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쫓는 자, 쫓기는 자(4)
톡톡,
가벼운 손놀림이 얀의 볼을 두드렸다. 휴식을 방해받고 있는 얼굴을 응시하자,
살짝 찡그려진 미간이 밉지 않은 곡선을 그리더니 곧 이어 두 눈이 슬며
시 떠지었다. 푸른 사파이어 같은 투명한 파란색 눈동자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으...응...?"
"잘... 주무셨습니까? 공주님."
웃는 낯의 클라우드는, 멍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얀을 보며 농담조
로 부드러운 음성을 흘렸다. 그제야 초점을 맞추며 상대방을 알아본 얀은
황급히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으앗, 제.. 제가 잠들었었나 보죠?"
허둥지둥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얀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난 클라우드는,
그의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리더니 난감한 듯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아... 그걸 잠들었다고 해야 하나? 제가 보기엔 기절이란 단어가 어울릴
듯 하군요."
얀의 동작이 정지했다.
기절?
기절이라 함은 한동안 정신을 잃는 것을 일컫는 단어로 순정 만화 주인공
의 전유물인 청순, 연약, 가련, 순수 4대 point가 채워져야 어울릴 수 있는
그 단어를 말함인가?
"기절... 이라고요?"
왠지 얀의 어조에서 희열의 기미가 느껴졌다. 얀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
던 클라우드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합니다.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은연중 알고 있었지만, 뒤를 쫓는 이들
때문에..."
"하하하하, 뭐 어쩔 수 없는 경우라는 것도 있잖아요. 괜찮아요."
미안해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즐거워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만, 얀은 자
신이 기절했었다는 소리에 약간의 기쁨과 쑥스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건강체의 화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신이 이런 경우 아니
면 언제 기절이라는 것을 해보겠는가? 얀은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뭔가가 어깨에서 떨어졌다.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리자
땅위에 주름이 잡혀있는 단색의 망토가 보였다. 그것을 본 클라우드는 얀
의 곁을 지나쳐, 허리를 굽혀 망토를 주워들었다. 의아해하는 얀을 바라보
며 미소지은 그는 그것을 자신의 팔에 걸치고 말했다.
"숲의 기온이 낮은 것 같아서..."
망토를 털고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적들을 속이기 위해 말을 풀어줬으니,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을 겁
니다. 우리를 쫓을 지 안 쫓을지는 그들의 마음이지만 조심하는 게 좋으
니까요. 대신 이제부터는 도보로 걷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대로 마을을 찾
아서 도움을 청해야겠죠. 걸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가죠."
잠시 고민하던 얀은 한숨과 함께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폭풍과도 같은 노기 서린 음성이 방안을 휩쓸고 지나갔다.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반백의 중년남자는 매서운 눈초리로 상
대방을 노려보았다. 의자에 기대어 앉아있던, 시선을 받은 금발의 남성은
담담한 어조로 말하며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당신과 같은 심정이라는 것
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나와 같은 심정이라구? 농담하는 건가? 자네의 그 잘난 음모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 아이.. 클라우드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
면 난 자네를 용서하지 않을 걸세."
"말씀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제 며느리도 같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애들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습니까? 억측이 심하시군요."
"자네의 며느리는 평민이라고 들었네. 마음에 안 드니까. 평판을 핑계삼아
이런 음모를 꾸민 게 아닌가?"
"..........."
"말을 못하는 것을 보니... 찔리나 보지? 클라우드가 돌아온 이상, 언젠가
자네가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일 줄은 몰랐네. 그것도
자신의 가족의 처리를 겸해서 말이지. 당대 최고의 모사꾼이란 말은 허튼
소리가 아니었군!"
"..........!"
막무가내인 상대를 응시하던 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말씀은 다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돌아가 주시죠. 파엘, 손님이 가신다고
하니, 마차에 연락을 넣어두게."
"자네의 손을 빌릴 것 없네. 내 직접 나가지!!"
축객령(逐客令)을 받은 바실로프 공작(클라우드의 백부)이 문을 나서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파엘은 카필로아 공작(엘)의 곁으로 다가오며
나직히 말했다.
"큰일이군요. 오해는 풀지 못하고 화만 부풀렸으니..."
"...그것보다... 소식은 있던가?"
