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I miss you (6)
뭐야 방금전 일은....
얀은 어벙하게 세스를 바라보았다. 하얗게 백지화되어 버린 머리를 어떻게든 끼
워 맞추자 조금 전의 일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너, 너, 너..."
말을 잊지 못하고 버벅거리자 세스는 피식 웃더니 손을 내밀어 얀의 얼굴을 감쌌
다. 방금 전과 다름없는 그의 행동에 얀이 움찔 굳어졌고, 세스는 다른 한 손으
로 얀의 이마를 퉁기며 속삭이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왜? 진짜로 해주길 원했던 거야?"
진짜?
그럼... 그 부드럽게 따뜻한 게.. 그것이(?) 아니란 말이야?
얀이 의아한 듯 바라보자 세스는 눈짓으로 얀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손가락을
가리켰다. 이내, 얀은 세스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스가 얀의 얼굴을
감싼 손모양 그대로 네 번째 손가락을 곧추세우더니 얀의 입술에 대었기 때문
이었다.
"그럼 아까..."
"키스하는 시늉만 했을 뿐이야, 네 입술에 닿은 것은 바로 이 손가락이고... 밤
이라 어두운 데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으니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
져 있던 그들에게는 키스하는 것처럼 보였겠지..."
세스의 눈에는 악동처럼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런 세스의 모습을 보자 열이 팍
올랐다. 얀은 화악 붉어진 얼굴을 무시하며 오른손을 들어올려 세스의 배에 인
정사정 볼 것 없이 휘둘렀다.
퍽,
마른 밤하늘에 오묘히 살떨리는 음량이 울려 퍼졌다. 갑작스런 기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스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얄미운 미소만을 흩날리며 왼손으로
얀의 주먹을 가볍게 받아내었다. 빙글빙글 얀을 놀리는 듯한 웃음을 짓던 그는
얀에게 몸을 기울여 소리 낮춰 이야기했다.
"저 제르미스라는 사람은 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테지? 사정설명을 하고는
싶지만, 지금 파엘 형이 같이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선 곤란하단 말이야. 그와
이야기를 나눠야할사람은 나야, 잘못해서 파엘 형과 이야기를 나누기라도 하면...
휴-, 우리들의 비밀이 탄로날 수도 있다고 그의 시선을 파엘 형에게서 나에게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이런 일을 해야했어. 그에게 이야기 나눌 사
람은 파엘 형이 아니라 나라는 것을 인식시켜주기 위해서 말이야. 네가 이해를
해줘야지. 우선 이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고 나서 자리를 마련해 보자구."
이렇게되면 미워할 수도 없잖아.
얀은 세스를 째려보다가 몸을 휙 돌려 제롬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 제롬은 얼어있었다. 하지만 얀이 걱정스러운 듯 제롬의 소매를 흔들
자, 잠에서 깨어난 듯 얀의 모습을 바라보았고, 그제야 방금 전의 상황이 머리
속으로 처리가 되었는지 점차 모멸감으로 인해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세스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제롬은 자신을 말리는 얀을 뒤로하고 성큼성큼 세스에게
다가가 자신의 손에 끼어 있던 흰 장갑을 세스의 면전을 향해 던졌다.
세스는 자신의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장갑을 낚아채었다. 그는 재밌다는 듯 자
신의 손에 들린 장갑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어서 주변을 바라보자, 소동으로
인해 구경꾼들이 더욱 늘어나 있었다. 빨리 그를 끌어들여 조용한 장소로 옮
기는 수밖에 없다.
얀의 모습을 보고 오해한 제롬을 진정시키기 위해선 설명을 해야 하지만, 이미
오해가 깊어서 말을 꺼내기도 전에 더 큰 불란만 일어날 수 있었다. 그걸 막기
위해선 제롬에게 치명타를 가해 그가 더 이상 위험한 행동을 못하게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리고... 원하던 바대로 제롬은 자신이 친 올가미에 걸려들고 있었다. 생각을
마친 세스는 미소지으며 정중히 물어보았다.
"결투 신청의 의미입니까?"
"..그렇습니다..."
제롬은 눈앞의 세스를 두고 이 사이에 뭔가 걸린 사람처럼 화난 목소리로 대
답했다. 살기가 묻어 나오는 제롬의 대답에도 별 반응없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
이던 세스는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제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제가 왜 당신에게서 결투 신청을 받아야
합니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세스는 말끝을 흐리며 슬쩍 제롬을 바라보았다. 제롬은 얼굴을 찡그리며 화를
참아내고 있었다.
걸렸다. 걸렸어. 예전 얀에게서 들었던 대로였다. 제롬의 성격이 쉽게 짐작갔다.
