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원연결자-123화 (123/127)

124. 쫓는 자, 쫓기는 자(5)-1

기대했던 것을 얻지 못하고 돌아온 제롬은, 수색 후의 노곤함이 아닌 착

잡함으로 암울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전의 예도 있었던 지라, 불안하게 자

신을 올려다보는 클로아에게만은 미소를 띄어 보이며 자신의 속내를 감췄

다. 피곤하다는 말로 자리를 피한 그는 자신에게 (특별히 얀의 배려로)배

정되어진 아기 방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문을 닫고 등을 기대었다. 잠시 엷은 조명으로 둘러싸인 방안을 둘러보던

그는 일순 아픈 표정을 얼굴에 나타내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침묵에

잠겨 있는 그의 몸이 벽을 타고 천천히 미끄러졌다.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카펫트를 움켜쥔 손으로 자신의 심정을 대신하던

그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

"한심하군..."

낯선 남자의 낮고 싸늘한 목소리.

경악한 제롬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숨어 있는 기

척을 느껴보려 하였지만 들려오는 건, 조용히 숨쉬는 다렌(아기)의 숨소리

뿐이었다. 모든 주의를 기울여도 사람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심각해진

덕분에 환청이 들리는 건지, 자신의 상태에 자조에 찬 서글픈 미소를 짓

던 그는 기분을 떨쳐버리려 고개를 흔들고는 천천히 문가에서 침대 곁으

로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의 힘을 이어받고도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건가? 쓸모가 없는

놈이군..."

걸음을 옮기던 제롬의 발이 급격히 멈추었다. 분명 좀 전과 같은 남자의

목소리다. 젊은, 유혹하듯 아름다운 울림을 지닌 목소리지만 그 안에 숨겨

져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서늘한 시선은 감추기 힘들다.

"어째서 저런 놈을 택한 거지, 아버지도 불쌍하군, 힘의 만분의 일도 사용

치 못해, 무기력해 하는 저런 인간이... 가치가 있었다는 건가?"

여전히 상대의 기척을 느낄 수 없다. 놀란 제롬은 심각한 얼굴로 주춤 뒤

로 물러섰다. 그는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디냐! 정체를 밝혀라!!"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방을 쳐다보았지만, 적의 그림자는 티끌만큼도 찾아

낼 수 없다.

"정말 눈치조차 없는 놈이군."

철저하게 에고이스트(이기주의자)적인 발언이 계속된다. 제롬을 조롱하고

비하하며 놀리고 있다. 제롬은 굳어진 표정으로 주위를 경계하며 재빨리

다렌의 침대 곁으로 몸을 붙였다.

시선만 내려 침대를 살펴보자, 다행히도 다렌은 아무런 탈없이 조용히 잠

들어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제롬은 또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흠

칫 놀라며 검을 빼어들었다.

"하긴, 열등한 종족이니... 처음부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지만..."

비웃는 듯한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곧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어 말

한다.

"그래, 좋아. 내 모습을 보고 싶은가 본데... 나도 네게 말해줄게 있으니...

모습을 보이는 편이 말을 나누기 편하겠지..."

"뭐...?!"

여유로의 제 집 드나들 듯 모습을 드러내겠다는, 남자의 말에 제롬은 삽

시간 얼굴을 긴장시키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긴장과 초조로 몸이 굳어지는 듯 느껴질 때, 방안 한가운데서 이상한 변

화가 나타났다. 그것을 발견한 제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설마..."

방 중앙에서 갑자기 형성된 금빛 구체가 더욱 빛을 발하더니 점차 길어지

며 거대한 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경험해보지 못한 현상에 제롬은

얼굴을 굳히며 다렌을 지킬 요량으로 뒤돌아보았다.

그 순간, 그는 떠올리기조차 싫은 옛 기억을 떠올리고 말았다. 다렌의 몸

이 점차 엷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소스라치게 놀라 다급히 순하게 잠들어

있던 다렌의 몸에 손을 대려하였지만 이미 잔영만이 남아있을 뿐 실체는

사라져 있었다.

텅 비어 있는 침대.

그것을 깨닫는 순간, 몸이 허공을 부유하듯 무력감이 몸과 마음에 더해져

어떤 생각도 취할 수 없었다. 얀 님이 장난스럽게 자신에게 다렌을 부탁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충격으로 다리에 힘이 빠져나갔다. 경악스런 사실

에, 무너져 내리려는 몸을 한 손으로 애써 지탱하며 굳은 표정으로 바닥

을 바라보던 제롬은 자신의 손이 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는 고개를 돌려 빛의 근원을 바라보았다.

