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앗, 실수...?
"받아들이겠어요."
방에서 걸어나온 얀은 선언하듯 말을 했고, 알테나는 어깨를 문지르며 나오는
세스의 행동을 보고 숨은 사정을 짐작하며 웃음 지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파
엘을 바라보았다.
"파엘군, 부탁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파엘은 부담 없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쾌히 승낙했다.
"그럼 샤프롱은 파엘이 맡는 걸로 결정된거야."
알테나는 정리를 마쳤고 세스는 투덜거리면서도 하는 수 없이 수락하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파티에서 첫 상대는 나라구."
첫 상....대...?
말의 의미를 이해 못한 얀은 세스를 바라보았고, 그 뜻을 짐작한 알테나는 대신
설명을 해주었다.
"지금 얀에게 프롬 신청을 하고 있는 거야. 무도회에선 혼기에 찬 아가씨에게
여러 남성들의 춤신청이 들어오지. 특히 아름답고 인기 있는 아가씨일수록 신청
이 쇄도하기 때문에 그걸 막기 위해서 미리 아가씨에게 양해를 구하는 경우가
있거든. 뭐, 얀의 경우에는 세스라는 카발리어 대용품이 있으니까 별 상관이 없
겠지만..."
그녀는 슬쩍 세스의 표정을 살피며 말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덧붙였다.
"첫 공식데뷔에서 파트너의 자리를 파엘에게 빼앗기니까 불안했나 봐?"
알테나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파엘을 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무도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시간에 유의하면서 교육해주
길바래. 남편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그쪽일엔 걱정하지 말고, 알겠지 파엘?"
"예. 알테나님이야말로 이쪽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잘해나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티가 날 정도는 아니지만, 불안한 눈빛으로 얀을 바라보고 있는 세스를 재미있
다는 듯이 바라보며 파엘은 대답했다.
"춤은 어느 정도로 춰보았는지?"
역시 파엘은 준비된 선생체질이었다. 단순히 춤을 입력시키는 것이 아닌 학생의
소질을 파악하고 얀에게 맞은 좋은 학습방법을 숙지하기 위하여, 기본 데이터를
요구하고 있었다.
춤? 글쎄.... 무용시간에 배운 차차차, 자이브, 왈츠, 고전무용, 포크댄스, 국민체
조.... 이것저것 배웠지만 제대로 배운 적은 없는 걸...
얀은 자신 없어 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다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시선을
파엘에게로 돌렸다.
"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두달정도 춤을 익힌 적이 있으니까 가르쳐만
준다면 어느 정도 따라 할 수는 있을 거예요."
고등학교 2학년 체육제 때, 반 대항무용으로 다른 나라의 민속무용을 춘 기억을
더듬어보며 얀은 대답했다.
제영(얀)의 반은 스페인의 무용를 추었는데, 그것은 누구나 상상해볼 수 있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플라멩코의 정열적인 춤을 의미했다. 얀(제영)의 학교는 1학
년은 매스게임, 2학년은 각 나라의 민속무용으로 2학년의 경우에는 각반의 실장
들이 제비뽑기를 하여, 연출하는 무용이 결정되었다. (3학년은 고3의 특권으로
그냥 보고 즐김.)
일본, 중국, 프랑스(캉캉), 아프리카, 한국(제주도, 부채춤, 각설이), 스페인(플라
멩코), 인도, 아라비아, 탱고 등등 매년마다 선택되는 나라는 변형되어지는데, 맡
게되는 무용이 선택되어지면 본래 알고있던 지식에 안무자의 연출과 상상력 등
이 보태어져 약 2달간 맹훈련을 한다.
