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황당한 소년
"하지만 그건 인간사이에서 통용될 뿐이야. 나와 너 사이에는 아무런 문
제될 것 없어."
"뭐?"
이해가 안되다는 듯 얀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너에게 변환 마법을 걸어서 여자로 변하게 하던가, 그게 마음에 안 들
면 내가 변하면 되니까. ...남성의 모습이 마음에 들긴 하지만 네가 원한
다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어."
"....소년..."
"키리아..."
소년(키리아)은 얀의 말을 정정했다.
"그래 키리아, 우선 네 말이 맞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난 너와 만난 기
억은 있지만, 그런 미래지향적인 약속까지 한 기억이 없는데?"
"그런가...."
키리아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미
소를 띄우며 얀을 바라봤다.
"하긴, 인간이 어릴 적 기억을 간직하기란 어려울 테니까... 우리 같은 드
래곤들이나 몇 천년된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기억하는 거겠지."
"드래곤?!"
세스는 놀라는 눈치였다. 말로만 들었지, 드래곤을 구경하기란 무척 드
문 일이었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 나와있다고 해도 유희중인 드래곤이
니, 그런 경우의 드래곤은 진정한 드래곤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 경
우 유희중인 삶에 충실하다.) 그러니까 자신이 직접 드래곤이라도 밝힌
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네가 드래곤? 그럼 난 신이게."
얀은 웃으며 신나게 키리아의 머리를 비벼주었다.
"정말이라니까!"
"오호, 정말? 그럼 이 자리에서 다시 드래곤으로 변해봐. 내가 믿어줄
게."
얀은 키리아가 어린아이 특유의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약을
올렸다.
그러나, 이미 키리아의 눈에서 오랜 연륜과 광폭(狂暴)함을 알아챈 세스
는 그의 정체를 확신하고, 분노를 사기전에 얀을 말려야겠다고 생각했
다. 하지만 키리아에겐 얀은 특별한 존재였나 보다 얀이 열심히 괴롭히
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꾹 참고 있었다.
"나도 그러고는 싶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단 말이야."
"응?"
시무룩해지는 키리아를 보자, 얀은 의아해 하며 키리아의 머리에 얹어있
던 손을 내렸다.
"...내가 너를 포기 못하는 이상... 드래곤의 모습으로도, 또 그들의 무리
에도 들어갈 수 없어...."
뭐?
"너희들을 구할 때 사용했던 마법을 끝으로 힘이 봉인 당했어. 고작해야
4서클의 마법이 다라구.... 거기다 이런 꼬마의 모습으로 봉인되었기 때
문에 유희 중에 사용하던 모습으로 폴리모프조차 할 수조차 없어."
키리아의 말이 충격이었나 보다 얀은 굳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 잠깐만. 그러니까 절벽에서 떨어졌던 우리를 구한 것이 너였고, 또
네가 이렇게 된 것은 나 때문이라고?"
얀은 미간을 좁히며 키리아에게 물어보았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말해봐. 네가 그렇게 된 이유를 들은 권리는 있겠
지...?"
키리아는 쑥스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저... 나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거야? 다행이다. 나에 대한 사랑이 식은
줄 알았어...아야야야."
"그런 닭살 돋는 말은 빼고 어서 말하지 못해."
얀은 키리아의 볼을 흔들며 소리쳤다. 그들 뒤에 서있던 세스는 드래곤
이라는 정체를 알았음에도 별 생각 없이 행동하는 얀의 무모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알았어. 난 레드 드래곤이야. 나이는 대략 1200살 정도구. 인간으로 쳤
을 때 청년기라고 할 수 있어. 레드 드래곤 일족에서 내 위치는 제법
상당해.
각 드래곤 부족은, 로드를 대신할 차기 수장 후보을 해츨링 때부터 눈여
겨 봐 두었다가, 선택되어진 여러 마리들 중에서 다수결에 위해, 한 명
(마리?)의 로드를 선출하거든... 그런데 나도 그들 중 하나였어."
얀은 흥미로워하는 눈치였다. 재미있어하는 그의 눈동자를 보더니 키리
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해츨링에서 벗어나자마자 나는 여러 가지 유희를 즐겼어. 하지만 어
느날 갑자기 모든 것이 다 싫증이 나는 거야. 뭐, 수면을 취하면 몇 백년
지나가는 거야 금방이지만 그렇다고, 잔다고 해서 내 무력증이 사라
지는 것도 아니였구.