환하지만 눈이 부시지는 않은, 기품 있고 우아한 금빛이 사방을 물들이고

있었다. 빛의 경계가 어디인지 모를 정도가 되었을 무렵, 빛이 점차 약해

지더니 중앙에서 빛을 뿜어내고 있던 광(光)구가 깨어지기 시작했다.

금이 가기 시작한 빛의 본체는 공기 중으로 부스러져갔고, 생성된 빛의

잔재들은 허공을 날아다녔다. 그것은 혼란에 빠져 있던 제롬이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아름다웠다.

실체를 파악할 수 없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 중심에 있었다. 처음에는

실날처럼 빛나며 은백색처럼 보이던 머리카락들은 점차 빛이 가셔지자 눈

으로 색을 확인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빛을 반사해내는 가느다란 흑

색 머리카락들이 부드럽게 살랑이며 허공에서 내려왔다. 머리카락과 상반

되는 창백해 보일 정도로 새하얀 피부와 피를 머금은 듯한 붉은 입술. 빛

의 잔재가 남아있는 넓은 어깨와 날씬한 허리의 건장한 청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눈을 뜨자 그 안에 보이는 건... 방사형으로 빛나는 금색테가

검은 동공을 감싸, 검은 홍채와 경계가 되어 있는, 금환식처럼 보이는 이

클립스 아이즈(일식안)였다. 신비롭고 아름다워 보이는 눈동자가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시선을 주던 남자가 가볍게 두 손을 들어올리자, 그를 둘러싸고 흰

빛이 생기더니 천이 나타나 그의 어깨를 덮었다. 늘씬한 장신의 몸에 걸

쳐진 천은 몸의 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드레이프가 지어졌다. 천의 앞을

여민 남자는 살짝 다물어 있던 붉은 입술을 열어 듣기 좋은 음성을 발했

다.

"자, 이렇게 모습을 보였으니.... 어라, 이젠 왜 아무 말이 없는 것이지? 내

모습에 놀란 건가? 보기 보단 여리군."

부드럽게 웃은 그는 천천히 제롬에게 다가갔다. 묘한 여운을 남기는 어투

와 이질적으로 보이는 일련의 사태들은 잠시간 멍해져 있던 제롬의 의식

을 일깨우는데 충분했다. 자신에게 다가서는 그를 보며 입을 굳게 다물고

그의 눈을 직시하던 제롬은 침대 가에 놓여있던 손에 힘을 주며 그를 향

해 소리쳤다.

"다렌은 어떻게 했지?!"

"...다렌?"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롬을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

럼 행동하는 그의 모습에 화가 치민 제롬은 상대가 어떤 존재라는 것도

잊은 채 성을 내며 말했다.

"그래. 침대 안에 있던 어린 아기 말이야. 알지 못한다고 시치미를 떼려는

건 아니겠지."

"..........풋."

제롬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들으며 잠시 침묵에 잠겨 있던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아, 그 다렌...? 글쎄, 어떻게 했을까...?"

일식 중에서도 특히 신비로와, 종교적인 감동에 휩싸이며 사람을 외포하

게 만드는 이클립스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제롬을 직시한다.

머리가 차가워진다. 놀리는 듯한 남자의 어투에서 제롬은 묘한 불안감에

휩싸이며 주먹을 쥐고 그를 노려보았다. 떨림은 이미 진정된 상태였다.

"네가 어떤 존재인지 나는 상관없어. 하지만... 단지 나를 놀리기 위해 이

런 일을 벌린 거라면... 확실히 화가 나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 되었으니...

칭찬이라도 해 줘야 겠군..."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그 칭찬은 고맙게 받아들이도록 하지."

가볍게 웃은 남자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그라 든다.

"하지만... 지능이 이 정도까지 낮은 줄 알았다면... 상대하지 않는 건데 그

랬어. 눈뜬장님이라니... 실망이군. 눈앞에 보이는 것을 찾지 못해 안달하

는 녀석이라니..."

서리가 내린 것 같은 싸늘한 얼굴로 제롬을 바라본다. 단지 시선이 바뀌

었을 뿐이데, 방안은 무거운 압력에 짓눌려 호흡하기 힘들다.

방안에 나타난 갑작스런 변화도 놀랄 만 하지만, 제롬은 남자의 말에

더 놀라는 눈치였다.

"...눈앞에 보이다니... 단지... 이곳은 나와..."

단어가 목에 걸려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뭔가 신경을 거스르는 느낌이 번져갔다.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그 사실을

깨달으며 제롬은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설마..."

커진 눈동자로 눈앞의 상대를 바라본 제롬은 고개를 돌려 텅 빈 침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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