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원연결자-93화 (93/127)

93.fiance

세스에게 끌려가다시피 걸어왔던 얀은 조찬용 소형식당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들이 들어서자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2인중 한 명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

어섰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샹들리에의 불빛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이는 긴 머리칼을

검은 리본으로 뒷덜미에 고정시킨 남성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여성을 의아하게

바라보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식당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국가의 정치

를 좌지우지하는 사람답게 얀과 세스가 그에게 다가왔을 때는 이미 그의 얼굴

에 떠올라있던 표정은 지워져있었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은 담담했

다.

"어서들 오너라. 그렇지 않아도 너희들이 지금쯤이면 내려오지 않을까 생각했단

다."

엘의 곁에 서있던 알테나는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세스는 사죄의 뜻을 밝히고는 엘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자신에게 시선을 주는

세스를 보고 옅은 웃음을 지은 그는 고개를 가로 젖고는 세스의 어깨너머를 바

라보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 데... 내가 초대했던 손님은 이제서야 도착했으니

까..."

엘은 재미있다는 눈빛이 되어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자신의 손님을 향해 미소

지었다.

목을 덮는 흑발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핸섬한 청년이었는데 늘씬한 장신에다

은근히 학자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절도 있는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섰다.

"어서 오게. 파엘군."

파엘?!

세스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등뒤로 침착하게 걸어오고

있는 파엘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곁으로 다가온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

사를 대신하고, 엘에게 보고했다.

"지시하셨던 사항들은 모두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저의 독단적인 생각인

데... 국정 보고사항은 다시 한번 훑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반 왕정파들의 항의

가 예상되므로..

"이런, 이런... 식사시간에 이러기인가?"

"그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주시죠. 보름동안 자리를 비우셨던 덕에 결제

사항들이 쌓일 만큼 쌓였으니까요. 아무리 제가 노력한다고 해도 능력밖에 일은

무리입니다. 자제 분도 찾으셨으니 이제부터는 더욱 열심히 해주시겠죠? 공작님

을 믿고 있는 저를 실망시키지 말아주십시오."

파엘은 사무적인 태도로 엘을 바라보았고 엘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마주

바라보았다. 궁금해하는 얀의 시선을 받고는 엘은 그제서야 얀의 존재를 깨달은

듯 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엘은 파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소개했다.

"나의 수석 보좌관 파엘 헬드리안 군이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

스스럼없이 대하고 있지. 얀도 가족처럼 생각해 주면 좋겠어."

파엘은 얀을 바라보았다. 얀을 바라보고 있는 파엘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입을 열자, 좀 전의 냉정함과는 다른 부드러움이 녹아들어 있는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식으로 인사를 하게 되었군요. 파엘 헬드리안입니다. 엘님의 보좌를 맡고있

죠. 그 덕분에 저택에 시도 때도 들려야 하는 경우가 많으니, 엘님이 말씀하시

던 대로 편하게 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부탁드리는 것이 기분

나쁘시지 않다면 말입니다."

"무슨 말씀을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얀은 생긋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고 파엘도 미소를 띄우고 얀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전류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던 엘은 손뼉을 가볍게 쳐

서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럼 소개가 끝났으니 이제 저녁 식사를 시작하도록 하지."

주위를 환기시키는 엘의 목소리에 그들은 각자 식탁에 자리를 잡았고 파엘은

그 와중에도 얀의 의자를 빼어주는 남성으로서의 에티켓을 발휘하여 얀의 선망

어린 시선을 받게되었다.

식사는 화기애애하게 했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얀은 엘과 알테나에게서

세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 듣게 되었다. 세스의 불만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파엘까지 합세하여 저녁식사내내 세스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만발하였다. 하

지만 얀에게 질문의 화살이 돌려지자, 세스는 시기적절하게 얀의 사교계 데뷔에

대한 화제를 꺼냈고, 엘과 파엘은 순간 예리한 빛을 번득였지만 세스의 의도대

로 넘어가 주었다.

저녁식사가 끝이나자 엘은 입가를 닦은 냅킨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

어섰다. 엘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거실로 자리를 옮겨서 얘기를 더 나누어 볼까?"

식사중의 좋은 분위기는 계속 되었고 모두들 방을 나서기 위해 문가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로 막 나가려던 얀은 누군가 자신의 팔꿈치를 잡자 의아해 하며 뒤

돌아보았다. 세스였다.

약간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보고 얀은 말을 하려 입을 벙긋

했지만 세스가 빨랐다.

"먼저 방에 가 있도록 해. 금방 따라갈 테니..."