그러다가 우연한 곳에서 어떤 인간을 만나게 되었어. 난 유희로서 즐기
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가 좋았어. 그래서 그 사람의 친구가 되었고
나중엔 결혼까지 약속했지."
"히야, 정말? 축하한다. 언제 결혼하는데... 잘됐네. 그런데.... 잠깐, 너
이런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며. 그런데 결혼한단 말이야? 그 사람 참 안
됐네. 궁금한걸, 누구야? 소개시켜 줄 수 있어?"
얀은 신기해하며 물어보았고, 순간 키리아의 얼굴은 뭣 씹은 표정이 되
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입에서 허탈한 듯 말이 새어나왔다.
"너잖아."
"엇, 뭐라구? 그게 나란 말이야...? 그러고 보니, 네가 주장하길 내 남편
이라고 했으니까... 맞는 말이군. 하지만... 그때도 나는 남자였을 텐데,
어떻게 너와 결혼한다구 했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하던 얀은 고개를 돌려 수상쩍다는 듯 키리아
를 바라보았다.
"누가 먼저 프로포즈 한거야?"
"...내, 내가...."
얀의 눈이 더욱 수상하다는 듯이 요리조리 키리아를 살펴보았다. 그럴
때마다 키리아의 몸은 움츠러들었다.
"언제 한 건데?"
"...어, 15년 전쯤에...."
"히에엑, 자, 잠깐 15년 전이라면. 지금 내 몸 나이가 19살이니까.... "
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획 돌려 키리아를 노려보았다.
"4살일때 잖아! 너 생각이 있던 거냐?(너 돌았냐라는 뜻과 동일;)"
"물론 이지, 미인이 될 소지가 다분했는걸. 미리 점찍어 둔 거야."
이럴수가, 키워서 잡아먹히는 건 나였단 말인가?
얀은 순간 경직되었다가, 비실비실 걸어가 의자에 털썩 쓰러지듯 앉았
다.
"얀 어디 아파?"
키리아는 걱정스러운 듯 얼굴 가득 염려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가 아프게 만들었잖아!
"그런 거 신경쓰지 말구 다음 이야기나 계속해봐."
키리아를 흘겨보던 얀은, 곧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고개도 돌리지 않
은 채 계속하라는 신호로 손을 흔들어댔다.
"...음... 그러니까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내가 인간을 만난다는 것이 발
각되었어. 다른 드래곤이었다면 그 정도야 눈감아 주겠지만 난 사정이
달랐거든. 차기 드래곤 로드의 후보 들 중에 하나기도 했지만... 내 피가
에이션트 드래곤에 가까웠기 때문에 유희라면 몰라도 결혼하는 것은 꼭
드래곤중에서 선택해야했거든."
"어... 혈통보존 같은 거구나."
얀은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날로 감시 대상이 되어서 너에게 갈 수가 있어야지. 거기다 너
의 위치를 안다면 괜찮은데, 네가 있는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자, 잠깐만. 분명, 나를 만나러 온 것은 너잖아. 그런데 어떻게 내가 있
는 곳의 위치를 모를 수 있지?"
키리아에게서 자신이 집을 물어보려 기대하고 있던 차에 뜻밖에 말을 듣
게 되자 얼이 나간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게 말이지... 로드의 레어에 방문했다가 구경하던 중에, 어떤 방에
서 우연히 이동 마법진를 발견했거든. 한창 심심하던 차에 여러 개의 마
법진중 하나를 골라서 갔던 거라...."
키리아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만든 사람(드래곤)이야, 알고 있겠지만... 난..."
"아무리 그래도 도착한 장소에서 뭐라도 들은 것이 있을 것 아니야. 거
기 있던 사람이나 나에게서 들은 것 없어?"
얀의 말에서 이상한 감을 느낀 키리아는 의아해 하며 얀을 쳐다봤다.
"얀 왜 그래? 그런 걸로 흥분하고. 너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건 미안하지
만... 이제부터 네가 잘 가르쳐 주면 되잖아."
"기억이 않나."
"뭐?"
퉁한 얼굴이 된 얀은 고개를 돌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기억이 나질 않는 다구.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거라곤. 집이 무척 컸다는 것과 이름이 얀이라는 것 뿐이야..."
"그래... 무척 컸어, 왕궁만큼이나. 그리고 정원도 아름다웠구. 사람들도
꽤 많이 다녀서 너와 만나는 걸 들킬 가봐, 그들이 사라진 다음에야 너
를 만났으니까. 그 사람들 너를 시중들던 것 같았는데, 귀족들 중에서 아
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보면 어떨까?"