그는 얀에게 일편단심이다. 솔직히 그가 파나인가의 사람이라는 것은 의외였다.
(얀의 말로는 거의 보모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역시 뛰어난 명장을 배출한 파
나인가의 혈족이라고 해야할까... 전형적인 기사의 본보기라 할만했다. 하지만,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이상 제롬도 범인의 경지를 넘지 못한다. 얀이라는 인질
이 있는 이상 제롬은 자신의 손안에서 놀아나야 하니까... 그 본보기로 평소라면
뛰어난 기사였을 그가 자신이 내놓은 도발을 깨닫기는커녕 미끼를 덥썩 물었다.
"...잘못한 것이 없다고! 감히 누구를 욕보였는지...!!"
"좀 전의 말을 이해 못하신 것 같군요. 당신에게 이런 말하긴 싫었지만...그렇다
면 확실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롬은 자신의 말에 침착하게 응대하는 소년을 바라보며 분함으로 떨리는 감정
을 추스르지 못했다.
좀 전에 얀님을 사랑한다던 그 말 같지도 않은 말 말인가? 저자가 얀님을 장난
감처럼 가지고 노는 속셈이 무엇이지? 지금의 그의 행동은 하찮은 말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겠다는 건가?
불신으로 가득찬 제롬의 눈동자를 지긋이 바라보던 세스는 한숨을 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제가 제 부인에게 애정표현을 한 것이 잘못입니까?"
갑작스런 세스의 대답에 제롬은 말문이 막혔다.
물론, 좀 전의 청년에게서 같은 말을 듣긴 했지만 그것이 누굴 지칭하는 것 인
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이 소년은 분명...
"..뭐, 뭐라고...?"
제롬이 혼란스러워하며 뒤돌아 얀을 바라보자 얀은 당황해 하며 시선을 피했다.
얀의 행동에서 왠지 모를 진실성이 느껴지자, 제롬은 혼란스러워 하며 고개를
천천히 돌려 세스를 바라보았다. 제롬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어 세스에
게서 직접 확인하려 했다.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오늘 이 연회가 어떤 자리인줄 아실텐데요."
"그야, 카필로아가의 며느리를 소개하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제롬은 말끝을 흐렸다.
세스는 빙긋 웃으며 손을 들어올려 어느 방향을 가르켰다. 그의 손을 따라 시선
을 옮기자 그 자리엔 얀이 서있었고 얀은 당황해하며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모르신다면 직접 소개해 드리지요."
제롬 곁을 스쳐지나가 얀에게 가까이 다가간 세스는 자연스럽게 얀의 두 어깨
에 손을 대며 말했다.
"얀 카필로아... 제 아내입니다."
얀은 창피해하며, 완전히 석화되어 있는 제롬을 확 휘어잡고 테라스에서 걸어나
갔다. 그 뒤를 따라 아직까지도 즐겁게 미소짓고 있는 세스, 그리고 역시 부부
간에 일에 괜히 끼여들었다고 자책하는 파엘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무심한 밤하늘만이 조금전의 소란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정적으로 가라앉은 테
라스를 은빛으로 가득 물들여 갔다.
**
"그게 사실이냐?!"
뒤안은 평소 포커페이스를 깨고 감정이 드러난 얼굴로 카롯(뒤안 부하)을 다그
쳤다. 방금 전까지 일을 하고 있었는지 책상 위는 어지러운 서류들로 가득 했
다. 밤이면 밤마다 뒤안에게 사랑 받았을 서류들이건만 오늘 이 시간만은 찬밥
신세가 된 채 뒤안의 눈길조차 받지 못했다. 그들 대신 뒤안의 주요 관심을 받
는 인물은 바로 카롯이었다.
오래간만에 뵌 주군의 눈에 띄는 변화에 놀란 카롯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
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외로운 생활을 견뎌왔던 데다 살이 타는 듯한(?)
고통을 보내는 시간이 점차 늘어가면서 그것을 마력의 도움없이 정신력만으로
혼자 버텨왔던 뒤안의 영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많이 나약해져 있었다. 평
소라면 이런 모습은 구경도 못했을 것이었다.
"다행이구나...."
방금 전 열을 내던 것이 거짓이었던 듯 뒤안은 안심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주
억거렸다. 그는 서 있는 것이 힘이 드는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디아테스 님..."
"걱정할..것 없어. 잠시 어지러울 뿐이니까...."
뒤안은 머리가 뒤로 넘어갈 듯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래서 어떻더냐? 그는...."
뒤안은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카롯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의자 등받이에
편히 기대어 있는 뒤안을 잠시 바라보던 카롯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했다.
"저는 그가 얀 왕자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이곳으로 왔기 때문에..."