입을 벌리고 있던 얀은 세스의 낯빛을 보고 입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얀이

부모님들과 함께 시야에서 멀어져 가자, 세스는 자신의 뒤에서 걸어오던 파엘이

옆을 지나칠 때 그의 팔을 거칠게 붙잡아 식당 옆 접대실로 끌고들어갔다.

세스에게 잡힌 채로 순순히 끌려오던 파엘은 방안으로 들어선 순간 세스의 팔

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세스에게 잡혔던 소맷자락을 털어 내고는 차가운 시선으

로 세스를 바라보았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세스가 자신에게 다가서자 손짓으로 더 이상 다가오는 것

을 막고는 불만어린 눈초리로 세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입을 열자 아무런 감정

이 섞이지 않은 냉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지? 나에게 볼일이 있다는 건가? 이미 그럴 단계는 지난 것 같은

데..."

파엘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고 세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을 직시하는 파엘의

눈을 마주보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세스는 머뭇거리며 나지막한 목소

리로 얘기했다.

"파엘..."

"바쁜 사람 잡지 말고 알아서 해. 어차피 내가 없어도 혼자서 할 수 있는

나이지 않아? 새삼 이제와서 뭘 말하려는 거지?"

"꼭 말해야 할것이 있어. 제발 3분만이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줘."

죄책감이 스며들어있는 눈동자로 자신에게 호소하는 세스의 모습을 본 파엘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동요하더니, 주먹을 쥐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마음속의 동요와는 다르게 그의 표정은 냉정했다. 세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마음속에서 결정을 내렸는지, 등 뒤의 문을 닫아 밖의 소음을 차단하고 팔짱을

낀 채 머리를 비스듬히 문설주에 기대고 섰다. 그의 눈은 아무런 감정 없이 세

스를 또렷이 보고 있었다.

"말해봐. 단 3분만 시간을 내주겠어. 쓸모 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해."

표정변화 없는 파엘을,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세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

다.

"파엘....을 이용해서 가출했던 것은 미안해... 하지만 나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

정이 있어서..."

"고작, 변명이나 하려고 시간을 내달라고 했단 말인가? 더 이상들을 가치조차

없군. 친한 사람 뒤통수나 치는 너 같은 녀석의 말을 들으려던 내가 잘못이지.

이만 실례하겠어."

파엘은 코웃음을 치고는 싸늘한 눈초리로 세스를 노려보았다. 그는 문설주에서

등을 떼고 몸을 돌려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밖으로 나서는 파엘은 본 세스의

눈빛이 다급해지더니, 머뭇거리며 말하지 못하던 마지막 한 단어를 입에 담고

말았다.

"자, 잠깐 파엘... 형!"

쿠당탕!!

뭔가 넘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아파서 신음하는 세스의 음성이 들렸다.

문을 열고 나가던 파엘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사색이 되어 급히 뒤돌아, 바닥

에 누워 다리를 감싸쥐고 신음성을 내고 있는 세스에게 달려갔다.

"세스 괜찮아?!"

파엘은 좀 전과는 딴판으로 세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안은 채 이를 악

물고 고통스러워하는 세스의 얼굴을 보고는 안절부절못했다. 왼발의 통증 때문

에 인상을 구기고 있던 세스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파엘의 소매를 단단히 잡

아 쥐었다. 파엘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옷을 잡을 세스의 손을 내려다보며 의아

한 눈빛을 지었다. 세스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이마를 짚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걱정스런 낯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파엘을 확인한 세스는 작게 소

리쳤다.

"....체크메이트...!"

세스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두 사람 잘하고 있으려나....?"

찻잔을 들어 찻물을 한 모금 마신 엘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혼잣말로 중

얼거렸다. 옆에서 찻잔을 두손으로 받치고 있던 알테나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에....?"

부부의 대화를 들으며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던 얀은

머리를 도리도리 젖고는 자신의 손에 들린 밀크티에 입을 대었다.

긴장감 없이 느긋해 보이기만 한 얀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엘은 이상하다는 어

조로 물었다.

"걱정되지 않은 거야?"

"네? 뭐가요?"

마시던 찻잔을 급히 떼어내며 얀이 엘에게 반문했다. 조금의 사심이 담겨져 있

지 않은 궁금해하는 눈동자를 바라보자, 엘은 혼란스러워하며 알테나에게 눈짓

을 했다. 알테나는 미간을 좁히며 조심스레 말을 했다.

"그러니까... 세스와 파엘이 돌아오지 않는데... 걱정되지 않느냔 말이지...."

"왜 걱정을 해야하는 거죠? 단지 어렸을 적부터 친하게 지내오던 형과 그 동안

쌓였던 이야기를 나누던 뿐이잖아요. 그 정도는 이해해 줘야죠."

