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조우(遭遇)<1>
푸른 초원을 연상시키는 초록빛 머리카락, 분홍빛이 감도는 여린 살결,
갓난아기 특유의 포근한 체향, 자신을 보며 방실거리며 웃는 금색 눈
동자.....
"끼아아아아앗~ 너무 귀여워."
얀은 아기를 안아 들고는 아기의 손에 볼을 비비고 있었다. 그는 아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 옆에는 관심을 빼앗긴 키리아가 얀의 옷자락을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얀의 눈에는 오직 아기만이 보이는지 상대를 안
하고 있었다.
세스는 3명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 어떡해야 하는지... 눈앞
이 캄캄하다. 고민하고 있는 세스를 바라보던 얀은 픽 웃음을 짓더니, 세
스에게 걸어와 아기를 내밀었다.
"......?"
세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얀을 쳐다보았다.
"내가 독차지하고 있어서 삐진 것 아니야?"
"..그게 아니야...."
세스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얀은 아기를 세스의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세스의 팔을 끌어당겨 아기를 안게 했다. 난생처음 아기를 가까이
에서 본 세스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며 허둥대었다.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띄고 바라보던 얀은 세스 옆, 침대에 걸터앉았다.
얀은 아기를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고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세스를
보았다. 겨우 자세가 잡혀, 아기를 제대로 안아들고 있던 세스는 얀의 시
선을 의아해하며 쳐다봤다. 얀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시선을 내려 아기
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것 같지 않아?"
"뭐가?"
세스는 앞 뒤 다 잘라먹은 얀의 말의 요지를 찾기 위해 무지 노력하는
듯 보였다.
"그러니까... 겉모양은 아기이지만... 알에 들어있을 동안 영양분을 채운
건지, 배고파하는 것 같지도 않고 잠도 잘 자고, 데리고 있는데 불편한
점이 없어.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아기같지가 않다?"
".....응..."
얀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무룩해져있는 얀을 바라보던 세스는 손
을 들어 얀의 어깨를 두드렸다.
"훗, 당연한거지... 누가 이 녀석을... 이...녀석...을..."
세스는 말을 하다가 까르르 웃는 아기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미소를 보
인 그는 검지를 들어 아기의 콧잔등을 살짝 건드렸다.
"...하하, 뭐하는 거야."
얀은 세스의 별난 행동에 웃음을 지었다. 세스는 자신이 행동이 쑥스러
웠는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얀을 바라보았다.
"뭐 어때.. 동생처럼 키우면 되는 거지... 너에겐 이미 드래곤이라는 거창
한 친구까지 있잖아."
세스는 고개짓을 하여 키리아를 가리켰다. 삐져서 한구석에 가있던 키리
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알았는지 궁금해하며 얀과 세스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스는 편한 미소를 지으며 3명을 차례대로 바라
보았다.
그래... 고민할게 뭐 있어... 그냥 솔직하게 생활하면 되는 거지.....
키리아를 바라보고 있던 얀은 웃으며 세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웃음기
가 감도는 어조로 말을 했다.
"아무래도 키리아가 화가 난 것 같아. 풀어줘야지 안 되겠어. 드래곤의
분노를 사는 건 네가 무섭다고 했지?"
얀은 '쿡' 웃음을 삼키더니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래간만에 밖에 나가서 산책이나 할까... 세스, 어때 생각 있어?"
"난 정리해야 할 것이 있어서...."
세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얀에게 아기를 넘겨
준 세스는 얀을 따라 일어섰다.
"세명이서 갔다와."
세스는 웃음을 짓고는 지팡이를 집고 균형을 잡으며 말했다. 얀은 고개
를 끄덕이고는 키리아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키리아, 같이 산책 갈래?"
"어, 정말?"
키리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던 그는 뭔가
깨달았는지, 시선을 세스에게 향했다.
"세스는?"
"저는 그냥 있으려고요. 키리아님... 재미있게 놀다오세요..."
완전히 애한테 하는 말 같잖아. 세스는 자신의 한 말 때문에 찔끔 했지
만 키리아는 얀과 산책나간다는 생각에 취해, 별생각이 들지 않는 모양
이었다. 빨리 나가고 싶어서 안달하는 키리아를 바라보며 얀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나가기 전에 준비할 것이 있어. 얌전히 있지 않으면 안 데리고 나간다."
