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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內亂)
- 수도 코랄 백합궁.
- 그림자 기사단. 북상중 예정 도착일 5일후 - 철각궁기병대. 북상중 예정위치까지 앞으로 2일.
- 렌시아 산의 산적단 3000 수도를 향해 북상. 지휘자는 아크라는 이름을 가진걸로 판명되 연락원이 접선, 지정된 위치까지 앞으로 3일.
루야의 눈에서 넘어온 서류를 훑어보던 아리나스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영운에게 서류를 건넸다.
" 아직까진 순조로운 걸? "
" 그래. 이대로 진행되면 상당히 일이 쉬워질 수 있어. "
" 쿡쿡 귀족들도 두 공작의 저택에 드나들기 바쁜가봐. 정신이 없을 정도라는데? "
" 폐하께도 협조를 구한거야? "
" 물론♡ 재미있어 하시던걸. "
" 후후. 그분답군. "
영운은 또 다른 서류를 손에 들며, " 세장군도 참석한데? "
" 응. 아바마마가 직접 불렀으니까 말이지. "
" 그럼 그쪽도 이상은 없고............... 수방사쪽은? "
" 이미 모든 작전사항이 전달됐어. 명령만 기다리고 있지. "
" 좋군. 좋아. 새 도우 한의 암살부대는? "
" 비상시를 대비해 이미 각 아군귀족들의 호위와 암살준비에 들어갔어. 일부는 도이체 공작이 제국에 사신을 파견하면 그를 막기 위해 요소요소에서 대기 중. "
" 좋았어.............. 국왕폐하의 협조는?
" 물론, 임펠리아 역사상 다시없을 정도의 성대한 파티가 준비되고 있지. "
" 자아 그럼. 기다리는 일만 남은 건가? "
" 응. "
D-Day 까지는 4일. 상황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확실히 왕위 계승자라는 건 구미당기는 일임에 분명했다. 두 공작들은 자신의 세력을 총 집결시켜서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었다. 공식석상에서의 비방은 물론이요, 중상모략에 몇몇 과격파 귀족들은 암살자까지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아리나스는 아라크네를 통해서 수집되는 정보를 착실하게 분류. 각각의 공작에게 건넴으로서 그들의 싸움을 가속시켰다. 싸움이 너무 가속된 나머지 백주대낮에 암살소동이 일어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들은 아리나스의 손끝에서 춤추고 있었다. 정작 그들 자신은 몰랐지만 말이다.
임펠리아 국내에서 벌어지는 몇 번 안 되는 무도회, 그것도 전례 없을 정도로 커다란 파티이니 만큼 임펠리아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참가의사를 밝혔다. 특히, 두 공작 파는 거즌 다 참석하여 파티장의 분위기를 흉흉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어 있었다. 본디대로라면 바삐 춤신청을 하고 다녔을 귀족가의 자제들이나 그들에게 눈웃음을 보내며 꼬리칠 영애들도 꼼짝 못하고 있었다. 무언가 계기만 있다면 전쟁이라도 터질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 살벌한 무도회장은 지세상인양 누비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국왕이었다. 국왕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는데, 두 공작을 놀려먹고 있는 거라고 아리나스는 추측했다. 그 추측은 정확한 것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약간은 거만한 눈초리를 하고 자신을 바라보았을 두 공작들이, 자신의 앞에 허리를 굽신거리며 자신에게 아부를 떠는 모습이란!! 라인버거 공작과 별거 아닌 환담을 나누고 있으면 저 멀리 서있던 도이체 공작이 안절부절못한 채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고, 도이체 공작과 얼굴을 굳히면서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내용은 별거 아니었다. 음식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이었을 뿐.)를 나누고 있으면 라인버거 공작은 똥 씹은 얼굴이 되서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러니 재미있지 않고 어쩌겠는가?
" 물 만난 물고기군! "
" 고블린 속의 오거네 "
각기 표현은 다르지만 뜻은 하나다. 아주 제 세상을 만났어!!! 파티장의 한 구석에서 와인을 홀짝거리던 영운과 아리나스가 동시에 한 생각이었다. 전후좌우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는 국왕의 모습은 말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 흠, 준비가 갖춰지려면 아직은...................... "
" 응.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이 무도회는 3일 동안 계속되는 거니까. 아직은 시간이 있어. "
" 이미 그림자 기사단과 철각궁기병대는 제 위치에 도달해 은신중이다. 아군을 식별할 수 있는 식별표식도 전달했어. 아크가 늦지만 내일이면 도착할거라고 연락이 왔으니……. "
" 조급해 하지 말자고. "
" 음 "
밀담을 나누는 그들 곁에 다가가는 인물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머리가 허옇게 세어버린 사내들. 아리나스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이 크게 기뻐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 라니언 경! 제리코 경! 제르만 경! "
"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공주님 "
" 허허 인사드립니다. "
" 말괄량이 기질을 여전하시군요. 이런 곳에서 그렇게 뛰시면 어쩝니까? "
" 제르만 경은 별로 반갑지가 않네요. "
임펠리아의 국경을 지키는 세 노장들은 아리나스의 말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같이 목소리들은 커서 파티 장을 울릴 정도의 웃음소리라, 하나같이 이쪽을 돌아보았지만 그들이 저런 시선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 오오 공주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만, 부디 소신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
" 제르만 경 왕족모독은 벌이 무거워요. 아무리 이 나라에 공이 큰 경이라고 해도 용서해주기 힘들어 같군요. 그러니............... "
아리나스는 근처를 지나가던 시종이 들고 있던 쟁반을 통째로 들어서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쟁반에는 와인장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 벌로 이 잔들을 다 비우도록 하세요. "
" 큭, 푸하하하하! 얼마든지 비우지요! "
임펠리아의 국경을 책임지는 자들이고, 위나라의 군부를 거즌 틀어쥐고 있는 자들의 등장은 파티장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그동안 그들은 왕실의 어떤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고 국경에서 메시지만을 전달하거나 대리인을 참석시킬 뿐이었는데, 이번에 그 들이 이 파티에 직접 얼굴을 내민 것이다. 아아, 귀족들은 자신들의 예상이 맞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국왕의 행동에 한층 더 주의를 기울였다. 국왕의 주위에 달라붙어서 아부를 늘어놓는 모습들이 그렇게 추해 보일 수는 없었다. 물론, 두 왕자들도 마찬가지 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국왕은 진정한 능구렁이 이었다. 왕실무도회가 파할 때까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은 채, 웃기만 하다가 왕실무도회의 첫날을 끝내버렸다. 아리나스와 영운은 내심 그에게 경의를 보내고 있었다.
