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조우(遭遇)(4)
흔들림조차 없는 고급 마차 안에 앉아, 신기한 듯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얀은 미소를 띄고 자신을 바라보는 엘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엘은 자신의 눈길에 부끄러워하는 얀을 보고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훈훈해져 온다. 아직 어린아이라고 생각했던 자식은 장성하여 어
느덧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40이 되지 않은 나이에 할아버지라
니.... 허무하다고 해야할까... 정말 기쁘다고 말해야할까.... 정의 할 수
없는 마음이 출렁인다.
엘은 시선을 돌려 턱을 괴로 창 밖을 바라보는 세스를 바라보았다. 뭔가
생각할 것이 있는지 사색(思索)에 빠져있는 아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
라보던 엘은 여전히 말이 없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고, 곧 세스에
게서 눈길을 옮겨 그 옆에 위치하고 있는 얀의 안색을 살폈다. 얀은 고개
를 숙여 안겨있는 아기에게 시선을 맞추고 있었는데, 약간 긴장한 듯 보
였다. 엘은 이런 분위기가 얀에게는 어색할거라 여기고 그의 마음을 안
정시키기 위해 뭔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얀양... 그 동안 마음고생이 많았죠? 어쌔신들에게 쫓기기까지 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네...
거기다 몸까지 힘들었을텐데, 멍청한 아들놈 때문에 애꿎은 얀 양에게까
지 피해가 가다니... 미안하게 생각하오.
나는 얀 양을 딸처럼 생각하니까 얀 양도 나를 편하게 생각해주면 좋겠
어요. 만약 아들놈이 괴롭히는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내
가 대신 혼을 내줄 테니까."
자신을 생각해 주는 그의 말이 들려오자, 고개를 들어 엘을 바라본 얀은
세스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약간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마음고생은요, 저 때문에 세스가 고생이 많았죠. 걱정하실 것 없어요.
염려하지 않으셔도 잘해나갈 자신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아버...님도
절 편하게 생각해주세요. 말도 놔주시고요. 그냥 편하게 얀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럼 그럴까? 네가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정말 고맙구나."
"저야말로 좋은 아버지가 생겨서 기쁜걸요."
죽이 척척맞는구나. 세스는 속으로 혀를 차며 눈동자를 힐끔 돌려 둘을
바라보았다. 엘과 얀은 기쁜 듯이 서로 웃음띤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누가 보아도 다정한 부녀처럼 보였다. 들려오는 웃음소리 때문
에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세스는 찌를 듯한 시선을 느끼고 그쪽으로 고
개를 돌렸다.
윽, 키리아가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된 것을 마
땅찮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세스는 땀을 삐질 거리며 생긋 웃어 보이
고는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뒤통수가 따갑다...
"사실은 말이지.... 얀처럼 예쁜 딸을 갖는 것이 소원이었단다. 그런데 어
쩌다 보니까, 저런 무뚝뚝한 아들녀석 한 명만을 갖게됐지 뭐냐."
엘은 한숨을 쉬고는 자신의 한 말이 세스에게 어떤 행동을 낳게 할지 궁
금한 듯 고개를 돌려 세스를 바라보았다. 세스는 여전히 창밖을 주시하
고 있었다. 엘의 말에서 궁금한 점이 떠오른 얀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엘에게 물어보았다.
"무뚝뚝이요?"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얀의 반응이 귀엽게 느껴진 엘은 미소
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옆에서 같이 지냈을 네가 물어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인
걸."
엘은 턱을 문지르며 눈길을 세스에게 주었다. 얀 또한 엘의 말을 듣고 고
민하는 듯 보였다.
"전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안는데요. 제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나 한
발 앞서서 말해주었고, 여행 중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으음....."
"뭐예요 아버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거세어지자 세스는 더 이상 참지못하고 고
개를 돌렸다.
"너.... 성격파탄자 아니였냐?"
"......"
세스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나를 그 지경으로 만든 것이 누군데요. 그나마 지금처럼 된 것은 가출
한 덕분이라구요."
"뭐야, 내가 원인이라는 거냐? 그래, 내가 딸을 원해서 어렸을 적에 너
를 딸처럼 키웠던 것이나, 현실에 눈을 뜨고 귀여운 며느리를 맞을 생각
에 일찍서부터 맞선을 시작했던 것은 잘못이라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그게 성격파탄까지 가는 일이었냐?"
"....그럼 아닌가요....?"
역시 아버지는 마이페이스였어....