어린아이에게나 하는 협박이었지만, 키리아에겐 즉효 했다. 곧 얌전해졌
고 키리아는 물끄러미 얀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얀은 아기를 세스에게 맡기고는, 침대 곁에 있는 여행 가방 안을 뒤적이
기 시작했다. 찾는 것이 잘 안 나오는지 가방을 거의 헤집어 놓는 얀을
보고 있던 세스는 궁금해하며 물어보았다.
"뭐 찾는 거야?"
"어? 음.... 앗, 찾았다. 이거."
얀은 가방 안에서 찾은 물건을 번쩍 들어올렸다. 세스는 그것을 보는 순
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푸하하하하, 그거 아직까지 갖고 있었어. 안 차고 있어서 잃어버린 줄
알았어."
얀은 퉁한 얼굴로 세스를 바라보았다. 얀이 들고 있는 물건은 여러 색의
유리구슬이 꿰어있는 팔찌였다. 주노에서 친구들에게 받았던 선물이었
다. 어쌔신들에게 쫓길 당시, 소리가 들리면 추적당할까봐 따로 보관해
두고 있었지만, 이곳에선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오래간만에 팔찌를 하
자, 그전에는 그렇게 싫어하더니 감회가 다르나 보다. 얀은 싱글벙글이
었다. 하긴, 친구들과의 추억이 그 안에 배여 있으니 당연할지도 모르지
만...
세스에게서 아기를 받아든 얀은 키리아와 함께 집밖으로 나왔다. 세스
는 오두막 마당까지 그들을 배웅하러 걸어나왔고, 얀이 그만 들어가라
고 하는데도 세스가 길가까지 계속 걸어나오자, 얀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마 세스는 얀과 키리아가 못미더웠나 보았다. 불안한 모양인지 따라갈
까 고민하는 그를 보며 얀은 고개를 흔들었다.
"잠깐 산책만 하고 올 거니까 걱정할 것 없어. 참....!"
얀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세스에게 기대 어린 눈빛을 던
졌다.
"내가 산책 다녀올 동안 아기이름 지어놓지 않을래? 내가 지으려고 해
도 좋은 이름이 없어서 너와 상의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 이대로는 아무
래도 불편하니까 말이야."
세스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는지,
얀은 걱정거리를 사라져서 무척이나 기쁜 모양이었다. 얀은 뒤로 돌아
키리아와 함께 마을길을 걸었다.
그 동안 집안에 틀어 박혀 있었기 때문에, 얀에겐 오늘이 첫 외출이었
다. 마을길은 18가구의 집들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간혹 가다 마을
주민들과 마주칠 수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얀에게 인사를 했
고, 아기가 예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친절한 사람들을 만난 얀은
기뻐하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금새 사이가 좋아 질 수 있었다. 얀
은 마을 공터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들게 되
었다.
얀의 옆에서 아기를 대신 돌봐주고 있던 아주머니가 이야기 거리가 생각
났는지 얀에게 물어보았다.
"아참, 그 얘기 들었어요?"
"무슨 얘긴데요?"
"글세, 요즘 마을 이곳저곳에 기마병들이 돌아다닌다지 않아요."
아주머니는 비밀이라도 이야기하듯 소리 죽여 이야기했고, 그 얘기를 들
은 아주머니 옆에 서 있던 젊은 새댁은 웃으며 얀에게 귓속말로 작게 속
삭였다.
"바바라 아주머니는 뭐든지 굉장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저런 식으로 이야
기하는 거니까 걱정할 필요까진 없는 이야기일거예요."
얀은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얀의 앞에 서있는, 키리아를 귀여
워하는 나이 많은 아주머니는 바바라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는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옆마을에도 그저껜가 왔다지 않아? 도망자를 찾는 다던가... 누굴
찾고 있다고 하던 거 같은데...."
그 아주머니의 말에 얀은 흠칫 놀라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수색을 하는 사람들이 용병들이래요?"
관심을 갖고 얀이 물어보자, 바바라 아주머니는 그 말을 해주길 원했다
는 듯 고개를 크게 가로 저으며 말했다.
"그랬다면... 별로 관심이 가지 않겠는데.... 들은 말로는 비정규군이라
고 하데."
"비정규군이요?"
"그래, 그것도 귀족가에 소속되어 있다지 아마."
젊은 새댁은 검지를 입에 손을 가져가며 놀라는 눈치였다. 그녀는 놀라
며 바바라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그런 사람들이 이런 촌구석까지 웬일이래요?"
