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어린 날의 정경
"안돼!!"
제롬을 향해 검을 휘두르던 벤투자는 의외의 방해꾼으로 인해 소기의 목
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제롬을 양분하려 내려오던 검은 벤투자가 손목
의 각도를 바꾸는 순간, 아슬아슬하게 그의 몸에서 비껴갔다.
제롬의 머리 곁에 박혀있는 검을 무시한 채로 벤투자는 이외의 생물을
노려보았다.
"뭐냐? 네 차례도 곧 이라고 했잖아. 이거, 성질 급한 생물인걸...."
"죽, 죽이려면 나부터 죽여. 내 눈앞에서는 절대 제롬이 죽는 꼴은 못봐!"
루쉐는 악을 써대며 제롬의 몸을 자신의 작은 몸으로 가로막았다. 방금
전에 눈앞에서 벤투자의 예리한 검을 확인하고도 잘도 움츠러들지 않고
소리 높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했다. 루쉐의 곁에는 그녀 대신 잘려나간
터번이 처량맞게 그녀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 터번이 사라지자 폭포수처
럼 흘러나온 그녀의 흑단같은 머리카락은 루쉐가 악을 써댈 때마다 세차
게 흔들렸다.
칼질 한번이면(?) 허무하게 쓰러질 몸뚱이면서 용감하게 덤벼드는 기묘
한 생물을 본 벤투자의 눈이 호기심으로 가늘어졌다.
"어, 재밌는걸. 이런 생물은 처음이야...."
벤투자는 허리를 숙여, 자신 앞에 주저앉아 있는 루쉐를 주의 깊게 관찰
하였다.
그녀는 이윽고 허리를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메인 디쉬 (Main Dish)보다 디저트를 먼저 먹는 맛도 색다르겠지."
벤투자는 분홍빛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살짝 핥았다.
루쉐는 벤투자의 말을 듣자 흠짓 몸을 떨었다. 하지만 제롬의 앞에서 몸
을 비키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몸을 꼿꼿이 세웠다.
제롬은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떠들썩한 소리로 인하여 비몽사몽(非夢似
夢)한 상태에서 눈꺼풀을 어렵게 들어올렸다. 지금의 그는 검으로 양분
되는 것보다 대출혈로 쇼크사 할 확률이 더욱 많았다.
몽롱한 기분에서 깨어나려 노력하던 그는 자신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검은 실들을 보고는 태초적인 본능에 의하여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아악."
루쉐의 고개가 훌떡 뒤로 넘어갔다. 그녀는 갑자기 끌어당겨진 힘에 의
하여 저항할 틈도 없이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의 머리는 정통으로
제롬의 상처와 조우를 했다.
끔직한 아픔, 제롬은 찔끔 눈물을 흘렸다. 정신이 팍 드는 느낌이다.
시선이 제대로 잡히자,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루쉐의 얼굴
이 보인다. 제롬은 슬픈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루쉐를 보는 순간 머
리 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찾을 수 없었던 마지
막 한 조각의 퍼즐을 찾은 느낌.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던 수수께끼가 해답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 난....
이 모습을 알고 있어.....
"어머니......."
응접실 문 사이에 머리를 빼꼼이 내민, 적갈색 머리의 작은 소년은 어머
니를 부르다 말고 말을 잊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소년은 함박 웃음을 지으며 어머니의 곁에 서있는 남성에게 달려갔다.
"어이쿠, 제롬. 몸무게가 많이 늘었구나."
제롬의 아버지, 제뉴인 파나인 경은 자신의 아들을 번쩍 들어올려 품에
안으며 아들의 연약한 살에 볼을 비벼댔다.
"따, 따거워요."
"엉, 사내녀석이 그것하나 참지 못해서야..."
제뉴인은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아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던 제뉴인 경의 부인은 제롬의 손을 끌어 자신의 곁
에 세우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여행을 가신다고요?"
"그렇소, 조금 긴 여행이 될 것 같구려...."
제뉴인은 고개를 돌려 제롬을 바라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손
을 들어 제롬의 머리를 마구 비볐다.
"제롬, 아버지가 없는 동안 네가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
불만석인 표정으로 두 손으로 제뉴인이 헝클어뜨린 머리를 정리하던 제
롬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또 오랫동안 집에 못 오시는 거예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제롬이 말을 하자, 제뉴인은 미안한 표정
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릎을 꿇어 제롬을 끌어안으며 귓가
에 속삭였다.
"아버지가 제롬을 좋아하는 것은 알지?"
제뉴인이 팔을 풀고 제롬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자 제롬은 빙긋이 웃으
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요. 저도 아버지가 젤 좋아요."
흐뭇하게 제롬을 바라보던 제뉴인은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주먹으로 손
바닥을 가볍게 내리치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래....이번 여행은 라크람에 가는 것이니까. 다녀오면 신기한 이국(異
國)의 풍물을 이야기해 주마."
"정말요?"
제롬은 눈에 띄게 좋아하며 제뉴인을 올려다보았다. 제뉴인은 미소를 지
으며 아들을 안고 의자에 앉았다.
"사랑하는 제롬을 위해서 비밀이야기를 해주지. 이번 여행의 목적은 3왕
자이신 얀왕자님의, 반려가 되실 분에게 선물을 드리기 위해서 란다."
"반려요?"
제롬의 눈이 동그랗게 되어 놀란 듯이 되물었다.
"왜 그러냐? 오호라, 녀석. 부러운가보구나?"
"아, 아니예요. 하지만 얀왕자님은 저보다 2살이나 어리잖아요."