얀은 당연하다는 듯이 끄덕이고는 부부를 바라보았다. 난감한 듯 얀을 바라보던

알테나는 얀의 말에서 세스가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았다. 엘은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고 있었

다. 그런 엘을 보고 꿈틀대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누르던 알테나는 지금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엘의 악취미에 기가막혀하다가 팔꿈치로 남편의 옆구리를 푹 찔

렀다.

풋,

엘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얀은 의아해 하며 그를 바라보았고 엘

은 시치미를 뚝 떼고는 위엄을 잡으며 말했다.

"녀석이 너에게 아직 말하지 않았나 보구나. 하긴 어느 남자가 부인에게 옛 애

인를 발설하겠니, 분란을 일으키려하는 것도 아니고."

"옛 애인이요....?"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얀은 인상을 찌푸리며 엘을 올려다보았다.

세스는 분명 여성 혐오증 환자이다. 자신과 지내면서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

직 근본을 고치지는 못했다. 여성에게는 특별한 이유 없이 말을 거는 것을 거부

할 뿐만 아니라 혼자서는 여성의 곁에서 3시간을 버티지 못했다. 그나마 주노에

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도 손님들이 위치한 테이블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바에

서 일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런 세스에게 애인?

놀라울 따름이다. 거기다 자신이 들은 바에 따르면 그의 부모님들은 세스를 결

혼시키기 위해 많은 선을 보게 했다는데, 애인이 있었다면 고생을 해가며 선을

볼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이이는... 얀이 오해하게 만들면 안되죠. 음... 그렇니까, 얀... 이건 정말 사

심없이 있었던 사실을 말하는 것이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알테나는 뜸을 들이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니까, 옛 애인이라기 보단.... 그래, 그냥 약혼자였을 뿐이지. 세스와 같이

있는 파엘이.... 세스의 전 약혼자란다. 약혼한지 10년만에 파혼을 했지만 그래도

약혼했었던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어머 왜 그러니?"

쿨럭, 쿨럭.

급히 숨을 들이마시는 바람에 사례가 들린 얀은 기침을 하며 알테나에게 의문

이 가득 담긴 눈빛을 던졌다.

여기선 남자들끼리도 혼인이 가능한가?

팔에 돋는 소름을 무시하며 얀은 얼어있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 엘의 얼굴을 응

시했다. 답을 구하는 듯한 얀의 표정에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는

장난기 담긴 어조를 다 지우지 못하고 설명해 나갔다.

"물론 남자들끼리 약혼을 했다니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엄연히 상대방 측에서

프로포즈 청하고 그걸 승낙하여 결정된, 합법적인 약혼이었어."

"네 시아버지의 장난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욱 타당한 이유겠지만 말이야...."

알테나는 엘에게 눈을 곱게 흘기며 덧붙였다.

"그래... 그건 아마 세스가 3살때였지, 파엘은 7살이었고...."

옛 기억을 더듬으며 엘은 뜨문뜨문 말을 했다.

"파엘은 조금 조숙한 아이였지. 모든 면에서 생각이 깊었으니까 말이야. 심지어

정치에도 관심을 갖고 있어서, 그의 아버지와 함께 나의 초대에 응해서 토론을

나누는 일도 자주 있었고, 어른도 놀랄만한 재치로 나를 놀래키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어. 난 그때부터 파엘을 내편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점찍고 있었지.

그러다가 일이 터졌어. 그때는 아직 나의 바램을 단념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스

를 여장을 시키고 있었거든. 서재에서 토론을 끝내고 혼자 저택을 구경하던 파

엘은 화원에서 세스를 발견했고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자리에서 세스에게 정식

으로 프로포즈를 했지. 하지만 그것보다 가관인 것은 세스가 그것에 응했다는

거야. 4살 짜리 아이가 뭘 알겠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우습게 볼 것이 못

돼 신동으로 소문이 나있던 아이였거든. 파엘이 하는 의미를 알고 있었을 텐데,

무슨 이유로 프로포즈를 받아들였는지, 지금도 의문이야...."

"집에 오자마자 치료를 했어야지 지금까지 내버려뒀어? 너도 그렇지만, 아저씨

도 대단하다."

파엘은 불평 섞인 어조로 세스의 왼쪽다리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내일 아침 일찍 직속 신관을 보낼 테니까, 아무 말 말고 치료받아 알겠어?"

파엘이 눈을 부라리며 세스를 바라보자 세스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로 향하는 도중에 간단한 힐링 치료는 받았지만, 신관을 불러드리는 것은

번거로워서 집으로 도착해서 치료를 받으려했었어. 뼈는 이미 아물었고, 약간

시큰거리는 통증만 느낄 뿐이야. 형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 생각 없었던 건 아

니라구. "

"이렇게 되고서도 변명이냐?"