여학교였던 만큼 더 대담하고 세심한 부분까지 연출할 수 있어서 축제나 마찬
가지로 여겨졌으며, 근처에 살고있는 마을주민이나 학생들이 일부러 구경하러
올만큼 유명한 체육제였다. 댄스는 약 20-25분간 행해지며 이때 얻은 관객점수
와 선생님들의 채점한 점수로 무용의 실기시험이 대체되기 때문에 학생들을 자
신들을 어필하기 위해 더욱 노력을 한다. 이를 위해 기발한 장면들이 연출되곤
하는데, 특히 여러 군무 도중에 선생님을 출연시키기도 하는 등 춤만 보여주다
끝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히로인들을 출연시켰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제영의 반에서는 선택되어진 총 4명의 히로인 중에는 제
영이 끼어있었다.
'두달이라... 그렇다면 기본 스텝정도겠군...'
궁중무도회를 본(本)으로하여 열려지는 귀족가의 파티는 격식이 있기 때문에 평
민들의 축제에서 추는 댄스와는 양상을 달리했다. 평민이 즐겁고 축제의 흥을
돋우기 위한 춤을 춘다면 귀족가의 파티에선 남에게 보여지기 위한, 우월감과
자부심으로 포장되어진 춤을 추는 것이다. 그래서 기본스텝만 배우는데도 3-4개
월이 걸리기 때문에 파엘은 얀의 수준을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내심, 3일만으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 파엘이었지만 그런 내
색은 하지 않은 채 침착하게 얀에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래요? 그럼 어느정도실력인지 알아야 대략적인 진행을 결정할 수 있으니까
조금만 보여주겠습니까?"
"...잘 추지는 못하니까, 웃으면 안돼요."
머뭇거리던 제영은 못박듯 얘기를 하고, 약간 쑥스러운 듯 설핏 웃더니 공주 풍
으로 치마 한쪽을 살짝 말아 쥐고 무릎을 가볍게 굽혀 인사를 대신했다.
파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오래간만에 남앞에서 춤을 선보인다는 생각에 흉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세
스에게서 파엘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힐 만큼 이야기를 많이 들은지라 파엘이 자
신의 오빠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져 남한테 보인다는 수치심은 훌훌 털어 버리
고 있었다. 세뇌가 될 정도로 떠들어댄 세스의 공덕이었다.
얀은 약간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진정
이 되자 그는 숨을 깊이 들이 쉬었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귀에 들리지 않는
가슴의 두근거림을 진정시키던 그의 눈빛이 변했다.
밑을 향하고 있던 얀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올렸다. 얀의 표정은 진지했고 앞에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듯 강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의 왼손이 허공에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치맛단을 움켜쥐었다. 활동하기 편하도록 약간 들어올린 것이었
다. 치마 아래, 하얀 실크 레이스로 된 페티코트가 언뜻 보였지만 파엘이 앞에
있음에도 별로 상관치 않았다.
부채꼴 모양으로 한쪽으로 펼쳐진 치마를 잡고 있던 손목을 '홱' 틀자 박자를
맞추기라도 하듯 '차르륵'하는 맑은 음향이 방안을 가득 매웠다. 갑작스럽게 들
리는 소리에 약간 놀란 듯 파엘은 정신을 집중하고 얀을 바라보았고, 곧 소매에
가려져 살짝 내비치는 오색의 장신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을 미간을 좁히고 뚫어져라 바라보던 파엘은 앞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바
로 하였다. 그의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곡선을 그렸다.
역시나... 꽤 특별한 경우의 여성을 선택했군...
자신의 눈앞에 선보이는 춤을 보며 파엘은 세스의 취향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얀은 지금 우아한 댄스와는 정반대의 춤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신체
의 일부를, 박자를 맞추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그간 여성에게 관심이 없었던 세스인 만큼 그가 선택한 여성은 결코 세간에선
쉽게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귀부인의 실례를 보여주는 듯한 정
숙함,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 소년과 같은 발랄함, 소녀 특유의 순수, 평민의 자
유분방함... 한마디로 귀엽게 여겨지는 말괄량이 아가씨의 표상이었다.
특히나 남들을 자신의 페이스로 끌고 가는 것은 파엘도 존경할 정도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파엘의 감정을 황당함에서 관심으로 바꿔버렸으니까... 정말
그녀의 모든 것은 흥.미.로웠다. 파엘의 여태껏 가지고 있던 가치관을 송두리째
뿌리뽑는 행동을 거침없이 행했다.