"...그래... 됐다. 그 정도 안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뒤안은 부드러운 어조로 카롯이 자책하는 것을 만류했다. 그는 입가에 작은 미
소를 띄우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유네가 듣는 다면 무척이나 좋아하겠군...."
호들갑을 떨 유네를 생각하던 뒤안은 일어서려 손에 힘을 주었으나 제대로 힘
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훗, ...이런 폐인이 다되었군..."
뒤안은 자조하듯,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하긴.. 그 녀석(유네)은 여기를 자기 방 드나들 듯 돌아다니니까...."
힘없이 손을 내리며 유네는 웃어버렸다.
"...내가 일부러 갈 필요가 없는지도..."
그 모습이 가슴 아픈 듯 입술을 깨물고 있는 카롯은 세차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꽉 쥐고 있는 그의 주먹에서 핏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부들거리며 떨리는 손을
더욱 굳게 움켜쥔 카롯은 마침내 감정이 극에 달했는지 가슴속에 묻어두려했던
말을 꺼냈다.
"...이런 모습의 주군은 보기 싫습니다."
"......?"
"...제가 아는 디아테스 님은 패기가 가득하고,
우러러 볼 수 없을 정도로 도도하며
남을 경멸하거나 멸시하는 눈초리로
눈빛하나만으로 다른 이들의 공포감을 조성할 수 있는...
그런 분이란 말입니다..."
"풋, 내가 그렇게 보였단 말이지..."
카롯의 얘기에 흥미가 드는지 뒤안은 기운을 차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맞추던 카롯은 무릎을 꿇었다. 그의 행동에 뒤안은 놀란 듯 표정을 약간 굳혔다.
"제발 마계로 돌아가 주십시오."
가라앉은 눈으로 카롯을 내려다보던 뒤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싫다면...?"
"억지로라도 모시고 가겠습니다.... 얀왕자의 소식을 알았으니...
이제 이곳엔 미련이 없으실 것 아닙니까...?"
"....그래도 싫다면...?"
"그것도 안된다면... 상부도 보고를 해서라도..."
뒤안은 낮고 싸늘한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내가 그렇게 같잖게 보이는 거냐? 죽음을 원하는 건가?"
"주군께서 명령하신다면 언제든 죽을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
니다. 억지로라도 마계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한 일에 책임지겠습
니다. 예전에는 어땠을 지 모르지만... 지금은 저에게조차 힘으로 당하지 못한다
는 사실을 간과하신 것 같군요."
카롯은 죽음을 각오한 듯 거침없이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난 죽는 것을 택하겠다."
뒤안은 힘을 잃은 탁한 음성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카롯은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얼굴엔 뒤안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치료방법이 있는데, 왜 마다하시는 겁니까? 왜 그렇게 죽음을 원하시는 겁니까?
지금 이대로 지내신다면...."
뒤안은 팔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억지로 일어나 카롯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리
고 손을 들어올려 카롯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원하는 거다...."
고개를 숙이고 괴로워하는 카롯의 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젓던 뒤안은 카롯의 붉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탐스럽고 가느다란
붉은 실타래가 뒤안의 여린 손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그리고 네가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미소지은 뒤안은 카롯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의 손놀림
에 따라 카롯의 턱이 '확' 위로 젖혀졌다. 뒤안은 몸을 숙여 카롯의 귓가에 조용
히 속삭였다.
"난 죽는다고 말한 적 없다...."
"...하지만....!!"
"..다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나도 아직 죽을 생각은 없어. 죽음의 신
이 나타난다고 해도 이 손으로 죽여서라도 삶을 쟁취할 거다."
진흙구덩이에 뒹구는 치욕스런 삶은 살더라도 지금은 죽을 수 없다...
알 수 없다는 눈빛이 되어 있는 카롯의 붉은 눈동자를 보며 뒤안은 조용히 미
소지었다.
"...왜 못 믿겠다는 거냐..?"
"..아닙니다. 감히..."
뒤안은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 그의 손에서 풀려난 아름다운 붉은 실타래가
허공 중으로 너울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평소라면, 죽으려 해도 끊어지지 않는 목숨을 저주하며,
억지로 살아가게 만드는 그(놈)를 저주하며,
발작이 일어나 이 한목숨 끊어지기를 바라는데... 왜 지금은...
....지금은....
그(놈)에게 빌어서라도 삶을 이어가고 싶을까...
아무리 수치스럽더라도,
저주스럽게 여기던 하찮은 생(生)을 살아가고 싶을까...
얀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심술궂은 미소를 보고 싶다....
그리고 만나서 내가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건지..
그에게 묻고싶다...
뒤안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힘없이 카롯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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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제너시스 Date : 22-01-2002 00:31 Line : 250 Read :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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