파엘은 조심스럽게 세스를 안아 들고 방안에 위치하고 있는 안락의자에 앉혔다.

세스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옆에 서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흐트러진 세스의

앞머리카락을 넘겨주던 파엘은 세스가 무언가 할말 있는 사람처럼 자신을 바라

보자 의아해 하며 내려다보았다. 세스는 약간 멋쩍은 듯이 물어보았다.

"그 일로 아직 화 안 풀렸어?"

"그래. 분해서 죽겠다. 속일 사람이 없어서 나를 속여? 나한테는 사실을 말해줬

어도 되잖아. 우리 사이가 어떤 관계인데,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할 것 아니야."

"아아, 형. 제발. 용서해주라. 숨이 턱턱막히더라구, 귀족가문을 섭렵한걸로 모자

라, 이젠 왕실에 관련된 여성들까지... 아마, 그렇게 되었으면 숨이 막혀 죽었을

거야. 도망칠 생각밖에 들지 않더라구. ...그래도 형을 이용해서 도망친 건 미안

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루라도 생각안해본 날이 없으니까. 그만 기분 풀어. 나

때문에 많이 혼났지?"

파엘은 괘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세스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아는 녀석이 교묘하게 호위기사까지 빼돌리고 도망가? 아저씨는 별말 없으셨

지만, 아버지에겐... 아니 됐어. 네 사정을 잘 알면서 도와주지 못했으니까.. 그

정도면 약과인거지. 하지만 2년동안 소식한번 전하지 않은 것은 너무 했어."

"내가 전하지 않아도, 다 흘러 들어왔을 텐데....뭐."

세스는 몸을 편하게 누우며 말을 했다. 파엘은 의자를 끌어다 당겨 그의 곁에

앉으며 세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퉁겼다.

"그게 도망친 녀석이 할말이냐? 너 때문에 얼마나 가시방석이었는데, 가뜩이나

노리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럴 때 가출하는 게 말이 돼? 다른 사람 생각지도 않

는 네 뻔뻔한 낯짝을 보니까 다시 화가 난다."

"아야야."

파엘은 세스의 코를 꽉 잡고 흔들었다. 그가 손을 놓자 세스는 빨갛게 변한 코

를 쓰다듬으며 무안한 듯이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나보고 어떡하라구. 죄인이라는 것은 아니까, 어떻게 해야지 화를 풀을

건지나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속죄할테니까. 뭐 한달 동안 심부름도

괜찮고. 웬만한 것은 할 수 있어."

"오호, 그래?"

파엘의 눈빛에 장난스런 기운이 서렸다. 그는 손을 뻗어 세스의 볼을 쓰다듬으

며 욕망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귀여운 공주님이, 불쌍한 기사에게 감미로운 키스를 내려준다면 생각해보

지."

"악, 형!"

쪽,

파엘은 번개같이 안락의자에 기대어있는 세스에게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살

짝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키스를 했다.

"퉷, 퉤. 윽, 진짜, 더러워서. 왜 그렇게 남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거야? 내가 여

자들에게 미움받는 중에는 형이 원인이 된다는 생각이 안들어?"

세스는 거칠게 소매자락으로 입을 닦으며 억울하다는 듯이 안락의자 팔걸이에

턱을 괴고있는 파엘을 노려보았다.

"후후후, 하긴 내가 인기가 좀 많지. 그렇지만 널 괴롭히는 것이 내 삶의 낙인

걸 어떡하냐, 2년동안 쌓일만큼 쌓였으니까 각오해두라고."

"쳇, 첫키스를 빼앗긴 걸로 이미 형의 못된 성격을 알고 있었으니까. 에휴, 내가

참아야지.... 그러니까 형이 결혼을 못하지, 형수님이 생기면 내가 형의 약점들

다 가르쳐줄꺼야."

파엘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세스의 머리를 가

볍게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까... 제...수씨가 기다리고 있겠는걸, 그만 가봐야지."

"제수씨? 누구?"

세스는 의아해 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파엘의 뒤로 다리를 절며 걸어갔다.

파엘은 바닥에 떨어져있던 지팡이를 건네어 주며 말했다.

"내가 제수씨라고 칭할사람이 누가 있냐? ...그러고 보니... 조카까지 만들어 왔

다며? 너에겐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제수씨도 대단하다 너 같은 야생

마를 길들이다니 말이야. 네 성격으로 봐서 뜬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풋,

세스는 쿡쿡 웃다가 의아하게 바라보는 파엘을 보고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다

른 의미가 담긴 말을 중얼거렸다.

"하긴 얀이 좀 대단하긴 하지."