나이 많은 아주머니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같은 사람들이 뭘 아나... 그저 입방아나 찍는 거지... 자, 자... 이
런 이야기는 그만두고 다른 이야기나 하자구... "
얀은 아주머니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키리아가 너무도 지루해 하
자,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그곳을 빠져 나왔다. 물론 아주머니에게서 산
책하기 좋은 코스를 알아 가지고 말이다.
키리아는 얀의 옷자락을 쥐고는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지은 채 길을 걸
었다. 오솔길을 걸어가며 주위를 둘러보던 키리아는 아주머니들이 말했
던 동산을 발견하고는 그곳을 가리키며 기뻐하며 말했다.
"얀! 봐, 저기인가 봐."
"정말... 금방이네..."
키리아는 먼저 달려가서 얀을 불렀고 얀은 아기를 안고 있는 관계로 천
천히 올라갔다. 나지막한 동산에 올라간 키리아는 그곳에 있는 큰 나무
밑으로 다가갔다. 나무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는지, 사람들의 이름이
나 키를 잰 흔적들이 보였다. 그것을 만져보고 있는 키리아에게 다가선
얀은 주위를 둘러보다 나무 밑에 주저앉았다. 큰 나무는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서 따가워지는 햇살을 가리며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 아래로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는데, 아마 소와 양을 방목하는 곳인 것 같았
다. 동산 왼편에는 꽃들이 피어있었는데, 제철을 만났는지 여러 색의 꽃
이 앞다투어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얀이 웃음을 짓자, 키리아는
장난스런 표정을 짓더니 그곳으로 달려가 꽃을 한아름 꺽어왔다.
"이런... 너무 많이 꺽어온것 아니야?"
"아니, 화관을 만들려면 이 정도는 필요하다구..."
"화관(花冠)?"
"응, 금방 만들어 줄 테니까 기다려."
얀에게 점수 딸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키리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열심히
만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던 얀은 은근슬쩍 키
리아에게 물어보았다.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정말 예쁘네... 와~ 이런걸 다, 언제 배웠어?
정말 대단하다..."
키리아의 재주가 놀라운 듯 감탄한 얀의 칭찬에 키리아는 마음이 풀어져
서 헤헤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걸로 유희 초기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
데... 로맨틱한 분위기가 연출되잖아, 거기다 내 미모가 받쳐주니까... 금
방........."
키리아는 화관을 만들던 손을 멈추고 경직되어 버렸다. 키리아는 멋쩍
게 웃으며 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내 맘속엔 오직 한 명밖엔 없다구."
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 키리아를 바라보았다.
"오호 그러셔?"
"헤헤헤, 그럼..."
키리아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키리아를 놀리
려했던 얀은 놀림의 상대가 되지 않자, 그만 포기해 버리고 자리에 길
게 누워버렸다.
아기를 배 위에 올려두고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하늘을 바라보던 얀은
땅이 울리는 진동에 깜짝 놀라 몸을 반쯤 일으켰다.
"지진인가?"
얀이 의아해 하며 키리아를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언덕 밑
에 자리하고 있는 큰길가를 가리켰다. 먼 거리에서 말들이 행렬이 달려
오고 있었는데, 소리는 크게 들리지 않았지만, 얀이 땅에 누워있었기 때
문에 그 진동이 전달된 것이었다. 말들은 점차 가까이 다가왔고 언덕 아
래 길을 달려갔다.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말들을 바라보고 있던 얀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우, 대단하다.... 멋있어."
흐트러짐 없이 질서 정연하게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얀은 그
모습에 반하여 눈을 떼지 못했다.
"꽤 대단한 귀족인 것 같군...."
"무슨 소리야?"
얀이 의아해 하며 물어보자 키리아는 턱짓으로 그들이 사라진곳을 가리
키며 말을 이었다.
"기사단 문장이 없는 걸로는 봐서 비정규군의 기마병인 것 같은데... 저
정도라면 돈이 꽤 드는 준마라고, 발육 상태라던지, 달리는 자세를 보니
까 명마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거기다 말을 모는 사람들 보
통 훈련된 것이 아니야. 균형이 잡혀서 흔들림이 없어...."
"그런데... 그건 그렇고. 저 쪽으로 가면 우리가 있는 마을이잖아?"
"그렇지."
"무슨 일로 온 걸까? 궁금하다."
얀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먼지만 남겨놓고 떠나간 그들이 향한 마을 쪽
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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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제너시스 Date : 14-09-2001 00:18 Line : 249 Read : 3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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