세스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얀은 지금에서야 비밀이 풀리는 느
낌이었다. 어쩐지 여장을 한 세스가 어색해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동
한다고 생각했더니 어렸을 적부터 훈련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납득
을 하던 얀은 멈칫했다. 잠깐, 그렇다면 이전에 말했던 가출했던 이유
도... 설마...
지금의 상황으로 유추해볼 때 자신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아, 세스의
그 가출 이유라는 것은 믿기 힘들다. 만약 세스, 자신이 한 이야기(집이
갑갑해서 도망쳤다던)가 맞다면, 다른 것을 행하기 전에 그의 아버지의
오해부터 먼저 풀었을 테니 말이다.
"세스... 네가 예전에 말했던 가출했던 이유...말이야..."
다 알고 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바짝 다가와 자신을 바라보는 얀을
확인한 세스는 의표를 찔리듯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서 창가에 바짝 기
대어 앉았다. 세명(키리아, 엘, 얀)의 시선에 움찔한 세스는 고개를 끄덕
이며 시선을 피했다.
"규제가 많은 편이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어. 하지만... 하지
만, 그 많은 여자들은 정말로 참아내질 못하겠더라구... 그래서..."
"가출을 결심했다?"
뭐야, 역시 여자들 때문이었어? 내가 추측했던 게 맞잖아. 사실대로 말
해 준 걸로 생각했더니...
얀은 괘씸하다는 표정으로 세스를 바라보았으나 이미 가슴속깊이 찔리
는 세스는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의제(議題)의 화살을 엘에게 돌렸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느긋하신 거죠? 저에게 반려가 생겼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안 좋은 상황이라는 말과 동일한 것일 텐데요. 2년전 맞선
을 주선했던 왕실 측에 어떻게 설명하실 거죠? 거기다, 얀은 귀족이 아
닙니다. 세력의 기반도 없고 다른 가문들에게 얕보이는 결과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느긋하신 거죠? 저는 이해가 가지 않습
니다."
엘은 무릎 위에 올려져있던 깎지를 낀 손을 풀러 자신의 앞에 위치한 세
스의 손위에 올려놓았다. 세스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순하여 깃털처
럼 부드러웠다. 세스는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마주 바라보았다.
"...글세... 내겐 말이다. 네가 행복한 일상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는 그런 것은 하찮은 걸로 생각되어지는구나.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
세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말없이 창가로 시선을 돌렸을 뿐이
다. 우습게도, 지금 이런 상황에서 처음으로 아버지라는 느낌이 가슴 속
깊이 다가왔다.
세스가 잠이 든 기미가 보이자 엘은 손을 입가에 가져가 대고 얀의 귓가
에 속삭였다.
"사실은 말이지... 녀석이 워낙 성격파탄자로 이름이 높아서 결혼은 꿈에
도 생각못했단다. 너같이 착한 아이를 얻은 건만해도 감지덕지 해야지."
엘은 자신의 말을 듣고 얼이 나가 있는 얀에게 윙크를 했고, 얀은 불쌍하
다는듯 세스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성벽 위에 올라가 서치(search)마법을 시전하던
벤투자는 얼굴을 삐쭉이며 성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다행이 근처에는 지
나가는 사람이 없는 듯 그녀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벤투자의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카롯은 머
리를 흔들고는, 성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어내어 걸어갔다.
"기다려!"
벤투자는 다급히 다가와 카롯의 어깨를 잡아 그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
다. 카롯은 세찬 손길로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왜? 아직도 부족한가? 결계를 치고 수도를 샅샅이 찾아봐도 그 어디에
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잖아."
카롯은 싸늘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업신여기는 듯한 그의 눈빛
에 발끈한 벤투자는 성을 내려했으나, 원인 제공자는 자신이라는 생각
에 화를 눌러 참았다. 천하의 벤투자가 말이다.
"그래. 내가 잘못한 것은 알아. 하지만 이럴 것까지는 없잖아. 내가 그 녀
석을 죽인 것도 아니고 다만 행보가 늦어졌을 뿐이잖아. 그런데 왜 화를
내는 거지?"
"그 이유는 알고 있을 텐데. 이미 얀왕자는 어떠한 탐색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 않나? 그런데도 넌 단 하나의 희망을 없애려
했어. 단지 너의 재미로 말이야."
벤투자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녀는 무서운 안광으로 카롯을 쏘아보았다.
"그게 어때서? 그리고 그가 분명 수도에 있다는 것을 들었잖아. 이렇게
찾는 데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을 나보고 어떡하란 말이야."
