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원연결자-73화 (73/127)

<73>

당황한 표정으로 카롯이 사라진 반향을 바라보고 있던 루쉐는 뭔가를 깨

달을 듯 눈을 치켜 뜨더니 여유만만하게 서있는 벤투자에게로 고개를

획 돌렸다.

"혹시 당신 라크람에서 온 사람이야?"

루쉐는 주저하며 벤투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벤투자는 재미있다

는 듯 만면에 웃음을 띄고 빈정거리는 표정을 유지할 뿐이었다.

"왜 아무말도 않는거지? 제롬때문이 아니라면 나 때문이라는 소리잖아?

늙다리 대신 토드란의 짓인가? 아님 그 꼴도 보기 싫은 페이든이 시킨

짓이야? 누가 시킨짓이든 나만 데려가면 될 것 아냐? 왜 죽인다고 하는

거지? 제롬은 놓아줘. 그는 잘못한 것 하나 없어. 여행 중에 만난 사람

일 뿐이야. 도망치지 않을 테니까 그를 털끝하나 건드리지마. 그가 다친

다면 차후에 응징하겠어."

루쉐는 씩씩거리며 말을 하였다. 그녀의 행동을 보며 혀를 차던 벤투자

는 말문을 열었다.

"이런 이런, 누가 공주아니랄까봐, 자기 중심 사고관이 발동하셨구만....

미안하게도 그것하곤 상관없습니다, '라 클로아피아 타일로세' 왕녀전

하. "

벤투자는 정중히 예를 취하며 말을 했다.

라 클로아피아 타일로세 왕녀전하....? 루쉐가 공주란 거야? 아, 아니 그

것보다 루쉐가 여자란 말이야?

제롬은 패닉상태에 접어들었다.

그것보다 저 이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이, 익숙한데...

제롬은 기억나지 않는 것을 끄집어내려 노력하며 말싸움을 벌리고 있는

두 여자를 바라보았다.

루쉐는 벤투자가 자신의 풀 네임을 말하자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쳐다보

았다.

"뭐?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거야?!!"

"그건 가만히 있어도 부하들이 알아서 올리니까, 당연하게 알고있는 거

지. 이번 일은 당신하곤 상관이 없어. 음.....상관이 있다면 제르미스경

과 있는 거겠지...."

벤투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제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뭐? 제롬과??"

루쉐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제롬은 지금 상황이 안중에도 없는 듯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던 루쉐는 그를 불렀다.

"제롬!!"

"어?"

제롬은 잠에서 깨어난 듯 루쉐를 돌아보았다.

"이 여자말론 이런 사태로 발전한 건 전부다 너의 책임이라는 데."

"........."

제롬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동자에 고뇌의 빛을 띄었다. 그러다 루

쉐와 벤투자를 번갈아 쳐다보다 이유를 모르겠는지 곧 인상이 찌푸려졌

다.

"......내참, 제롬 주제에 여자하고 상관된 일이 아닐거고, 당신이 말해

봐. 왜 악의를 가지고 나타난거야? "

"악의라니 그런 섭한 말씀을....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라고나 할까?"

"넌 재미로 사람의 목숨을 뺐냐?"

"어, 그러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벤투자는 자신의 가치관이 반박당하자 의아해하며 루쉐를 바라보았다.

어린아이처럼 한점 티끌도 없는 그녀의 회색빛 눈동자를 보자, 루쉐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오한이 올라왔다.

루쉐는 뒷걸음치며 제롬의 곁에 붙어섰다.

"제, 제롬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은데....."

"..그런 것 같군.."

제롬은 머리를 긁적이고는 벤투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허

리에 매여 있는 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벤투자는 제롬의 행동을 보며

아무 것도 내비치지 않는 웃음을 지었다.

살기가 없는 그녀의 행동, 그래서 더욱 무서운 건지도 모른다. 위험해질

상황을 직감하며 제롬은 검집에서 검을 빼어 들었다.

스르릉.

롱 소드가 섬뜩한 빛을 내뿜으며 검집에서 풀려 나왔다.

그 빛을 골동품을 구경하는 감정사처럼 여유롭게 지켜보던 벤투자는 팔

짱을 풀며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인님을 생각해서, 안 아프게 금방 끝내줄게."

보너스로 윙크까지 해주는 친절함에, 루쉐는 치를 떨며 벤투자를 노려보

았다.