엘이 자신을 돌아보자 씁쓸하게 웃은 파엘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없었습니다. 수색에 나선 지 채 몇 시간이 되지 않았을 뿐더러,
그쪽은 여러 다른 도시로 가는 길목이니 어느 방향으로 빠져나갔는지 짐
작할 수조차 없이 방대하니까요. 그 정체불명의 적들 때문에 초대 장소인
별장이 있는 방향으로 갔다고 추측하기도 어렵습니다. 오늘 일정을 몰랐
다면 길목에서 습격당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죠."
"그 말은 첩자가 있다는 소리겠지..."
"바실로프 공작님의 말에서 짐작해 볼 수 있듯이.. 이번 일은 바실로프 공
작님과 관계가 없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긴, 그 열혈 공작이 저렇게 날뛰는 것도 오래간만에 보았으니 말이지...
하지만... 공작의 세력 중 다른 인물이 일을 꾸몄을 가능성도 더불어 있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조사에 착수했으니.. 머지
않아 연락이 올 겁니다."
"그나저나 큰일이군... 일이 커지고 있어. 왕실에서 날아온 초대장에 응하
지 못할 확률이 크군."
엘은 오늘 아침에 날아온 왕궁 무도회의 초대장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
다. 들리는 소식통에 위하면 이번 무도회는 왕비의 간청에 위해 열리는
연회라고 했다. 그런 무도회에, 그것도 왕비가 특별히 마련한 초대장으로
초대받은 것이다. 푸른 데이지 꽃으로 장식이 되어진 몇 장 되지 않는 스
페셜 초대장은 얀과 세스에게... 그리고 아르세닌 가의 클라우드에게 건
네져 버렸다.
그런데... 5일 뒤에 열리는 연회에 얀과 클라우드가 출석하지 못한다면...
그 사실은 왕비에 대한 모욕이 될 수 도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겨우 잠잠해져 있던 세력 싸움의 불씨가 될 수도 있다. 바실로프 공작의
행동이 그걸 뒷받침한다. 불안감이 가슴 밑바닥에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비록 공격을 받았다는 것을 함구하고는 있다하나 비밀이라는 것은 언젠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에 확증을 심어주는 일이, 얀과 클라우드의 실종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예인, 무도회에 출석하지 못한다는 결과로 나타나 진다면...
문득 뭔가를 깨닫고, 자신의 생각에 고소(苦笑)하며 고개를 숙인 엘은 가
볍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런... 아무래도 난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 같군. 얀이
실종된 때에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담담히 말을 하던 엘의 눈동자가 흐려지더니 손으로 이마를 덮으며 자리
에 주저앉았다.
다 나 때문인 건가?
아들이 어렵사리 찾아온 보물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게 생겼는데..
그런 순간까지..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내가 만들고자 했던 이상(理想)때문에...
가족이 피해를 입고 있는 것에 무감각해 있었다.
나는... 이상에 고통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난 무슨 낯으로 세스를 대하지? 환대를 못
해줄 망정... 얀을 이런 일에 끌어들였으니 말이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괴로워하는 남자를 잠자코 보고있던 파엘은 조
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세스는..."
자신의 말이 그에게 닿지 않는 다고 생각한 그는 잠시 쓴웃음을 지으며
남자를 바라보다가, 엘의 곁에 앉으며 담담하게 얘기를 이어나갔다.
"세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얀을 찾는 일을 진두지휘하고 있죠.
지금 공작님의 모습은 보기 흉하군요. 결론이 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쩌면 얀을 금방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구요. 기회가 남아 있는데... 다
해보지 않고 괴로워만 하시다니... 공작님의 지금 모습은 어울리지 않습니
다."
"그런가...? 어울리지 않는단 말이지...?"
고개를 들은 엘은 파엘의 말을 곱씹어 보다 씁쓸히 웃어버렸다.
"미안하네... 모르는 새에 약해져 있던 것 같군. 자네에게 이런 추한 모습
을 보이다니 말일세. 정신 차릴 겸 세안을 하고, 차후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방안에서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불안하게 움직
이고 있었다.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던 그녀는, 어느 한순간 걸음을 멈추
고 뚫어지게 한곳을 주시했다. 어느새 그녀는 성큼성큼 응시하던 것에
다가섰다.