왕실무도회가 끝났지만 바쁜 인간들이 있었다. 그것은 왕실의 하녀나 시종 같은, 서비스 직업에 종사하는 자들이었고, 그들은 밤이 깊은 지금도 파티 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마 밤새도록 하고도 모자라서 날이 밝으면 이틀째의 파티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본궁의 불꽃은 꺼질 줄 몰랐다.
세 장군들은 본궁에 주어진 자신들의 숙소에서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것도 술중에는 가장 도수가 높다는 망각의 눈물로 말이다.
" 우욱...........죽었군. "
" 으음............ 화끈한걸. "
" ............... "
망각의 눈물을 한잔씩 마신 장군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내용은 똑같았다. 전장을 누비는 철혈의 장군들이 술 한 잔에 얼굴이 빨개져 있었으니까.
" 이것도 오랜만이구만. "
" 그러게나. 말이네. 정말 오래간만이야. "
" 후후 "
그들로선 이렇게 여유 있는 시간도 오래간만이었다. 한 치의 긴장도 늦출 수 없는 생활의 연속................. 저 빌어먹을 제국의 군사들은 심심하면 국경을 넘어와선 국경마을을 약탈하고 가버리곤 했다. 막상 국경을 지키는 수비대라곤 하지만 자신들은 그것을 피눈물을 흘리며 바라보기만 했다. 몇 번이나 피눈물을 흘린 걸까. 이 나라는 언제까지 이래야만 하는 걸까.
" 공주님인가? "
" 자네도 그리 생각하나? "
" 그 분밖엔............. 달리 생각할 사람은 없지. "
세 장군은 아무래도 다음대의 국왕으로 아리나스를 점찍은 모양이다. 사실 정치판에 아무런 연줄도 없는 장군들이 지지한다고 해보았자. 그다지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지는 3만6천의 국경수비군의 지지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틀어쥐고 있는 이 나라 정규군 절반의 지지이기도 하다. 그들이 목소리를 낮추며 심도 깊은 토론에 들어갈라고. 하는 찰나, 그들의 방문을 누군가가 두들겼다,
" 장군님들. 공주님이 부르십니다. "
" 공주님이? "
" 예 백합 궁에서............. "
" 알겠다. "
그들은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갔다. 문 앞에 있던 시녀는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이며, 몸을 돌려 앞장서서 그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 공주님이 무슨 일로 우리를 뵙자는 것이냐? "
" 제가 무얼 알겠습니까. 그저 장군님들을 모시고 오라고만.............. "
" 흠........서둘러 다오. "
" 예 "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들이 안내된 곳은 백합 궁이 아니었다. 아니, 백합 궁에 딸린 정원이었으니 백합 궁이라면 백합 궁일 수도 있겠다. 그건 넘어가고. 그들이 안내받은 곳에 아무도 없자 장군들은 좌우를 살펴보며.
" 공주님은 어디게시냐? "
" 장군님들 눈앞에 있잖습니까? "
수풀 속에서 술잔을 들고 나타난 영운이 한심하다는 듯이 장군들 앞에 서있던 시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장군들은 그들의 앞에서 어깨를 떨고 있는 시녀를 보았다. 머리에 둘러쓴 두건 사이로 언뜻 보이는 백금발. 설마!!
" 아리나스 공주님 체통이라 는걸. 좀 지켜 보이시지요. "
" 아아 왕족이라고 웃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정말 재미있는걸. "
두건을 벗어던져버린 그녀가 영운이 내미는 술잔을 집어 입가로 가져가며 장군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장군들은 멍하니 굳어있을뿐,
" 공주님 장난은 정도껏 치는 겁니다. "
장군들은 뒤에서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에 전신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 목소리는.............잊을 수가 없는 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죽었다고 생각하던 친구가.......... 그들의 둘도 없는 친구가 서 있었다.
" 에머지..........자네! "
" 오랜만이네 다들. "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부둥켜 않았다. 아아, 저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이란 말인가. 남자들의 우정이 흘러넘치는 저 모습!
" 아아 절세미남들이 저러면 몰라도(그것도 꽤 위험한 일이다) 60대가 다 되어가는 노인들이 저러는걸 보니 소름이 먼저 끼쳐. "
" 정도껏 하라고 공주님. 지금 이 장면은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만 있을 때라고. "
감동적인 장면의 등 뒤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영운과 아리나스의 대화였다.