"호, 부럽다고 시인하는 거냐."
"아니라니까요!"
제롬은 뾰루퉁한 얼굴로 퉁퉁부어 제뉴인의 얼굴을 외면했다.
"참, 당신도...."
제뉴인의 부인은 웃음을 참으며 남편의 곁에 앉았다. 제뉴인은 부드러
운 눈으로 부인을 보고 있다가 품속에서 뭔가를 뒤적여 꺼냈다. 그는 그
것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결정되었나 보군요.... 테실라 님(얀의 어머니)은 아무말씀도 없으셨구
요?"
제뉴인의 부인은 제뉴인이 꺼내어 놓은 흑단목의 상자를 보고는 고개를
돌려 제뉴인을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그렇소. 뭐, 얀님이 데릴사위로 가는 것도 아니고. 단지 태중약혼으로
맺어졌던 것을 확실히 하는 것일 뿐이니까.... 그리고 신부감을 보시고
는 흔쾌히 여기시던걸."
제뉴인은 상자를 열어 그 속에 들어있던 물건을 꺼냈다. 비단천에 싸여
있는 기다란 물건과 두 장의 초상화였다. 제뉴인은 초상화를 들어 부인
에게 내밀었다.
"아름답지않소. 눈에서 총기가 흐르오. 약간 드셀 것 같아 얀님이 걱정되
지만..."
제뉴인의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초상화를 바라보다, 자신을 유심히 바
라보고 있는 제롬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궁금한가 보구나?"
그녀는 한 장의 초상화를 제롬에게 내밀었다.
"이분이 얀님의 신부가 되실 분이란다."
밤하늘을 옮겨놓은 듯한 검은 머리카락... 도도하게 보이는 굳게 다물어
져 있는 분홍빛 입술...
아름답다.
처음 본 감상은 그랬다. 그녀는 장신구가 없음에도 태초적인 아름다움으
로, 충분히 어필하고 있었다. 하지만 멍하니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
녀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 가슴이 메어져왔다. 슬픔을 담고 있
는 눈동자..... 이 아이는 왜 이리도 슬퍼 보이는 것일까....
제롬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의 표정을 보고있던 제롬의 어머니는 이
상해 하며 나머지 한 장을 내밀었다.
"이분은 아버지가 모시고 있는 테실라님의 아드님이지... 얀왕자님이란
다."
제롬은 고개를 끄덕이며 초상화를 받아들였다. 소녀에 대한 생각 때문
에 아무 생각없이 초상화를 받아들였던 제롬은, 초상화에 눈을 맞추는
순간 동작이 느려졌다.
영혼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충격...
단번에, 방금 전의 기억은 날려버릴 정도로 초상화 안의 사람은 제롬의
기대를 깨버렸다. 마치 영혼이 송두리째 빼앗기는 느낌.
제롬은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입만 뻐금거리며 제뉴인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 꼬마 왕자님이 맞단다. 실물을 보면 지금보다 더 놀랄걸. 그렇
구나.... 얀왕자님도 네 얘기를 하시던데, 다음 번에 기회가 되면 데리고
가주마."
제롬은 충격을 먹어서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도 기뻐할 여력이 없었다.
소년은 고개를 숙여 초상화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던 그 장난꾸러기 왕자님이란 말이야? 하지만 초상화
는 들은 것과는 완전히 다른걸....
장난스런 눈빛이 가득한 상처투성이의 말썽쟁이를 상상하고 있던 제롬
은, 인상을 찌푸리며 초상화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를 단정히 정리하고 다소곳이 앉아있는 모습은 자
신이 상상하던 인물과 확연히 달랐다. 흰색 담비 모피가 씌여져 있는 쇼
파에 앉아있는 그의 모습은....
미풍에 흔들리는 청은색의 머리카락, 그에 어울리는 투명한 흰 피부...
천사의 강림인양 보여지는 밝게 웃음 짓고 있는 얼굴 표정, 양 볼에 도화
빛 홍조를 띄고 있는....
이건 완전히 귀여운 여자아이다.
극심한 패닉상태에 빠져든 제롬의 멍하니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그때, 제롬의 주의를 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롬, 이것을 봐라."
제뉴인은 비단천에 꽁꽁 싸매여져 있던 물건을 꺼내었다.
옥대롱?
제뉴인이 그것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올리자 악기처럼 맑은 울림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장난감 같네요."
제롬의 어머니는 놀라워하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건 하늘빛을 옮겨 놓
은 것과 같은 옥으로 만든 장식품이었다.
"이건 얀왕자님이 자신의 신부에게 보내는 예물품이라오. 정혼자를 위
해 직접 디자인 하신거라니 놀랍지않소?"
제뉴인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그러자 대롱 끝에 달려있던 보석
들이 부딪치면서 묘한 청량감을 주는 음색을 연주해내었다.
제롬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옥 끝에 매달려 있는 푸른 사파이어를 살
짝 손끝으로 건드렸다.
띠리링....티링...
맑은 음색이 방안에 울려 퍼진다...
제롬의 초록빛 눈동자가 조그마한 파란빛의 돌의 궤적을 쫓아 움직였다.
어린 소년의 눈동자 속으로 정경 어린 그날의 풍경은 가슴속 깊이 스며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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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서 읽어주신 분들이 계시군요.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구요. 그럼 안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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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y in dreams(차원연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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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제너시스 Date : 10-09-2001 20:02 Line : 221 Read : 2816
[79] <차원 연결자-76.뜻밖의 구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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