여전히 의아해하는 파엘을 남겨둔 채 세스는 열려진 문사이로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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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체크메이트라고 세스가 말하죠. 그뜻은요.

체스에서 왕을 잡았을때 , 장기에서 장군, 멍군처럼 쓰이는 말로,

상대방의 킹을 잡을 수 있는 상태를 체스에선 체크라고 하는데요.

그 상태에서 방어수단이 불가능하다면...체크메이트로 패하는거예요.

그러니까, 파엘을 잡은 것은 킹을 잡았다는 뜻과 동등하다고 봐서

'체크메이트'라고 말한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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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제너시스  Date : 30-09-2001 21:39  Line : 396  Read : 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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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와 파엘은 거실로 돌아왔고 그들에게 호기심어린 얀과 부모님의 집중적인

시선이 쏟아 졌다. 세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의 살인적

인 눈빛을견디지 못했음이리라... 그는 저녁인사를 하고 얀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전 약혼자라는 것이 사실인가? 혹시 그 형을 정말로 좋

아하는 건가? 여자에게 흥미가 없을 만큼...

심각한 얼굴로 카펫 위를 걸어가는 얀을 바라보던 세스는 어깨를 으쓱이고 그

의 곁에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얀은 흘끔 눈동자를 돌려 세스를 바라보았다.

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을 찌푸렸다. 세스의 입술이 약간 발갛게 부어있었

다.

얀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던 세스는 걸음을 멈추고 한손으로 이마를 감싸쥐었

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얀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한테 할말 있어?"

"어, 어? 그게... 그러니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우물쭈물하던 하던 얀은 고개를 세차게 젖고는 성큼성

큼 앞장서서 걸어갔다.

"미안...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게 해서 미안."

복도에 울려 퍼지는 당황한 듯한 얀의 목소리에 세스는 멈칫 자리에 멈춰 섰다.

멍하니 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얀이 꽤 멀어지자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

잡았다.

얀이 침실로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아기를 안고 있는 키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키리아는 아기를 토닥이다가 들어서는 얀을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

다. 하지만 얀은 손짓으로 그냥 자리에 앉아 있게 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얀의 등뒤에서 방문이 열리며 세스가 나타났

다. 세스는 자리에 서서 움직일 생각을 안하는 얀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며 곁에

가서 섰다. 그리고 턱을 괴고 얀을 이 지경으로 만든 원인을 바라보았다.

"음... 저것 때문인가?"

"귀엽지? 저런 아들이 있으면 좋겠어."

귀여운 빨간 머리의 꼬마가 초록색머리카락의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은 얀의

말을 빌리자면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거기다 지금 그 빨간 머리의

꼬마는 신뢰가 가득한 눈빛으로 얀에게 달려들고 싶어 안달이 나있었다.

"흠... 그럴만 하군. 하지만 지금 그 아들에게 그런 말을 했다간, 아마 수도 전체

가 날아갈걸. 겉은 저래 보여도 속은 1200살이나 먹은 드래곤이라구. 그들에겐

우린 하등한 종족일 뿐이야. 그의 본래 힘에 비해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은 힘

이겠지만, 4서클의 마법사는 인간들에게는 흔치 않아. 8서클이 인간이 최대로

도달할 수 있는 마법의 경지로 5서클만 되어도 누구나 인정을 하지. 마법에 소

질을 보이는 사람이 그리 흔한 것이 아니라구."

"와, 그렇게 대단한 거야."

얀은 놀라는 표정으로 세스를 돌아보았다. 세스는 얀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귀

여운 동생을 보는 듯한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부인. 지금은 우리의 아들이 된 다렌이나 예뻐해주라고."

"다렌?"

"다레니우스 이오 카필로아. 녀석의 이름이야. 늦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이래봬

도 고민해서 지은거라구. 어때 괜찮은 거 같아?"

"오, 그럴싸한데... 하지만 부인이라니 좀... 닭살 돋는다."

"하하, 그렇지?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얀은 천천히 키리아에게 다가가 다렌을 받아 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선망

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키리아에게 눈을 맞췄다.

"저녁은...?"

키리아는 웃으며 말을 받았다.

"성년이 된 드래곤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100년동안 거뜬하다고. 하지만 지

금은 인간과 별다를 바 없으니, 뭔가 먹어야겠지.... "

약간 서글픈 표정으로 키리아는 탁자에 올려져 있는 과자를 들어 올려 얀에게

보였다.

"간단한 다과를 들어서 지금은 생각은 없어. 그리고 세스의 부모님께는 저녁식

사전에 예의바르게 인사를 드렸으니까, 나 때문에 책잡힐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거야"

"착하네, 키리아. "

얀은 미소를 지으며 키리아를 내려다보았다. 키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

렸다.

