴은 나무그늘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나무의 그림자
에 감추어지지 않은 어깨 아래 부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남자의 기척을 느꼈는지 제롬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벤투자의 뒤쪽을 바
라보았다. 그러자 나무의 그늘에 숨어 있던 남자가 한발자국 앞으로 나
섰다.
웨이브가 져있는 가슴부근 까지 내려온 붉은 머리카락은 햇빛을 받아 자
수정처럼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그가 벤투자의 곁으로 걸음을 옮기자,
걸음을 떼어낼때마다 그의 머리카락은 빛을 반사하며 투명하게 반짝였
다.
고풍스럽게 차려입은 흰 실크 브라우스를 어두운 검은빛의 무릎까지 내
려오는 베스트(조끼)로 받쳐입고 목의 칼라를 장식하고 있는 레이스에
바다의 푸른빛을 띄고 있는 카메오(보석 마노(瑪瑙)나 접시조개의 껍데
기 같은 것에 양각으로 조각한 장신구)를 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한눈
에 보아도 무척 귀족적으로 보였다.
왠지 숲의 분위기와 이질적으로 보이는 그 모습에 루쉐는 고개를 갸웃거
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카롯을 느끼고 있었던 벤투자는 카롯이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자 제롬에
게 말했다.
"이쪽은 내 동료 카롯이야."
그리고 제롬을 가르키며 말을 이었다.
".... 이미 알고있듯이 이쪽은 제르미스 경."
벤투자의 말에 제롬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벤투자를 쳐다보았다.
"이제 선수소개는 끝났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벤투자는 즐거운 듯 미소를 지으며 제롬과 루쉐를 쓱 훑어보았다. 그 모
습을 보고있던 카롯은 손을 이마에 올려놓고 고개를 푹 숙였다. 카롯의
모습을 힐끔 바라본 벤투자는 카롯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즐겁게 웃
으며 제롬을 바라보았다.
"당신 목숨, 내가 접수하지."
"단도 직입적으로 말해서, 당신 쓸모가 없어졌으니 내 유흥거리가 돼줬
으면 좋겠어. 아, 그리고 그쪽에 계신 타일로세 양. 신경써주지 않아서
자존심이 상했나 본데 걱정할 것 없어. 제르미스 경을 처리하는 데로 당
신도 같이 놀아줄테니까."
나타나자마자 자신의 정체를 바로 알아 맞추는 여인에 대해 루쉐는 공포
감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제롬의 소맷부리를 잡았다.
이야기를 잘 나누다가, 갑자기 목숨을 빼앗겠다는 황당한 발언을 해대
는 벤투자 덕분에 아직도 사태파악이 되지 않은 제롬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벤투자를 바라보았다.
제롬의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던 카롯은 한숨을 쉬며 벤투자를 돌아보
았다.
"난 이번 일에 빠지겠어. 난 주군이 명령하신 일만을 할 뿐이야."
카롯은 뒤로 돌아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들의 무리에서 대략 2m 쯤 떨
어져 나왔을 때 그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제르..미스 경.... 제가 충고하나 해드리지요. 만분의 일이라도 도망갈
수 있는 확률이 생긴다면 무조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가십시오. 그
럴... 확률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카롯은 뼈에 사무친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가슴에 와 닿는 말을 뱉어내
었다.
"..잠깐만요. 언제 우리가 만난 적이 있습니까? 전 전혀 기억이 나질....."
"기억에도 없겠지만, 만약의 경우 목숨을 부지한다면 그땐 기억 속에서
저를 지워버리십시오. 다음 번에 만난다면 적이 될 테니까요."
고개를 돌려 제롬을 바라보던 카롯은 고개를 살짝 까닥이곤 그대로 앞으
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말만 던지고 가는 카롯이라고 하는 청년이나, 앞에서 태연히 목숨을 빼
앗겠다고 단언하는 여인이 나타난 것은 마치 한순간의 꿈처럼 느껴졌
다. 황당한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제롬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
다.
정신만 똑바로 차린다면 지금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겠지....
제롬은 고개를 바로 들고 벤투자를 뚜렷이 바라보았다.
"여행을 하면서 이런 일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맡고 있는 일
도 누군가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것도 아니고요.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
까? 뭔가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열심히 물어보는 제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벤투자는 옆집개가 짖는 다
는 식으로 빙긋이 웃으며 딴청을 부렸다.
당황한 표정으로 카롯이 사라진 반향을 바라보고 있던 루쉐는 뭔가를 깨
달을 듯 눈을 치켜 뜨더니 여유만만하게 서있는 벤투자에게로 고개를
획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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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곳에서 즐거웠던 만큼, 읽으시는 분들에게도 즐거움이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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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제너시스 Date : 09-09-2001 16:54 Line : 316 Read : 2840
[76] <차원 연결자-73.다가오는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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