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어제의 격전이 허무하게도, 다음날 와서 살펴 본 그곳은 별다른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악몽 같은 하루를 되새기던 루쉐는 그래서 자신 앞에
멀쩡하게 서있는 제롬을 보고도 그가 진짜라고 믿을 수 없었는지 모른
다.
어제 그렇게 끔찍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이 마치 착각이었던 것처럼
그는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하나하나 제롬의 모습
을 살펴보던 루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갔다.
"제롬!!"
숲이 떠나갈 듯 큰소리로 부르며 달려간 루쉐는 제롬의 허리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밤새도록 걱정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초췌해진 얼
굴로, 검은 눈동자 가득 눈물이 고여있었다.
"죽는 줄 알았어...."
루쉐는 제롬의 셔츠자락을 붙잡고 흐느꼈다.
아침의 충격적인 장면 때문에 어제 일어났던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
던 제롬은 루쉐를 보는 순간 모든 사실이 떠올랐다. 그는 후유증 때문에
아직 근육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비틀거리면서도 루쉐를 떼어내고 황급
히 뒤로 물러섰다.
제롬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신(臣), 제르미스 파나인, 고귀하신 분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루쉐는 당황해하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뭐, 뭐야. 제롬? 장난하는 거야?"
하지만 제롬의 표정은 진지했다. 루쉐는 고개를 돌려, 팔짱을 낀 채 나무
에 기대어,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쥬아렌을 바라보았다. 난처한 듯 웃으
며 쥬아렌을 바라보는 루쉐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치료해준다더니 머리까지 손을 댄거야? 하루만
에 이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어?"
쥬아렌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무심한 눈빛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를 치료해준 것으로 내가 할 일을 끝냈어. 다른 것까지 서비스 해 줄
정도로 난 친철하지 않아."
"그렇다면 왜?"
고개를 돌려 제롬을 바라보던 루쉐는 난처한 듯 웃으면서 무릎을 꿇은
채 일어서지 않는 제롬의 어깨를 흔들었다.
"제롬, 그 여자가 한말을 듣고 그러나 본데, 그래, 인정할게. 그 여자의
말이 맞아. 난 라크람의 왕의 수많은 자식들 가운데서 36번째 딸이야. 말
만 왕녀지, 총애를 받는 후궁의 소생이 아니기 때문에, 왕녀취급도 받지
못했어. 어려워할 것 없다구. 그저 그전처럼 대해주면 돼. 여태까지 잘
지내왔잖아. 내 신분을 알았다고 갑자기 이러는 건...."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제롬은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루쉐를 바라보았
다.
"타일로세님께서 이해하기 쉽도록 저에 대해서 말씀드리죠. 저의 이름
은 제르미스 파나인. 세헤르나의 레드 블러드 기사단 소속입니다. 이번
에 임무를 맞고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이미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계실 겁니다... 이건 당신과도 밀접
한 관련이 있습니다."
평소의 부드러움이 아닌 딱딱하게 굳어있는 제롬의 어조에 루쉐는 당황
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롬은 루쉐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저희 파나인 가(家)는 세헤르나의, 3왕자님의 호위를 맡고 있습니다. 그
분을 지키는 것이 저의 가장 중요한 임무죠. 하지만 뜻밖의 사태로 그분
의 행방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타일로세님께서 알고계시듯..... 세헤
르나의 3왕자님의 본명은 '크리스티앙 네오 얀 세헤르나', 바로 왕녀님
의 약혼자 되십니다."
루쉐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그녀는 긴장된 얼굴을 숨기려고 노력하
며 제롬을 마주보았다.
"어떤 의도로 나에게 말하는 거지? 내가 그 사람이랑 약혼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이제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야? 이미 장례식까지 치렀잖아. 죽
은 사람이라구. 그리고 난 파혼된 몸이야. 그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라구.
그러니까...."
감정이 고조되었는지, 루쉐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소리치듯 말했다.
"...그러니까... 제롬이 이렇게까지 해야 될 필요까지 없어, 신경쓸 것 없
다구. 고개를 들어 날 봐. 난 그저 제롬이 알고있는 루쉐일뿐이야. 맨날
귀찮게만 굴던 루쉐라구. "
하지만 루쉐의 변명하듯 간절히 말하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제롬은 변화
가 없었다. 그런 제롬을 바라보는 루쉐의 입술은 경련으로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왕자님의 약혼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그러니까, 타일로세님에게 통보되었던 파혼은 무
효입니다. 저의 안일함으로 위험에 빠트렸던 점, 그리고 그 동안의, 저
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정말....죄송합니다..."
제롬은 말을 끝맺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눈길도 맞추지 않고
뒤돌아 걸어갔다.
"멈춰!! 어디 가는 거야? "
겁을 집어먹은 듯한 루쉐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제롬의 발걸
음을 멈췄다.