"아, 너도 예외는 아니니까. 섭하게 생각하지마. 훗"

뭐가, 훗이냐? 남자가 봤으면 애간장을 녹인다고 생각했을 벤투자의 요

염한 미소를 보며 루쉐는 이를 갈았다.

"제롬, 너 저런 여자한테 지면 나한테 맞는다."

"어, 어? 아... 알았..어."

묘하게 자신감 없는 말투에 루쉐의 인상을 찌푸리며 제롬을 바라보았

다. 그러자 제롬은 할 수 없다는 듯 서글픈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

다.

자신을 죽인다는 여자보다, 루쉐의 정체에 대해, 그리고 그녀의 이름에

대해 정신이 팔려있던 제롬은 지금은 자신의 마음을 정해야 할 때인 것

을 알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자신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그

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벤투자는 자신을 굉장한 집중력으로 바라보는 제롬을 보며 흐뭇한 미소

를 머금었다.

세헤르나 최고의 기사라는 건 거짓이 아니라는 건가?

기특한데... 정식으로 대결해 줘야겠군...

벤투자는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반응하는 제롬의 행동을 보며 문득 장난

이 치고 싶어졌지만 꾹 참고 (그녀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고개를

쳐들었다.

흠짓 놀라는 제롬을 보자, 다시 마음이 흐트러졌지만 숨을 한번 깊게 들

이쉬고는 두 눈을 꼭 감았다.

마음이 진정되어 간다.

그녀는 오른손을 가슴 높이로 들어올리고 작게 읊조렸다.

'명계를 불태우는 지옥의 업화(業火)여.

지금 내 앞에 현신(現身)할 것을 명한다.

이프리트....'

순간, 눈앞을 메우는 강렬한 섬광이 그녀를 둘러쌌다.

제롬이 눈앞을 가렸던 팔을 내리자 심흑의 암연을 형상해 놓은 듯한 검

은 색 구체가 벤투자의 손아래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점

차 길다랗게 변해 가며 한가지 물체로 변형되어 갔다.

검?

제롬은 묵빛이면서도 은은한 빛을 내는 검을 보며 신기한다는 표정을 감

추지 못했다.

"봉인."

벤투자가 말을 내뱉자 검의 빛은 눈에 뛰게 줄어들었다. 그녀는 씨익 웃

으며 말했다.

"동등한 조건이어야 겠지? 봉인을 했으니까 이 녀석의 기운만으로 불날

일은 없을 거야. 그런데, 300년만에 쓰는 거라서 그런지... 조금 어색하

네."

300년?

묘한 어감에 어리둥절해 하던 제롬은 벤투자의 차가운 어조에 정신이 번

쩍 났다.

"젖먹던 힘까지 내야할거야..."

놀리는 건가....? 아니야... 저건 경고겠지.

제롬의 표정이 냉정해지며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시작하십시오."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

루쉐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저것이 정말 제롬의 모습이란 말인

가?

제롬의 실력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확인했다. 그의 능력은 실력을 인정

받은 기사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자신이 왕궁에서 본 그 어떤

기사보다도 제롬의 실력은 뛰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제롬을 저

런 지경으로 몰고가는 여인 누구란 말인가...?

제롬은 한낱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가지고 노는 벤투자를 보며 울컥 분

한 기분이 들었다.

5살 때 검을 든 이후로 이런 모욕을 받은 적은 없다. 아버지의 눈에 들

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고 그 노력은 결실을 맺어 인재만이 들 수 있다

는 레드 블러드 기사단에서 최고의 영애를 차지했다.

그런데.... 이건 뭐란 말인가...

처음부터, 자신이 그녀보다 아래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온힘을 다

했다.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다. 힘들지만

그녀의 공격을 견딘다면 회심의 반격을 할 기회가 올 거라고, 조금만 노

력하면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체력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검은 더욱 무거워지고 움

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지금은 검을 막아내는 것만 해도 힘겨웠다. 그녀와 검을 나눌 때마다 상

처가 하나 둘 늘어난다.

이게 여자의 힘이란 말인가? 누가 천성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힘이 약

하다고 했지?

제롬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더 깊숙이 찔러야지. 아니야. 발놀림이 느리잖아."

기가 막히다. 이젠 가르치기까지... 제롬은 웃을 수도 없는 상황에 한탄

하며 더욱 빠르게 검을 놀렸다.

치익.

제롬의 검이 그녀의 스커트의 앞자락을 길게 찢어 냈다.