"그런 말은 대놓고 하는게 아니라구. 그나저나 잘 어울리는데, 그 차림새...."

키리아는 손을 뻗어 얀의 옷자락에 손대었다. 그리고 옷자락에 입을 맞추며 작

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역시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어...."

"그나저나... "

하기 싫은 듯 밀려있는 서류철을 뒤적거리던 엘은 그것은 자신의 앞으로 끌어

당기며 정적에 잠겨있던 방에 낮고 조용한 음성을 남겼다.

"예상이 빗나간 것 같군."

"....그렇군요..."

고개를 숙인 채 등을 문을 향하고 조심스럽게 걸어나가는 고용인들을 보며 파

엘은 약간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문에서 걸어나가고 있는 사람들은 엘이 미리

공작해둔대로 얀에게 들여보낸 사람들이었다. 워낙에 세스가 영악한 녀석이라

자신의 아들을 믿지 못하는 엘은 세스의 말이 진실인지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

그들의 행동을 감시하여, 사실유무를 확인할 사람들을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

다. 마침맞게 생각대로 세스가 집사에게 부탁을 하자 그들을 들여보냈고, 그들

은 사전에 부탁 받은 대로, 그들이 보고들은 바를 말하고, 엘의 서재를 빠져나

가는 길이었다. 그들은 얀을 단장시켜주었던 사람들로 서재를 나서면 서도 긴장

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고용인들을 바라보던 시선에서 자신이 들고 있는 서류 쪽으로 시선을 옮긴 파

엘은 찌르는 듯한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파엘을 딱하다는 눈으로 지긋이 쳐다

보던 엘은 깍지낀 손에 턱을 괴고 파엘에게 물음을 던졌다.

"괜찮은가 보군."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니까요."

파엘은 서류철을 닫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엘은 피식 웃으며 몸을 바로 했다.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감시자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는데도 용하군..."

"........."

"잘 어울리는 한쌍입니다라.... 혹시나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였군. 녀석에게 늦

게 봄이 찾아왔구만. 기적이 일어났어... 내 아들에게 하기엔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구제불능인 녀석을 구제해주다니... 신의 도움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구.... 그런데 자네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건 세스에게서 흥미가 떨어졌다

고 생각해도 괜찮은 건가?"

엘은 느물느물하게 파엘의 아픈곳을 찔렀다. 그 말을 들고 잠시 가만히 있던 파

엘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반격했다.

"글쎄요. 지금 저에겐 세스의 일보다는 오늘 안에 공작님이 이 서류들을 끝낼

수 있는가가 더 관심이 갑니다만...."

파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엘에게 압력을 가했고 엘은 투덜거리며 서류를 훑어보

기 시작했다. 파엘은 미소를 지으며 수북히 쌓여있는 엘이 노려보고 있는 서류

더미에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를 내려놓았다.

"쳇."

엘은 불만인 듯이 파엘을 바라보았고, 파엘은 미소를 머금고 지긋이 마주바라보았

다. 포커페이스인 파엘의 예리한 눈빛은 여느때나 마찬가지로 강하였다. 엘은 몇분

간 잘 견디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눈싸움에서 진 엘은 투덜거리며 착실하게

서류에 날인을 하기 시작하였고, 그 광경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파엘은 조용히 그곳

을 빠져 나와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를 걸어가던 그는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했다.

"연적이라..."

그는 피식 웃어버리고는 고개를 가로 젓고는 그의 마음을 반영한 듯 보이는 어

둠에 침범당해있는 복도를 걸어나갔다.

**

점심때가 되어가자, 자신들이 묻고 있는 여관으로 지친 발걸음을 옮기던 클로아

(루쉐)는 자신의 옆에서 걷던 제롬이 갑자기 멈춰 서자 뒤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먼저 가서 휴식을 취하고 계십시오. 마저 들릴 곳이 있습니다."

"열녀났군. 무슨 힘이 있다고 또 나간다는 거야. 꼭두새벽부터 수도를 헤매고

다녔잖아. 난 질질 끌려 다니는 것은 사절이라구. 사막에서 바늘 찾기지, 특징만

알고 어떻게 알아낸다고 그러는 거야. 어디 이 넓은 수도에서 혼자 힘으로 찾아

보시지, 난 상관하지 않을 테니. 초상화만 본 파혼자를 찾으러 다니면서 병까지

날 생각은 죽어도 없으니까."

얀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제롬에게 질투심을 느끼는지 클로아는 입을 삐죽이며

가시돋힌 소리를 했다. 사실, 얀이 수도에 있다는 느낌이 어렴풋하게 들었지만

그 어디인지 확실한 감이 잡히지 않았기에 제롬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답답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미소를 짓던 제롬은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친구에게 부탁을 하러 가는 거니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때까지

쥬아렌... 클로아님을 부탁해."

