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원연결자-109화 (109/127)

110.역사는 밤에...(3)

세스의 설명을 조용히 듣고 있던 제롬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지금 그 얘기를 듣고 찬성하리라 생각한 겁니까!"

괜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떨떠름한 얼굴표정이었다. 이내 못마땅한 표정을 하

고 세스를 내려다보자, 제롬을 올려다보던 세스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를 마주보았다.

"물론 제 부탁을 들어주기엔 마음에 내키시지 않겠죠. 저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

세스는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얀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았다. 고개를 들어 제롬

을 바라본 그는 싱긋 웃었다.

"이렇게 비장의 카드가 제 손안에 있으니 어쩌겠습니까? 따라주셔야죠."

제롬의 화를 잔뜩 돋궈놓고 세스는 은근슬쩍 자리를 내뺐다. 물론 그 동안 쌓인

대화를 풀으라는 듣기 좋은 인사말을 남기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세스의 행동을

무마하기에는 불만으로 가득찬 제롬의 얼굴은 무시무시했다.

"어째서 저런 자와 행동을 하셨던 겁니까?"

세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불만으로 팅팅 부어있는 제롬의 얼굴을 보자 웃음

이 나왔다. 하지만 얀은 웃음을 참으며 짐짓 심각하게 얘기했다.

"그렇게 말한다해도 이미 도와주기로 약속했는 걸. 한번 약속한 이상 번복하는

것은 부끄러운 행동이라고 봐."

"말씀은 옳습니다만..."

제롬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스가 도망치기 전까지 잠시만 이런 모습이면 된다구. 난 그다지 불편하지 않

으니까 화낼필요 없어."

"하지만 얀 님에게 하는 그 괘씸한 행동을 보셨지 않습니까? 함부로 막대하는

그의 행동에 화가나지 않으십니까?"

"왜 화를 내야하는데? 물론 나도 조금 괘씸하긴 하지만, 그건 친한 친구사이의

행동이잖아. 그걸가지고 따지고 들자면 한도 끝도 없어."

"하지만, 그 행동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제롬은 뭔가를 곱씹으면 화를 내고 있었다.

그 행동?

얀의 고개가 갸웃했다. 아, 그거. 얀은 제롬이 마음에 걸려하는 게 무엇인지 깨

닫고 손바닥을 내리쳤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눈웃음을 지었다.

후후후후, 제롬도 순진하다니까, 그걸 아직 맘에 두고 있으니.. 맞아, 제롬에게

써먹으면 영락없이 걸려들 거다.

얀은 재미있는 유머를 들었을 때 남에게 발설하고 싶은 욕망 비슷한 충동을 느

끼며 제롬을 바라보았다.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얀이 다가서자,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제롬은 왠지

모를 한기를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곧 의자에 다리가 닿아 쓰러

지듯 쇼파에 앉아 버렸고 굳어진 채 이상한 행동을 하는 얀을 얼떨떨한 표정으

로 올려다보았다.

제롬의 앞으로 다가온 얀은 슬며시 한 손을 내밀어 제롬의 얼굴을 감쌌다. 얀의

얼굴엔 차갑지 않지만 건드려선 안 될, 위험을 품고있는 유혹적인 미소가 떠올

라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제롬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눈동자를

흘끔 돌려 자신의 볼에 대어진 얀의 손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롬은 얀

의 얼굴이 점차 가까이 다가오자 도망치거나 밀쳐야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굳어져 버렸다.

"풋, 푸하하하. 아, 알았어. 하지 않을 테니 긴장하지 말아. "

잔뜩 긴장으로 굳어진 제롬의 모습을 보며 얀은 테이블을 두드려 가며 웃어제

켰다. 웃을 때마다 어깨가 들썩이며 귀밑머리로 길게 내려진 청은발이 허공에

긴 궤적을 그렸다.

"후후훗, 제롬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 였단 말야."

잠시동안 제롬을 바라보며 웃고만 있던 얀은 손가락을 들어올려 입에 대고 키

스하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세스의 트릭을 알게된 제롬은 온몸으로 떨며 분노

했다.

"...그...그..게...진실입니까..?"

얀은 키득키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한참을 웃다가 감정이 가라앉았을 때쯤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해 낸 듯 고개를 돌려 제롬을 바라보았다.

"어,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제롬은 나에게 존대를 하지? 제롬의 나

이를 보거나 신분을 생각해봐도 난 이해가 안돼."

반짝이는 호기심어린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자 제롬은 움찔하더니 곧 진지한

표정이 되어 마주바라보았다. 그는 침착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 주노라는 도시에 살기전의 기억은 거의 없다고 했죠?"

"응. 생각나는 거라곤 제뉴인이 나를 돌봐줬다는 것과 미르 형 유네 형, 여동생

이 자주 놀러왔던 거랑...큰누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제롬이... 제뉴인과 마찬가

지로 나를 돌봐주었다는 것..."

얀은 웃으며 말을 하다 떨떠름한 얼굴표정을 하며 덧붙였다.

"아, 맞다. 그 뒤안도 있었지...."

그 놈을 어떻게 잊을리오...

한 인상하며 얼굴을 구기고 있던 얀은 문득 무언가 깨달았는지 얼굴이 상기되

어 뒤돌아보았다. 눈을 반짝이며 제롬을 바라보던 얀은 약간 몸을 배배꼬며 말

을 이었다.

"저....미르 형은 잘 있어?"

말하고도 쑥스러운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힌 채 제롬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 얀의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제롬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얀에게 다가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얀은 제롬이 갑자기 자신의 앞에서 부복을 하자 당황해 하며 뒤로 물러섰다.

