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역사는 밤에....?<5>
밤늦은 시각,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자 으스스한 기분이 절로 드는 궁전의 복
도로 문을 열고 나서는 인물이 있었다. 벽에 걸려있던 램프의 불빛이 남자의 상
아색머리카락을 밝게 비추었다. 좌우를 조심스럽게 살피던 그는 옆구리에 방에
서 챙긴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로 가득한 바구니를 들고, 도둑고양이 걸음으로
조심스럽게 복도를 걸어나갔다. 많이 해본 솜씨로 보이는 남자의 움직임은 경비병
이 지나갈라치면 어둠이 드리워진 벽에 달라붙어 그들이 낌새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대단했다.
머리를 내밀고 그들이 지나간 방향을 내다보던 남자는 후다닥 복도를 가로질러
갔다. 한달전까지는 그들의 움직임에 신경쓰지 않고 다녔던 그였지만, 몇 주 전
형님이 특별히 그를 불러 주의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기특한 행위를 형님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가슴이 아프긴 했지만, 형
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리는 것은 양심상 용납이 안되었기에 부득이하게 이
런 편법을 써서 움직이고 있던 것이다. 이것은 다 친구를 생각하는 자신의 아
름답고도 숭고한 마음 때문이었다. 자신의 친구는 남자자식이면서 더러운걸
무지 싫어하는데 지금쯤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으니 무지 갑갑해 할게 충분
했다. 물론 그 혼자서 목욕을 할 수 있을 테지만... 혼자 움직이는 걸 힘들어
하면서 꼴에 자존심을 지킨다고 부득부득 몇 십분이면 끝날 것을 몇 시간에
걸쳐 목욕탕에 퍼질러앉는다.
앓느니 죽지....
한숨을 폭 내쉰 그는 앞을 내다보고는 또다시 열심히 내달렸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린다. 어두컴컴한 방안을 상상하며 문을 열었던 유네는 침대
가에 촛불을 켜고 우두커니 앉아있는 뒤안을 발견하자 반가움에 소리를 질렀다.
"어, 뒤안? 어쩐 일이야? 오늘은 괜찮은가 보네? 혹시 나 기다린거냐?"
자신에게조차 병명을 알리지 않은 채, 축축 늘어지기만 하던 친구가 웬일인지
평소라면 잠들어 있어야 할 시간에 일어나 있었다. 몸이 나아진건가? 유네는 흐
뭇한 마음이 들어 뒤안의 곁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몇 분 동안 가만히 그를 지
켜보아도 그는 아무 반응 없이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유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은 자극이 약했나?
성질은 죽여줄 정도로 나쁜 녀석이 평소에는 남들의 행동을 무시를 했기 때문
에 그의 관심을 끌려면 눈에 거슬리는 자극을 주어야만했다. 웬만한 것들은 그
동안 하도 많이 써먹은 지라 이제는 변변한 아이디어가 없어서 고민을 하던 유
네는 멍한 눈초리로 눈뜨고 잠 들어있는 뒤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땀에 젖어 몸에 척척 감기는 옷이 싫었는지 그 대신 흰 시트로 몸을 감싸고 있
었다. 하긴 기분 나쁜 땀에 절어있는 옷보단 낳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혈색좋아보이는데... 몸은 괜찮은 거냐?"
인사치레는 아니었다. 다른 때와 달리 뒤안의 얼굴엔 생기가 있어 보였다. 그제
야 자신이 온 것을 알았는지 뒤안은 무표정한 고개를 들어 흘끔 바라보고는 다
시 시선을 내렸다.
"...이제 안 와도 좋다고 했잖아."
"친구란 이럴 때 필요한 거야."
무뚝뚝한 하지만 나름대로 귀엽다. 냉큼 녀석의 말을 되받으며 피식 웃은 유네
는 뒤안의 옆에 앉으며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상한 것을 발견했
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유네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땀에 젖어
있는 은빛 머리가 목옆으로 내리 흘러있었는데 그사이로 목덜미에 있는 울혈(鬱
血)을 보았던 것이다. 그것도 꽤나 격렬했는지 목을 감싸는 머리카락들은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뭐야, 그 동안 힘이 없는 것 같아 걱정했더니 욕구불만이라서 그랬냐? 열렬해
라~ 치아모양으로 내출혈까지 일어났어~"
장난기 어린 조크를 던지던 유네는 무심결에 손을 들어 흰 시트로 몸을 둘둘
말고 있는 뒤안의 어깨에 손을 댔다. 유네의 손이 어깨에 닿자 뒤안은 흠칫 놀
라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평소 무관심 무행동으로 일관하는, 그것도 끓어오를
수준이 되어서야 조금이나마 관심을 보이는 뒤안의 행동지침을 알고있던 유네
는 그의 행동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온몸으로 거부하는 듯한, 기분 나빠
하는 살기마저 어린 뒤안의 눈빛에 유네는 두 손을 번쩍 들어 뒤안의 몸에 손
댈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는 변명조로 내뱉었다.
"난 그냥 땀을 많이 흘린 것 같아서..."
"...됐어, 가봐."
찬바람이 묻어날 듯 서늘한 어투로 말을 끊은 뒤안은 시선을 피하며 한쪽 무릎
을 끌어올려 고개를 파묻었다. 접근을 거부하는 분위기에 유네는 할 말을 잃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 발자국 걸음을 옮겼던 유네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돌
아보았다.