"이제부턴 저 혼자 가겠습니다. 얀님을 찾을 테니까. 타일로세님은 라크
람왕궁으로 돌아가 계십시오. 꼭 좋은 소식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싫어!!"
"그런 소리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제롬은 냉정히 잘라 말했다.
"싫어, 싫어. 내가 싫다면 끝까지 싫은 거야."
어린애가 떼를 쓰듯 무대포로 소리치는 루쉐 때문에 제롬은 하는 수 없
이 뒤돌아 루쉐를 쏘아보듯 바라보았다.
"잊으셨습니까? 이번 일도 다 저 때문에 발생했던 겁니다. 저와 같이 있
다간 같은 위험을 당할 겁니다. 그래도 좋다는 겁니까?"
"........."
"....잘 생각하셨습니다.... 왕녀로서의 책임감을 깨달으셨으면.... "
"아니, 여행에 동행하겠어."
"......!!"
당황한 빛이 떠올라있는 제롬의 눈을 루쉐는 당당하게 마주보았다.
"제롬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난 돌아갈 수 없어. 어차피 가출한 처지
기 때문에 돌아간다고 해도 내 편인 사람은 없을뿐더러, 돌아가자마자
다른 사람과 결혼해야될지도 몰라. 누가 장례식까지 치른 사람이 살아있
다는 믿겠어? 거기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그 먼길을 가라고? 말도 안
돼. 가시밭길에 등떠미는 꼴이야."
루쉐는 손사래를 치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또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제롬이 구해주면 되잖아. 안 그
래?"
승리의 미소를 지은 루쉐는 제롬을 바라보았다.
"불만은 없겠지, 난 내 약혼자를 찾으러 가는 여행에 동참할 뿐이니까. "
"하, 하지만...."
당황해 하는 제롬을 못 본 채하며 루쉐는 다음 말로 자신의 주장에 쐐기
를 박았다.
"미래의 주군의 부인으로서 명령하는 거야. 거기다 찾는 일에 한몫 거들
었다고 하면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한결 좋게 바뀔 것 아니야. 내 멋대
로 하는 게 아니라구, 난 미래의 라크람과 세헤르나를 생각해서 움직이
는 거야."
지금은 마음이 가는 대로. 그 때문에 발생될 상황은 나중에 고민하자...
루쉐는 굳게 마음을 먹고 진지한 눈으로 제롬을 바라보았다.
결심이 단단히 서있는 눈빛을 보자 제롬은 루쉐를 여기서 막는다고 해
도 뒤쫓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 대신 타일로세님은 이것은 지켜주십시오. 위험한 일에는
나서지도 말고, 그런 성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하는 남자같은 어투도 버립
시오."
"그래? 알았어. 노력해보지."
루쉐는 너무도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롬이 내심 '이게 아닌데'하며 속
을 끓이고 있을 때 그녀의 말이 들려왔다.
"그럼 제롬도 내 부탁 한가지는 들어줘."
"네?"
부탁?
"이제부턴 나를 타일로세님이라고 부르지마. 여행을 하려면 서로에게 편
한 게 좋잖아. 뭐, 그렇다고 루쉐라는 이름을 계속 쓰겠다는 것은 아니
고.... 클로아라고 불러 줘. 클로아... 어때 괜찮겠지?"
"....이름을 부른다는 건...."
"에이, 깐깐하긴. 서로 편하게 지내자는데... 나도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
줬으면 제롬도 양보해줘야지. 부탁하는데도 안된단말이야?"
"......좋습니다."
제롬은 불만이 섞여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자, 이겼다.
루쉐(클로아)는 한 팔을 들어올려 승리의 포즈를 취하며 기뻐했다. 고개
를 들자,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제롬이 보였다. 루쉐(클로아)는 헛기
침을 하며 슬그머니 팔을 내리고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제롬에게 다가가자, 가만히 서있던 쥬아렌은 아무 말 없이 그들
의 곁으로 가서 섰다.
"어이, 넌 왜 오는 거야?"
수상하다는 듯 루쉐(클로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쥬아렌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쥬아렌은 묵묵부답 고요히 제롬 곁에 서있을 뿐이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못 물어봤는데, 무슨 일로 우리에게 접근한 거
지? 마침맞게 우리를 구해준 것하며....우리를 살려줬으니, 생명의 은인
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의심쩍어. "
클로아는 얼굴을 쥬아렌에게 들이대며 말했다. 제롬은 당황해하며 그들
사이를 갈라놨다.
"저, 클로아님.... 쥬아렌도 저와 같이 가기로 약속했습니다. 수도에 볼일
이 있다더군요. 그래서...."
"뭐야? 그전까지의 동료는 맘대로 버리고, 파트너를 정하셨다?"
제롬은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에겐 빚을 진 게 있어서...."
뭔가를 깨달았는지 클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고개를 세차
게 가로저었다.