키리아는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는지, 기대에 찬 눈초리로 얀을 바라보
았다.
"아, 그렇겠구나. 생각해줘서 고마워."
"우리 사이에 뭘..."
내가 직접 로드에게 가서 물어본다면 그것이 더욱 빠를 겠지...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얀과 헤어져야 할지도 몰라...
키리아는 갈등하다가 자신의 욕심에 지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입 다물고, 웃으며 얼버무렸다.
"...로드가 없는 틈을 타서 잠깐씩 너를 만나러 갔던 거라, 도움이 되지
가 않네..."
"괜찮아-. 그런데.... 내 기억이 맞는 다면, 너는 얼마 전 까지도 나를 찾
아왔었어, 그래서 난 네가, 내 친척 뻘 되는 줄 알았거든. 감금되어 있었
다면서 어떻게 나를 만나러 올 수 있었지?"
"아, 그거?"
대수롭지 않는 듯 키리아는 말했다.
"그전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동 마법진에 수정을 놓아두고 왔거든. 그
걸 이용해서 정신력 감응으로 너에게 갈 수 있었던 거야. 하지만.. 지금
쯤은 발견되었을 테니까. 사용할 수 없어."
"...그래....?"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얀은 실망했는지 시무룩해졌다. 얀은 테이블을 짚
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키리아, 넌 그냥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 난 너에 대해 생각나는 것이 없
어. 고작해야, 네가 나를 찾아왔었다는 것이 다야. 그러니까...나와 같이
있어도 얻는 것이 없을 거야. 친구는 될 수 있어도 그 이상의 관계는 될
수 없어. ...많은 것을 잃어가면서 나와 있을 필요는 없잖아... "
얀을 바라보는 키리아의 눈빛은 슬퍼 보였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띄우
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이 된 다면 할 수 없지... 하지만, 이것 하나 정도 알아줘. 로드의
후계자의 자리를 포기하고, 드래곤으로서의 삶을 포기한 건 내 선택이였
어. 난 하나도 후회하지 않아. 너에 대한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아. 너와 있
으면 편해.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는걸. 난 내 의지로 너에게 왔어. 부
탁이야. 그냥 너의 곁에 있게 해 줘."
사랑고백 같은 간절함. 얀은 키리아에게 미안해졌다.
"하지만... 친구 이상은 될 수 없어. 그래도 괜찮아?"
"인간의 삶은 100년 정도 밖에 안돼. 드래곤에게 치자면 너무도 짧은 삶
이야. 그 이후에 돌아가면 되지... 그러니까 날 염려할 것 없어. 그리고
전에, 엄청나게 놀았으니까 후회는 없어. 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뭐든
지 좋아."
얀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허락할게.... "
얀은 키리아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짚고 웃음 띤 어조로 말했다.
"키리아, 배고프지 않아? 우리 식사준비나 하자."
얀은 옆에 앉아있는 세스에게로 고개를 향했다.
"세스, 넌 여기서 기다려, 금방 만들어 올게."
"..그래..."
충격적인 대화를 들은 터라, 세스는 별말없이 승락했다.
문 밖 복도로 나와 말없이 길을 겄던 얀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
며 키리아를 불러세웠다.
"키리아"
"응, 왜?"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게 하나 있거든... 분명 너는 절벽에서 떨어지
던 우리를 구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나는 멀쩡하고 세스는 다리가 부러
진거야?"
"아, 그거? 레어에서 뒹굴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네가 다급하게 부르는
것 같더라구, 그래서 마음이 가는데로 그곳으로 향했다가 너랑 녀석을
구하게 되었는데...
너랑 같이 있는 걸 보니까 눈이 뒤집히더라구 그래서 바닥에 내려놓자마
자 뒤로 던져 버렸지... 그런데, 그 녀석 되게 약하데, 다리가 금방 부러
지던걸..."
헉, 얀은 굳어져 갔다.
지금 그의 마음속에선, 건드리면 깨질것 같은 일편단심 미소년의 이미지
가 박살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연적이 될수도 있으니까, 미리 제거하려구 했지만, 네가 슬퍼할것 같아
서 그냥 내버려 뒀어. 나 잘했지?"
쓰다듬어달라는 듯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그를 보자, 얀은 깨달아버렸다.
드래곤은 무서운 종족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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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제너시스 Date : 13-09-2001 21:38 Line : 254 Read : 3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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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졌던 83편 읽으셨던 분들~, 뒷 부분이 너무 어색해서 약간 손질했습니당...;
내용이 약간 달라졌어요. 별로 상관할 정도는 아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