뒤안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다름이
없지만 뭔가가 달랐다. 뭐라 꼬집을 수 없는 기분이 가슴속으로 스물스물 퍼져
나가 암울한 기분을 만들어간다. 차마 방을 나설 수 없었다. 뒤안에게 그럴 일
은 없겠지만... 그의 행동을 보고 있자니 그가 도움을 바라고 있다는 생각이 들
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오지랖 넓게 상관해야할까 아니면... 그가 원하는 대로 물러설까... 하긴 저 녀석
자신말고는 이야기 나눌 친구가 어디 있기나 할까...
멈칫거리며 갈등하던 유네는 결국 뒤돌아 서고 말았다.
머리 속이 하얗게 변색되어 아무생각도 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자
신의 옆에서 말을 건네는 유네 녀석의 말도 멀리서 들리는 듯 희미했다. 옆에서
귀찮게 윙윙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 말 한마디 건네지 않으면 평생 옆에서
종알거릴 녀석이다.
"...이제 안 와도 좋다고 했잖아."
귀찮지만 대답해 주는 게 예의지... 점차 녀석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더 이상 녀석의 말을 받아주는 것은 불길에 마른 나뭇가지 집어넣는 격이다. 무
시하려고 했던 뒤안은 다음 순간, 유네 녀석이 생각 외로 자신의 상황을 날카롭
게 집어내자 가슴속이 불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뭐야, 그 동안 힘이 없는 것 같아 걱정했더니 욕구불만이라서 그랬냐? 열렬해
라~ 치아모양으로 내출혈까지 일어났어~"
흠칫,
녀석이 손이 닿자 뒤안은 자신도 모르게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머
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 깨닫기도 전에 타인의 손길을 거부하
며 몸이 움츠러든다. 녀석에게 치부를 들킨 것 같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뒤안
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유네를 노려보았다. 그의 모습을 보고 유네는 쭈
뼛거리며 미안한 듯 말했다.
"난 그냥 땀을 많이 흘린 것 같아서..."
"...됐어, 가봐."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진다. 뒤안은 자조적인 기분이 들어 싸늘히 대꾸했다. 멀
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지는 기분을 떨쳐내려 노력
했다. 하지만 저조해지는 감정은 조금도 낳아지지 않는다. 그렇게... 눈뜬 채로
멍해있었던 것 같다.
그때, 누군가의 손길이 뒤안을 안았다. 뒤안은 흠칫 놀라며 반응하려 했으나, 그
손의 주인은 자신을 놀래킬 생각은 없었던 듯 부드러운 손길로 다만, 등을 토닥
였을 뿐이었다. 낯익은 손길에, 또한 그렇다고 느끼는 자신을 이상하다고 생각
하며 뒤안은 고개를 들었다. 의아함을 담은 뒤안의 눈동자에 촛불의 빛을 받아
연한 금색빛을 내는 상아색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짐작이 간다. 녀석이다.
그걸 깨닫자, 일순 굳어있던 입술을 열고 뒤안은 나지막하게 위협했다.
"...죽인다."
뒤안이 건네는 상투적인 인사말에...
"그래, 죽여라, 죽여."
유네 또한 상냥하게 응답했다.
유네은 웃음소리를 내며 여전히 뒤안을 안고 있는 팔을 풀지 않았다. 따뜻하게
전해오는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던 걸까? 아니면 오랜 기간 겪어왔던 고통으로
인한 후유증때문일까? 잠시 동안 자신의 감각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녀석이 자
신이 안고있다는 사실에도 별 반응이 생기지 않으니 말이다. 밀쳐내려 했던 팔
을 내리며 조금 머뭇거리던 뒤안은 유네에게서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오자 그것마저 생각하기 귀찮은 듯 눈을 감아버렸다.
조금씩 나른해지며 희미해지는 기억을 움켜쥐고 있는 뒤안의 귓가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유네의 음성이 스며들 듯 속삭였다.
"...너... 살 좀 쪄야겠다. 감촉이 별론 걸.... 난 글래머가 좋걸랑...."
순간, 느슨하게 풀리고 있던 실이 팽팽히 잡아당겨지다 못해 끊어졌다. 앗, 하는
사이에 세상이 한바퀴 도는 것을 느낀 유네는 와(蛙:개구리)자세로 융단 바닥
떨어졌고 우아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선 뒤안은, 한쪽 발을 널부러진 유네의
등위에 올리고는, 기품이 있는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어깨를 흘러내린 은발에
서 장미향기의 달콤하고도 위험스런, 청량한 방향(芳香)이 퍼져나갔다.
"...그런 시건방진 소리한 입술이.... 이것?"
결코 고압적인 것이 아니라, 조용한, 나긋하다고 말할 수 있는 목소리였으나-
듣는 이에게 소름을 돋게 하는 무언가를 머금고 있었다.
아, 그래 내가 녀석에게 반응하지 않은 건 그 뭣도(뭐도) 아니다. 녀석이 바보라
서 상관하기 귀찮았을 뿐.
뒤안은 용서를 비는 유네의 등을 지긋이 밟아 누르며 한쪽다리에 체중을 실고
는 한 손으로 녀석의 옆얼굴을 돌려 입술을 비틀어 꼬집었다. 왜 이런 녀석에
게 크리스(얀)의 소식을 전해주려고 했을까, 자신을 혐오하면서 그는 차디찬
미소를 머금었다.
"그 동안 기어올라온 것까지 합해서 철저하게 정신무장을 시켜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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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y in dreams(차원연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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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제너스 Date : 07-02-2002 04:03 Line : 253 Read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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