"제롬을 살려준 은인이라고 하지만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어? 아, 그
래... 혹시 보답이라도 바라는 거야? 그렇다면... 내가 들고 나온 패물들
이 있으니까, 그것으로 만족해 줘. 그래도 모자라면 내가 편지를 써주
지. 그걸 들고 가면...."
"어리석군..."
클로아의 귀에 비웃는 듯한 쥬아렌의 음성이 들렸다.
"뭐얏! 말다했어? 그리고 네가 첩자인지 어떻게 알아? 너에 대해선 눈곱
만큼도 알 생각은 없지만, 갑자기 나타나서 동행하겠다고 하는 수상한
녀석을 데리고 다닐 만큼, 속편하지 않다구."
클로아는, 무관심한 표정을 지으며 상대도 안하는 쥬아렌의 모습에 속
이 상했는지 얼굴이 퉁해져서 대들었다.
그리고 이 녀석과 함께 가면 세워놓은 계획이 물거품이 된단 말이야!!
벤투자의 도움(?)으로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클로아는 여행 중에 제롬
의 마음을 구슬릴 계획을 세워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의 변수가 생
긴 것이다. 그것이 바로 쥬아렌.... 이렇게 되면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짜
는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둘이 같이 있을 기회도 줄어든다. 클로아의
이마에 혈관 마크가 생겼다.
속으로 안달을 하며 쥬아렌을 째려보던 클로아는 다시 한번 제롬을 바라
보았다.
"제롬, 알겠지? 이 녀석은 안돼. 혹만 될 뿐이라구....."
훗,
어이가 없다는 듯 쥬아렌은 피식 웃었다.
"뭐야? 할말 있으면 말로해."
"혹이라구? 누가 혹인지 모르나본데.... 도움도 안되는건 너라구. 어차
피 나야, 같이가나, 홀로가나 그게 그거지만. 만약 나와 동행하지 않는다
면, 위험한 건 바로 제롬일껄. 뭐, 난 상관없지만 기껏살려놓은 목숨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걸 볼수가 없어서 인심써서 같이가려고 했더니... 혹
은 내가 아니라 너야. 그것도 목숨까지 갉아먹는...."
쥬아렌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클로아를 바라보았고 클로아는 잡아먹
을 듯 그를 노려보았다.
골치가 아픈지 이마를 누르던 제롬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젖고는 클로아
를 향해 말했다.
"클로아님, 이미 정한 일입니다. 저도 생각해서 결정한 것이니 더 이상
왈가왈부할..."
"그래 좋아, 제(쥬아렌) 편을 든다 이거지? 두고봐! 제롬."
클로아는 잔뜩 삐진 얼굴로 퉁퉁부어서, 제롬을 바라보다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따라가려던 제롬은 홀어머니와 아내사이에 끼인 남편의 심정이
되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갈팡질팡하였다.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던, 이 사건을 발생시킨 장본인인 쥬아렌
은 아무 책임도 없다는 듯, 팔짱을 풀고 멀찌감치 떨어져있는, 클로아가
향하고 있는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앗, 쥬아렌"
제롬은 급하게 쥬아렌의 뒤를 따라잡았다. 쥬아렌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제롬을 바라보았다.
"........."
아무 말도 없다. 그냥 뚫어지게 다음 말을 하라는 듯 제롬의 얼굴만 쳐다
본다.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자, 제롬은 쥬아렌에게만은 찔리
는 것이 있는지라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물었다.
"클로아님께는 그렇게 말했지만.... 솔직히 난 이해가 안돼. 지금에서
야 생각났지만... 위험한 상황에서 우리를 구한 것도, 죽어가던 내 목숨
을 구한 사람도 너야. 분명히 네가 뛰어나다는 건 인정하지만 나를 도와
주기 위해서 같이 간다는 건 말이 안돼. 왜 그런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하
려는 거지? 아무런 득도 없이 위험한일에 휘말릴 뿐이잖아. 그리고 신분
을 숨기고 있는 사람과 같이 간다는건...... .....나는 괜찮지만... 만약 클
로아님에게 해가된다면...."
너라 해도 검을 들이대야 할지도 몰라.
제롬은 뒷말을 삼킨 채 쥬아렌을 바라보았다. 쥬아렌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자신의 옆까지 온 제롬의 곁을 지
나치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날 믿어달라는 주제넘는 소리까진 안하겠어. 하지만 불안해하는 것 같
으니까 약속하지. 결단코 너희들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거다. 다만 수
도까지만 동행할 뿐이니까. 그러니까..... 나에 대해 신경쓸 것 없어."
미안해 하는 제롬을 남긴 채 쥬아렌은 차가운 미소와 함께 그의 시야에
서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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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제너시스 Date : 13-09-2001 21:32 Line : 237 Read : 3134
[86] <차원 연결자-82.붉은 머리 소년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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