냉정한 표정으로 벤투자를 쳐다보던 카롯은 코웃음을 쳤다.
"너 때문에, 네 녀석 때문에!!"
말을 하던 그는 멈칫하고는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뭐야 말을 끝내!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거냐! 짜증만 내면 나보고 어
떡하란 말이야!!"
벤투자는 발을 구르며 소리쳤으나, 카롯은 듣지 못한 듯, 아니 듣고도 못
들은 척 결계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다른 세상에라도 온 듯 그곳은
활기차게 사람들의 소리로 시끌벅적거렸다. 복잡하게 돌아다니는 사람
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던 카롯은 정신없이 걸음을 옮기다 문득 자신
의 처지를 깨닫게 되었다.
후후후
카롯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오른손
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질끈 깨물은 붉은 입술을 타고 선홍색 피가 흘러
내렸다. 그는 왼손으로 힘껏 벽을 쳤다.
오물로 뒤덮혀있는 시장 뒷골목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멍청한 놈...
얀왕자를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벤투자에게 말려들기 싫다는
바보 같은 생각 때문에, 지금의 사태를 만들었다. 디아테스님을 뵐 면목
이 없다....
주군은 자신이 허둥대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도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맛
보고 있겠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만 나온다. 뭐가 마계 최고의 지
장(智將)이냐, 한 사람의 행방을 찾을 방도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카롯은 벽에 기대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생각 같아선 제롬을 납치라도 하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간 벤투자로 인
해 발생한 사건 때문에 도움을 얻기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제롬
을 납치하는 것도 힘이 드는 일이다. 벤투자가 말했던 처음 느껴보던 신
성력... 멀리 있던 자신에게까지 힘의 여파가 미쳤다. 그것은 한순간에 벤
투자의 의욕에 금이 가도록 만들만큼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소년... 아마,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그는 정령
족의 힘을 계승하는 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의 힘은 고대로부터 대대로 전승되는 힘인 만큼 자신들이 넘볼 경지가
아닌 것이다. 각성의 상태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의 상태만로도
충분히 자신을 상대하고도 남을 것이다. 고작 소년 한명 때문에 마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자신들이 움츠러든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지금은
이성에 따라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의 힘의 성분을 생각해 보았을 때 특이한 향이 난다는 신성력
은 소년이 사용한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 그들을 도와주는 제3의 인물
이 있을 것이다. 만약 제롬이나 같이 있는 소녀가 그 힘을 사용할 줄 알
았다면 제롬이 그 지경까지 가지 않았을 테니까...
정말 얀왕자는 이곳 수도에 있는 것이 맞는 것인가? 어떤 수단에도 찾
을 수 없는 그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인해전술
밖에 없는 건가....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것이라곤 없었다. 직접 찾아 나서는 수밖에...
자신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사실에 카롯은 자조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1
분 1초가 아쉬운 지금 시점에서 시간이나 낭비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다.
주군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무력감으로 인해 분노로 몸을 떨던 카
롯은 귀에 들리는 떠들썩한 소리때문에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자괴감에
서 벗어났다.
"뭐야, 이 녀석 옷은 고급인데, 대낮부터 술이나 처먹고 토하고 있는 거
냐."
벽에 이마를 대고 있는 카롯의 모습을 보고 오해를 한 듯 껄렁껄렁한 말
투의 사나이는 카롯의 옆에 서서 그의 모습을 자세히 보려고 기웃거리
고 있었다.
"이런 건 '나 잡아 잡슈' 지, 발견한 놈이 임자라니까."
카롯의 옆으로 다가 온 꾀죄죄한 옷차림의 나이 많은 노인은 지팡이에 몸
의 중심을 실으며 말을 받았다. 옆에서 그의 귀에 들릴 정도로 말하는데
도, 미동도 않는 카롯을 보고 누런 이빨을 내보이며 보기 싫은 미소를 짓
던 노인은 손가락으로 카롯을 가리켰다.
"이 녀석 완전히 맛이 간 모양일세. 이럴 땐 감사히 먹는 거란 말이다. 알
겠냐?"
"네, 네. 알겠으니까 좀 비키쇼."