"어머, 엉큼하긴. 쳇, 좋아. 이번 공격은 좋았으니까 상을 주지."

뭐? 엉큼?!

제롬은 이상한 상대에게 걸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벤투자는 흥이 돋는지 '룰루랄라'거리며 찢어진 스커트를 부여잡고 쭉

찢어냈다. 그러자 롱스커트는 삽시간에 초 미니스커트로 탈바꿈했다.

이런 인간은 오랜만인걸. 손맛을 느낄 수 있겠어...

벤투자는 싱긋 웃으며 제롬을 바로 보았다.

제롬은 갑자기 덮쳐오는 느낌에 오한이 드는 것을 느꼈다.

웬만한 인간이 마족의 움직임을 잡아내기란 힘이 든다. 천성적으로 부여

된 운동성이 다른 것이다. 처음엔 일부러 움직임을 제롬에게 맞춰 줬지

만 지금은 자신의 움직임을 금방 따라잡고 있다. 흥미로운 인간이다. 벤

투자는 오래간만에 발견한 장난감을 금방 망가트리는 것이 아까워 졌다.

흘끔 루쉐에게 눈동자를 돌리자 어느새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제롬은 허

겁지겁 루쉐 앞을 막아섰다.

훗, 재미있는데...

벤투자는 일부러 뚱한 표정을 지으며 제롬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롬

은 긴장을 하며 칼을 바로 쥐었다.

자신의 행동 하나 하나에 반응하는 것을 보며, 벤투자는 그것에서 즐거

움을 느끼는 어쩔 수 없는 자신을 느꼈다. 이건 지금의 마족에게선 발견

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하급 마족들은 먼발치에서 자신만 봐도 벌벌 떨

며 눈치를 보았고 상급 마족은 상대할 생각도 안 했으니까...

어디한번 제대로 해볼까.

"이것도 한번 받아보라고!"

벤투자는 비스듬히 치켜올렸던 검을 내리며 제롬을 향해 세차게 뿌렸

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발생된 마력이 검을 둘러쌓았고 그것을 아무런

방비도 없이 막아낸 제롬은 자신의 한계를 넘는 그것을 견지지 못하고

5m 나 뒤로 굴러 나가 떨어졌다.

큭.

목을 타고 올라온 피가 입가를 타고 흐른다. 제롬은 소매로 입가를 슥 닦

아버렸다.

일어서는 것이 힘들다. 다리가 풀린 것인가? 지금까지 움직인 운동량도

장난이 아니지만... 지금 당한 공격 때문에 가슴속이 진탕된 듯 했다. 명

치부근이 욱신거린다.

제롬은 검을 지팡이 삼아 어렵사리 일어섰다.

"어머, 괜찮은 거야?"

"..아직은.. 견딜만 합니다. 계속... 하십시오."

"그럼 좋아. 각오해두는 것이 좋을 거야. 난 상대방의 약하다고 봐주지 않으니까."

벤투자의 눈빛이 싸늘해지며 순간 땅을 박차고 제롬을 향해 돌진했다.

굉장한 이동속도 때문에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벤투자는 제롬의 앞

에 나타났다. 그녀는 나타남과 동시에 제롬의 어깨를 베어갔다. 제롬은

몸을 비틀며 가까스로 그녀의 검을 피했다. 하지만 그 순간 검은빛이 번

득이며 그의 팔을 베어갔다.

"윽."

미처 피하지 못한 왼팔에 길게 검상이 생겨버렸다. 잘라진 소매를 타고

흘러내린 핏방울이 소매 끝에 맺혔다.

제롬은 몸을 비틀거리며 오른손으로 검을 단단히 쥐였다.

여기서 끝인가? 이제 얀님을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 자리에

서 허무하게 목숨을 버려야하는 건가? 상대가 되지 않는다. 내 능력은

그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되는 건가...

절망이라는 단어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제롬은 전신으로 죽음의 기운을

내뿜는 벤투자를 보며 공포에 몸서리 쳤다.

아니야. 아직은 안돼. 여기서 죽을 수 없어. 그분을 만날 때까지 포기할

수 없어.

제롬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잘 올라가지 않는

왼팔을 어렵사리 들어올려 두 손으로 검을 꽉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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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y in dreams(차원연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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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제너시스  Date : 09-09-2001 16:57  Line : 273  Read : 2856

[77] <차원 연결자-74.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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