"뭐, 뭐야. 왜 이러는 거야."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 말씀드리려 했지만... 여건이 되지 않을 것 같

아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제르미스 파나

인, 당신의 호위를 맡은 기사입니다. 미르 왕세자님의 명을 받아 얀왕자님을 찾

고 있었습니다. 왕자님을 빨리 모시지 못한 점 마음속 깊이 사죄드리겠습니다.

이 일은 비밀에 속하는지라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발설할 수 없었습니

다. 용서해주십시오."

"자, 잠깐. 용서구뭐구. 방금 그 말 진실인거야? 내가 왕자라구?"

"그렇습니다."

아-, 아무리 꿈이라지만... 좀 심하군, 그것도 공주면 좋잖아. 웬 왕자?

얀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제롬에게 물어보았다.

"그럼 내가 살던 곳은 어디인거야? 제롬이 나를 찾으러 왔다면 이곳은 아닌 것

같은데..."

"크로나 국과 맞닿아 있는 세헤르나란 곳입니다. 왕자님께서 마음에 들어할만한

아름다운 곳이죠."

제롬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차오르는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감정이 드러나

는 그의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지은 얀은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그럼 여태 혼자서 나를 찾은 거야? 힘들었겠네. 고마워 제롬.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얀의 말한마디 한마디를 음미하며 가슴속 깊이 기뻐하던 제롬은 순간 잊고 있

던 사실이 떠오르자 경악으로 얼굴이 굳어졌다.

"...저.. 사실은 저 뿐만이 아니라..."

"뭐? 동행이 있는 거야? 누구지? 어서 소개시켜 줘. 내가 아는 사람이 면 좋겠

는데..."

들떠있는 얀을 보자 제롬은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입밖으

로 나왔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꼭 아셔야 할 분입니다. 왕자님의 약혼녀이니까...

그런데 그분에게 왕자님의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얀의 모습을 다시 확인하자 한숨이 푹 나왔다. 속으로 끙끙 앓으면서도 내색하

지 않고 미소를 지은 제롬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왕자님에게 소개시켜드릴 분은 왕자님에겐 무척이나 중요한 분인데요. 잠시만

이라도 여장을 풀 수 없을 까요?"

제롬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는 모양새를 갖추던 얀은 제롬의 걱정과는 거리가

먼 밝은 웃음을 지으며 냉큼 대답했다.

"잘 때조차 여장을 하고 자는 걸.(그래봤자 여자잠옷만 입은거지만;) 이곳은 사

람들이 많아서 위험하다구. 조심해야해. 뭐 어때 날 찾으러 왔다면 한 집안 식

구나 마찬가지 아냐? 어, 제롬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고양이가 쥐생각해준다고 얀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제롬을 바라보았다.

네, 네. 한 집안 식구나 마찬가지죠.

제롬은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응접실 문을 닫은 후 한숨을 푹 내쉬던 제롬은 인기척이 들리자 고개를 들었다.

"대화는 충분히 나누셨습니까?"

세스였다. 제롬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미소를 지은 채 정중한 태도로 제

롬을 대하고 있었다. 제롬은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상관하실 필요없습니다."

"저는 당신과 편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경계하지 마십시오."

"장난을 가려가며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와는 이야기하기 싫습니다."

가시가 돋친 제롬의 말을 듣고 미소지은 세스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반문했다.

"뭔가 잘못 생각하신 것 같군요. 제가 한 행동을 장난이라고만 생각하신겁니까?"

"그럼 얀 님에게 한 행동이나 말들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놀리는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화를 참아내듯 가라앉은 제롬의 목소리에 작게 미소지은 세스는 그를 바로 바

라보았다.

"제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까? 당신의 생각은 편협적이군요."

"편협적?"

"그렇습니다. 물론 전 얀을 친구로서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 감정을 파고들어 가

보면 좋아한다는 감정보다는 좀더 깊이 있는 감정이지요. 친한 사이에서... 예를

들어 가족사이라면 좋아한다는 말로는 그들의 관계를 정의 내릴 수 없는 겁니

다. 전 얀과 몇 개월동안 여행을 같이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우여곡절도

있었고 서로에 대해 깊은 신뢰를 했습니다. 그것을 좋아한다는 말로만 정의내릴

수 없어, 부득이하게 사랑한다는 말을 차용한거지요. 물론 제가 장난삼아 당신

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당신 또한 얀에게 같은 감정을 가

지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세스는 빙긋 웃으며 제롬의 답을 구하고 있었다. 제롬은 순간 말문이 막혀 가만

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하지만 그 보단 깊은 감정...

그렇군... 사랑이란 말로밖에 정의내릴 수 없는 건가.

하지만... 얀님에 대한 내 감정은... 그 보단...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켜드리고 싶고

빼앗겨 버리는 것 보단 무슨 짓을 해서라도 곁에 있고 싶고..

언제나....믿고 의지해야할....

마음을 기대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대..

그가 있음으로 해서 마음 한구석이 채워져 간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따뜻해져간다.

제롬의 다물어져 있던 입술이 놀란 듯 살짝 벌어졌다.

맙소사... 이건 주군에 대한 충성심이라기 보단...

..열렬한 신봉자 같은 기분이잖아...

제롬은 자신도 모르게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이

해가 간다는 듯 끄덕였다.

"좋은 말씀주셔서 감사합니다. 카필로아 자작. 당신에겐 배워야 할 것이 많은 것

같군요. 다음에도 좋은 가르침 바랍니다."

제롬은 씁쓰름한 미소를 지으며 세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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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봉자....?하고 의문을 가질 분들도 있겠지만...

내말이 곧 법이요. 진리이니...(물론, 이 세계에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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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y in dreams(차원연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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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제너시스  Date : 27-01-2002 22:29  Line : 204  Read :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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