등이 굽고 눈곱이 잔뜩 껴있는 사내는 그들 곁에 서서 눈치를 보다가 슬
쩍 카롯의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분위기가
만만치 않았기에, 약간은 두려움이 담겨있는 눈으로 돈주머니가 있을 곳
을 짐작해보는 듯 했다. 유복해보이는 도련님이 경호원도 없이 위험한 뒷골목에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 하며 어물쩡거리던 남자들은 자신들을 미는
손길에 옆으로 비켜섰다. 어느새 제발로 들어온 먹이감에 대한 소식을 들
었는지, 그들의 패거리로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었다. 웅성
거리는 소리가 뒷골목을 메우자 인상을 찌푸리며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댄 노인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요히 움
직임을 보이지 않는 그를 보고 안심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움직임이 없는 카롯을 보고 자기들끼리 좋아하였다. 비싸보이는
고급 망토와 망토 사이로 살짝 내비치는 그의 허리춤에 있는 단순한 장식
의 자수가 수놓아져있는 장식용 허리띠는, 분명 품속에도 그만한 상당량
의 돈을 지니고 있다는 보증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상하지
못했던 행운에 환호했다.
"햐, 이것 보게 이거 진짜 보석이야."
망토를 고정하고 있는 브로치에 박혀있는 푸른색 사파이어를 보며 그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파이어는 영롱한 푸른빛을 내며 유례가 없는 크기
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그것을 벗겨내고 싶었지만 그의
주위에 흐르고 있는 왠지 알 수 없는 분위기를 느끼고는 머뭇거리고 있었
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서늘하고 차가운 기운이 골목안을 덮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어라..."
"왜 그러냐?"
마음의 경고에 따라야 할지, 아님 자신의 욕망에 따라야 되는지, 상반되는
두 마음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남자는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의아해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앞에서 멍하니 말을 뱉은 친구를
바라보았다.
"야, 이거 꽤 돈이 되겠는데. 어쩌면 이 녀석 몸에 걸치고 있는 것보다도
말이야."
"뭐가 말이야?"
의아해하며 묻자, 카롯의 얼굴 쪽에 서있던 사내는 히죽 웃으며 카롯을
가리켰다. 바람이 불어선지, 아님 카롯이 움직였는지 그의 얼굴을 덮고 있
던 자주색 머리카락이 약간만 그의 얼굴에 내려와 있었다. 흩트러진 머리
카락 사이로 그의 얼굴이 드러나보였다.
잡티조차 없는 진주빛 피부와 깍은 듯한 고운 얼굴선, 길게 내려있는 긴
속눈썹...
숨죽여 바라보던 사내는 감탄했다.
"햐, 이거 진짜 물건이네. 이놈도 팔아버리자구"
간이 커진 그들은 웃음을 지으며 카롯을 바라보았고 그들의 소리를 들은
갈팡질팡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라고 경고
하고 있는 본능을 무시했다.
"어느 정도길래 그래? 최상급이 아니면 값으로 안쳐준다구."
"와서 봐. 이 정도면 너끈히..."
말을 하던 사내의 말이 끊겼다. 서로의 눈치만 보던 사람들은 의아해 하
며 사내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굳어진 건 그 사내만이 아닌 듯,
사내 곁에서 일을 거들던 다른 사내마저 굳어있었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원인을 궁금해하던 남자들은 조심스레 앞으로 나섰고
그것을 보게 되었다.
붉은 눈...
은근한 압박감을 주던 인물의 감겨져 있던 눈이 뜨여져 있었다. 좀 전과
다른,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서늘한 기운이 그들을 감싸안았다. 방금 전
과 다른 변화라고는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붉은 색의 눈동자였지만, 그
것에서 나온 냉기만으로 몸이 경직되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카롯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내들은 그의 움직임만으로도 놀라 움찔
거렸다.
"..."
차가운 눈을 들어, 굳어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쳐다본 카롯
은 손을 들어올렸고 그대로 사선으로 길게 그어버렸다. 그는 천천히 걸음
을 옮겼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검은 망토가 펄럭거렸다. 그의 모습이 골
목에서 사라졌다.
짙은 피비린내만이 그가 지나간 자리에 향수의 여운처럼 남아있었다.
--------------------------------------------------------------------------------
Back : 95 : <차원연결자-91.수도입성> (written by 제너시스)
Next : 93 : <차원연결자-89.조우(遭遇)(3)> (written by 제너시스)
--------------------------------------------------------------------------------
--------------------------------------------------------------------------------
Total access : 314052 , Current date and time : Tuesday 9th April 2002 15:31:00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Fantasy in dreams(차원연결자)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제너시스 Date : 24-09-2001 23:40 Line : 380 Read : 3923
[96] <차원연결자-92.수도입성>
--------------------------------------------------------------------------------
--------------------------------------------------------------------------------
Ip address : 211.183.163.8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KOR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