...그러니까.. 세스의 마음에 든 것이겠지...
파엘은 '졌다'는 미소를 지으며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등을 묻었다.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시작한 유쾌한 감정이 얀이 만들어내는 박자에 발맞춰 스물스물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음미했다.
얀의 발구름은 규칙적인 소음을 내며 방안을 메우고 있었다. 악기가 아닌 신체
를 이용하는 행동은 떠돌이 가무인들이나 사용하는 천박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 순간만큼은 파엘에게 그런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조금씩 빨라지는 발
구름의 박자는 정적으로 감싸여져 있는 방안에 울려 퍼지며 입체 서라운드로
의자에 앉아 조용히 얀을 바라보고 있는 파엘의 몸을 조금씩 두드렸다.
얀은 손목에 감겨있는 팔찌를 악기로 적절히 사용하며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그녀의 발구름이 묘한 감응으로 파엘에게 다가왔다.
강하게 발을 내딛고 턴.
우아하게 허공에 물결치는 손의 그림자.
활기에 젖어 있는 율동.
어지럽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의 격정적인 움직임.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문양이 방안 가득 수놓아지고 있었다.
점차 클라이막스로 치닫자 얀의 움직임은 파엘을 중심으로 그를 유혹하기라도
하듯 닿을 듯 말 듯 가벼운 터치를 하며 지나쳤고, 얀은 자신의 춤에 깊이 도취
된 듯 파엘을 잊은 듯 행동했다.
여기서 상대편의 어깨를 짚고 그를 중심으로 한바퀴 돌고, 앞부분에 도착하면
발구름 한번. 치마가 예쁘게 펼쳐지도록 유의하면서 돌고! 무용의 대단원인 마
지막동작!! 이때 중요한 건, 손 마무리. 상대편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야지... 맞
아. 이 대목에서 항상 안무자에게 혼났었지. 조심 또 조심해야지. 상대방을 사랑
하는 유혹하는 느낌이 들게...
얀은 손을 뻗어 마무리 동작을 하였고 곧 만족한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OK 좋았어!
"...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얀은 귓가에 들려오는 파엘의 굳어있는 목소리에
곧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았고 무안한 낯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흑빛의
눈동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 박수를 치려다 졸지에 당한 듯, 얀의 몸을 안
는 듯한 손 모양 그대로 굳어져 있는 파엘을 말이다.
'맙소사.'
소리없는 비명이 얀의 등줄기를 가르고 지나갔다.
파엘과 얀이 있는 방안에 들어서려던 세스는 갑자기 들려오는 터질 듯한 웃음
소리에 의아해 하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문 앞에 멈춰 있던 그는 웃음소리가 잦
아들자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방의 정 중앙에 얼굴이 붉게 변한 얀과 배를 움켜쥐고 숨을 쉬지 못해 끅끅거
리는 파엘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세스는 어찌된 영문인지 짐작이 대충 갔다. 얀이 실수를 한 모
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감정의 변화를 나타내지 않는 파엘을 저 정도
로 웃게 만들다니...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세스를 보았는지 파엘은 허리를 곧추세우며 눈가에 묻
어있는 물기를 훔쳐냈다.
"아, 왔어? 푸훗."
세스의 얼굴을 바라보자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오는 듯 입을 막고 큭큭 거리던
파엘은 세스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렸다.
"졌다. 아무래도 교육은 너에게 부탁해야 겠는걸. 에스코트만 내가 맡을게. 얀과
함께 있다간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리...?"
"모르면 됐어. 후훗, 부디 너의 심장엔 은총이 있길..."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세스를 남겨둔 채 파엘은 흥겨워하며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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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학교 축제는 예전 제가 다니던 학교가 모티브 입니다.
혹, 축제내용이 같다고 생각하신다면...같은 학교를 나왔을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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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y in dreams(차원연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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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제너시스 Date : 16-01-2002 01:11 Line : 201 Read : 2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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