쥬아렌은 고개를 끄덕이고 클로아의 뒷절미를 잡고 끌고 갔다. 클로아는 저항하

긴 했지만 단련되어 있는 그를 당해내질못하고 그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딸려갔

다. 오직 제롬만이 황당한 표정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었

다.

왕성으로 향했던 제롬은 성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이 보이자 그들에게 다가

가 수고비조로 돈을 주며 친구를 불러줄 것을 부탁했다. 자신의 품안에 있는

증명서를 꺼내보이면 간단하겠지만 한나라의 국빈으로 모실 만큼 힘을 지니고

있는 증명서였기 때문에 일을 크게 만들기 싫은 생각에, 자신이 필요로 하는

그만을 불러내려 한 것이다.

돈을 받아든 경비병은 곧 제롬의 친구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고 잠시 후 성문이

열리며 훈련을 하다 왔는지 땀에 절어있는 장신의 청년이 걸어나왔다. 어리둥절

해 하며 성문 밖으로 걸어나온 갈색 곱슬 머리카락의 청년은 제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제롬에게 달려와 그를 끌어안았다.

"아니, 이게 누구야. 천하의 샌님, 제르미스 잖아."

"잘 지냈어, 켈른. 바쁠 텐데 불러서 미안해..."

"바쁘긴 6년만에 친구의 얼굴을 보았는데 당연히 시간을 내야지. 이럴 것이 아

니라 궁성으로 들어가자고 아마 네가 왔다는 걸 알면 다른 녀석들도 기뻐서 미

쳐 날뛸걸."

미쳐 날뛰어?

켈른에게 지적 당한 다른 녀석들을 떠올린 제롬의 얼굴이 굳어졌다. 입가를 움

찔거리며 미소를 지은 그는 거절하려 했지만 어느새 팔을 붙들린 채 켈른에게 이

끌려 왕성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어라, 켈른과 같이 오는 사람은 누구야?"

검을 휘두르고 있던 푸른 머리카락의 청년은 손을 멈추고 그들이 오는 것을 바

라보았다. 그 곁에서 털푸덕 주저앉아 검을 닦고 있는 눈망울이 서글서글한 청

년은 별 관심없어 하다가, 고개를 들어 그 주인공을 확인하였다. 그를 확인한

순간 청년의 입이 벌어지며 벌떡 일어섰다.

"맙소사, 저거 제롬 아니야?"

"뭐? 제르미스? 에이, 설마. 그 녀석 최고 기사가 되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을

텐데, 다른 나라로 여행 올 주제가 되겠어."

"닐, 자세히 보라구."

닐의 어깨를 두드린 청년은 다가오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 끝까지 부정

하던 그는 제롬이 가까이 와서야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달려갔다.

"이게 누구야, 뭔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행차를 했데?"

"닐, 껄렁껄렁하는 건 여전하구나. 오랜만이야."

그들은 서로의 어깨와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기뻐했다. 연무장이 소란스러워지자

곳곳에서 대련을 하던 다른 기사들도 제롬의 출현을 알고는 다가와 그의 방문

을 기뻐했다.

"네가 유학왔을 때만해도 널 술집으로 데려가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공부할

때도 안 쓴 머리를 그때 몽땅 쓴 것 같다니까."

푸른 머리카락의 청년, 닐의 말에 웃음을 터트린 제롬은 주위를 둘러보다 옆에

있는 눈매가 서글서글한 청년에게 물어보았다.

"브라이언, 대장님은?"

"아, 잠깐 상부의 지시 때문에 안에 들어가계셔."

"안이라면..."

"직책이 높아지셨기 때문이지. 사무직 쪽이라서, 만날때마다 몸이 근질거린다고

불평이 대단하다구. 그래서 덤으로 대장을 보필하는 라젤로와 매튜가 고생이

지."

킥,

웃음을 터트린 켈른은 제롬의 어깨를 두드리며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어보았

다.

"네가 이렇게 행차할 정도라면 급한 일이겠지? 너란 놈이 능력에 부치지 않고

서야 우리들을 찾을 리가 없으니까."

그의 말에 안색이 굳은 제롬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희들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제롬은 자신이 찾고 있는 얀에 대한 특징과 그를 찾아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던 그들은 간간이 고개를 끄덕였고 도와줄 것을

약속했다.

유학당시 제롬과 친하게 진했던 켈른, 닐, 브라이언은 제롬이 돌아간다고 하자,

이야기를 더 나누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그를 성문까지 데려다 주러

연무장에서 나오면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나마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성문

을 나서는 대로로 가는 도중 이상한 현상을 목격했다.