"............"
"묻고 싶은 것이 있는 건가?"
담담히 말을 내뱉은 쥬아렌은 팔짱을 풀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쥬아렌을
쏘아보던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어째 서지...? 네 능력이라면 충분히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설마 몸이
좋지 않았다는 터무니없는 핑계를 대려는 건 아니겠지?"
"그것을 묻고 싶었던 건가?"
"그래. 친구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꽤 오랫동안 같이 지내왔잖아.
왜 도와주지 않은 거지? 봐! 보라구. 네가 도와주지 않은 탓에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있어!!"
"...핑계가 아니라... 애릴의 달엔 능력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긴 하다. 하지
만..."
잠시 분노의 열기로 휩싸인 클로아를 조용히 바라보던 쥬아렌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구해야한다고 누가 정한거지? 난 이전에 제롬을 구하긴 했지만 그
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 아무런 책임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왜, 도와줘야 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너에겐 능력이 있잖아. 마녀를 물리친 능력말이야! 네가 능력을 보이면
힘없이 죽음을 당할 사람도 죽지 않아도 돼! 네 능력에 비하면 우린 나약
한 사람이잖아. 손으로 뭉개져 버리는 개미 같은 존재처럼 보여서 관심조
차 없는 거야? 아니라고 한다면 네가 그런 힘을 지니고 있으니, 우릴 위
해 나눠줘야 하는 게 옳은 일이잖아!!"
"힘이 있다고, 도와주지 않는다면 원망을 받아야 하는 건가? 왜지? 가만
히 있는데, 더 큰 것을 주지 않았다고 보채는 것과 같잖아. 자기 마음대로
기대를 하고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고 화를 내다니... 이상하군. 내가 보기
엔 이쪽의 인간이나 공격해 왔던 인간들이나 똑같은 생명체로 보여. 같은
값어치의 목숨인데 차별하다니... 모순이 아닌가?"
페이든 황태자의 클로아의 보호령과, 공격한 사람들이 로얄 가드였다는
걸 알아차린 쥬아렌은 명령을 서로 상쇄시켜 단지 클로아를 지키기만
했었다.
가려진 머리카락 뒤에서 하늘색 눈동자가 순수한 의문을 품은 채 클로아
를 바라보았다. 변함없이 높낮이 없는 쥬아렌의 음성에 질려버린 클로아
는 어조를 높여 소리쳤다.
"틀려! 같은 게 아니야. 모든 게 주관적니까 말이야. 다른 사람이 팔이 잘
렸다고 해도 자신의 손가락이 벤 게 더 아프게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라
구!!"
"틀려...?"
"그래, 틀려!!"
자신의 붉은 입술을 질끈 깨물은 클로아는, 악을 쓰듯 말하는 자신이 언
동에 스스로 놀라며 눈을 감고 더욱 크게 말했다.
"그래!! 내가 괴로워질 테니까 상대방의 괴로움을 묵과하는 거라구. 넌 얀
을 구해낼 수 있었을 것 아니야. 많은 걸 바랬던 건 아니라구. 우릴 공격
했던 적들을 죽이지 않아도 되었어. 단지 얀을 지켰다면... 지켰다면. 제롬
이 슬퍼하지 않아도 되었어. 괴로워하고 있어... 제롬이 괴로워하고 있단
말이야."
"단지 제롬이 괴로워 할 뿐이잖아. 그런데 왜 네가 힘들어 하지? 넌 상대방의
괴로움은 묵과할 수 도 있는 거라고 말했어."
쥬아렌의 순수한 대답에 피식 웃어버린 클로아는 혼란해 하는 그를 보며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어떤 아픔은 말이지... 상대가 아프면 더 아파져... 뭐야, 쥬아렌은 나보다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후후후"
클로아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쥬아렌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네 말은 이해가 가지 않아. 하지만... 얀을 구한다면 너의 괴로움은 사라
진다는 거겠지..."
쥬아렌은 가라앉은 눈동자로 클로아의 검은머리를 응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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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요상하니 아무생각없이 휘릭 읽어주세요;; 갈수록 왜 이러는지...
제롬이 위협(?)받는 씬 까지 넣으려고 했더니만... 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