왕성 곳곳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긴것처럼 그들이 가는 방향으

로 걸어가고 있었다.

"대단한 인파군. 무슨 일이라도 생긴건가?"

제롬은 의아해 하며 그들과 함께 걸어갔다.

"어라, 저 사람은 스펜서 가문의 듀젤 백작이잖아. 두문불출하는 사람인데, 용케

도 이런 곳에 얼굴을 내밀었군."

브라이언이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했다. 브라이언의 말을 흘려듣고 있던 켈

른은 무언가를 보는 순간, 의혹의 눈빛을 띄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곳을 응

시했다.

"맙소사, 미레이유 공주님?! 저 분마저 웬일이지? 곳곳에서 몰려든 시종이나 시

녀들은 둘째 치고라도 저런 분들이 마중나올정도면 도대체 누가 오고있는 거

야?"

하지만, 그들의 사소한 의문은 몇 분 지나지 않아 풀리고 말았다. 성문이 열리

며 어둠을 뒤집어쓴것만 같은 칠흑의 마차가 들어섰다. 고급스런 문양이 그려진

문이 열렸고 바닥에 놓여진 단을 밟으며 그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인물이 내려섰다. 먼저 내려선 것은 단정한 예복차림의 부드러워 보이지만 은연

중에 카리스마를 내뿜는 30대 후반의 남성이었고 그 뒤로 18,19살 정도로 보이

는 소년이 내려섰다. 소년이 내려서자 주위에서 놀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

에서 예측해 볼 때 그들이 기다리던 사람은 바로 그 소년인 것 같았다.

"숨겨진 왕자라도 되나? 하지만 그런 스캔들은 들어 본 적이 없고. 이 정도로

사람들이 궁금해할 정도면 꽤 중요한 사람인 것 같지만 분명 내가 알기론 왕위

계승권을 지닌 왕족 중엔 저런 사람은 없었어."

소년을 보며 고민하는 제롬의 곁에서 닐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마를

누르며 내린 인물들을 바라보았다.

"이런... 미처 그가 오늘 온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군."

"누군데 그래...?"

호기심어린 제롬의 시선을 받자 닐은 머리를 긁적이며 제롬을 바라보았다.

"엘 코운테르 카필로아 공작과 그의 아들, 세스 듀란테드 카필로아지. 지금 네

가 보고 있는 소년이 2년 전 가출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인물이야. 이제는

도착한 것 하나만으로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군. 하여간 그의 아버지를 피

를 이어받아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 하난 증명한 셈이야."

"저 사람이 크로나의 권력을 쥐고있다는 카필로아 공작?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다른 걸...."

제롬은 앞에 서있는 사람들의 사이에선 잘 보이지않자, 카필로아 공작을 더욱

잘 보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다 사람들에게 인사를 나누다가

고개를 든, 공작의 아들이라는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그냥 고개를 돌렸지만 제롬은 그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왠지 중

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느낌.

탁,

"왜 그러냐?"

닐이 이상하다는 듯 제롬의 어깨를 두드렸고 그의 손길에 멍한 상태에서 깨어

난 제롬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그들의 귀에

여성들의 감탄사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그들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들의 시선을 끄는 무언가가 잡혔다. 곱슬거

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살짝 가리고 있는 귀여운 어린아이였는데 아기처

럼 희고 부드러워 보이는 살결이 무척이나 보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있

었다. 그러나 그런 이미지와는 반대로 그는 공작의 아들의 곁에 서서 침착한 얼

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년과 이야기

를 나누었다.

"공작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대단해 보이는 군."

브라이언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했다. 제롬은 그의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

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옆의 아가씨들에게 관심을 쏟고 있

던 닐은 제롬을 기쁘게 해줄 희소식을 생각해냈다.

"그러고 보니 3-4일 뒤에 공작의 저택에서 중대발표를 위한 파티가 열린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 그런 장소라면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얻기 더욱 쉽지 않을

까? 어때 제롬 생각있어?"

닐은 한쪽 눈을 찡긋했고, 제롬은 흔치않은 기회를 잡은 것을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 다음으로 권력을 지니고 있는 공작의 파티에는 공작에게 잘 보이기 위한 사

람들로 더욱 북적거릴 것이다. 주노에서 들었던 말로는 얀님과 그의 일행이 귀

족가를 우선적으로 돌아다닌다고 했으니, 하나 하나를 확인하는 수고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왕성으로 들어서는 카필로아 공작 일행의 뒷모습을 보며 제롬은 온

몸이 달아오르는 듯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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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y in dreams(차원연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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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제너시스  Date : 08-10-2001 01:31  Line : 290  Read : 4995

[100] <차원연결자-95.gamb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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